아리스토텔레스 2편 논리학 > 철학 영혼의 돋보기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철학 영혼의 돋보기


 

아리스토텔레스 2편 논리학

페이지 정보

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976회 작성일 10-08-03 15:34

본문

아리스토텔레스를 머리에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갖게되는 인상(印象)은 형이상학보다 자연과학, 특히 논리학에 대한 선명한 어조가 아닌가 싶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 논리학을 창안하였으며, 개별 과학들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최초로 구상하였던 인물이며, 논리학과 과학을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취급한 철학자였다. 그는 논리학을, 어떤 과학이 내포하는 문제를 분석할 때 그것들을 적절히 언표(言表)할 수 있는 도구(organon)라고 생각했던 듯 싶다. 물론 형식 논리는 인간의 사유 형식들과 관련되지만, 논리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단순히 명제들간의 상호 관계나 언어 자체의 논리적 일관성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은 증명 형식들과 관련되어 있었고, 따라서 그가 특히 집중했던 문제는, 인간이 실재(實在)에 대해 정밀한 언어로 진술할 수 있는 것, 즉 어떠한 사물들이 존재하며 왜 그것들이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과학이 참된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 명제들은 왜 사물들이 이렇게 행동하고, 왜 사물들이 저렇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에게 학문은 사실과 이유에 관한 지식으로 구성되는 것이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그것은 결국 관찰과 관찰된 결과들을 설명하는 이론을 모두 내포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난로 위의 주전자로부터 발생하는 수증기를 관찰할 수 있으나, 그러나 단순한 관찰만으로는 수증기에 대한 체계적이며 과학적인 방식의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관찰에 대한 과학적인 명제는 연료의 종류나 물을 담은 용기의 종류와 같은 '우연적인 것들'과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사건, 즉 수증기의 발생에 집중하고, 우리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열과 물과 수증기를 관련시킴으로써 이 현상의 발생의 원인을 제공하면서 왜 그리고 어떤 조건하에서 열과 물은 수증기가 발생하는가를 증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과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형성하는 개념, 즉 언어인 것이다. 과학적 언어는 가능한 한 엄밀하게 과학의 주제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혀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문법학자들이 다루는 방식과는 다른, 단어와 언어에 대한 집중된 탐구이며 분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사유에 대한 연구로서 단어들은 그 사유에 대한 기호들이었다. 즉 그것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반영하는 사유를 분석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실재에 관한 인간의 사유를 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며, 언어와 실재의 적절한 관계의 정립을 위해 끊임없이 모색해야 하는 운명을 지닌 것이었다.




        1. 범주와 추론의 출발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어떤 것을 논증하거나 증명하기 전에 그의 추론 과정을 위한 명석한 출발점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은 그가 논의하고 있는 주제를 구체화할 수 있는 지평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 구체적인 종류를 파악해야 하고, 여기에 그 구체적 사물과 관련된 속성과 원인들을 첨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범주(categories)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범주들은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우리가 하나의 분명한 주제에 관해 사유할 때 우리는 하나의 주어와 그것의 술어들, 혹은 실체와 그것의 우연한 성질들을 고려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그 단어를 '진실하다'나 '유능하다'와 같은 술어들과 관련시킨다.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단어는 실재이며 그에 9가지의 범주들(술어들을 뜻하는 것으로서의) - 즉 ① 양(量), ② 질(質), ③ 관계(關係), ④ 장소, ⑤ 시간, ⑥ 상태, ⑦ 소유, ⑧ 능동, ⑨ 수동 -이 관련된다. 실체 그 자체도 하나의 범주로 고려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는 한 인간이다"이라고 말할 때, 그 경우의 인간은 술어이기 때문이다. 이 범주들은 과학적 지식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의 분류를 의미했다. 그것들은 모든 존재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실현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유 과정에서 은연중에, 혹은 의식적으로 사물들을 범주 내에 배열하며, 그 범주들을 유(類), 종(種), 그리고 개체(個體)들로 분류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체들을 종의 한 구성원으로 간주하며, 그 종을 유(類)에 관련시킨다. 중요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범주들이나 분류들을 정신의 인공적 구조물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그것들이 정신의 외부에 그리고 사물들 내부에 실재로 존재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에 의하면, 사물들은 그것들의 본성에 따라 다양한 범주들에 귀속되며 그러한 범주들을 유나 종의 한 구성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현실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인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기에 사유는 존재 방식과 관련되며 따라서 논리학과 형이상학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사유는 항상 구체적인 개체, 즉 실체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물은 단순히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하나의 명백한 이유와 적절한 목적을 갖는 존재인 것이었다.

  술어들(범주들)은 항상 주어들(실제들)과 관련된다고 그는 파악하였다. 술어들이 어떤 사물에 본유(本有)되어 있을 때 그러한 술어들이나 범주들은 그 사물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말(馬)은 그것이 말이기 때문에 어떤 술어들을 갖는 존재로 생각되는 것이다. 사물들은 다른 술어들도 갖는데, 색, 크기, 장소, 그것과 다른 사물들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결정 요인들과 같은 술어들은 본말적(本末的)이 아니라 다분히 "우연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려는 바는 '과학'으로 접근하는 일련의 술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더욱이 대응 관계, 혹은 위계를 갖는다는 점이었다. 이 순서는, 첫째로 사물들의 "존재"와 그것들의 과정들이며, 둘째로 사물들과 그것들의 운동에 대한 우리의 "사유"이며, 셋째로 사물들에 관한 "사유"와 "언어"로의 전환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언어의 분석인 동시에, 추론 과정의 분석이며, 언어와 추론이 실재에 관련되는 방식의 분석인 것이다.

  과학의 언어는 사물들의 행동 방식을 정확하게 논증하려 하기 때문에 그 언어는 증명과 진리에 모두 관련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증명의 추론 과정은 용어(term)들과 명제들의 적합하고 타당한 상호 연관 관계에 의존하며 그 관계에 의해 유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히 논리성 - 결론이 어떤 가정으로부터 타당하게 추론되었는가를 확인하는 -만을 취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결론이 실재에 관해 논증적인 가치를 지니려면 우선 전제가 참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과학적 지식의 대상은 존재 그 자체로서의 어떤 것"이어야 했다. 그는 "우리가 사실이 의존하는 원인을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사실의 원인으로서 인식하며 더 나아가 존재 그 자체로서의 사실의 원인으로서 인식할 때"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원인과 결과들은 관찰, 판단, 그리고 결론 등의 복합적 행위에 의해 관련을 갖게 된다. 관찰(경험)만으로는 사물을 정의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과학적 지식을 제공할 수 없다. 과학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추론의 출발점인 전제의 발견이다. 이 전제는 "귀납(歸納)"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사물이 우리의 감관과 멀리 있을 때보다 가까이 있을 때 사물에 대한 보다 좋은 지식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의 정신은 관찰에 의해 발견된 특정한 사물들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개별적인 인간들을 먼저 관찰한 뒤에 인간에 대한 일반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며, 한 떨기의 진달래꽃으로부터 전체 진달래꽃이라는 관념이 조성되는 것이다. 즉 귀납에 의해 전체를 형성한 뒤에야, 인간의 정신은 이 전제들을 연역적으로 혹은 논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귀납에 의해 제 1 전제들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지식의 이러한 측면을 가설과 실험의 당위적 결론으로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그의 강조는 연역과 논증적 추리에 집중되었고, 그의 "삼단논법"을 통해 연역 추리의 기본 요소들을 분석했고 체계화하는 것에 있었다.




         2. 삼단논법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을 "어떤 사물들이 진술되는 표현 양식이며 진술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그 진술로부터 나타나게 되는 표현 양식"이라고 정의하였다. 이것은 내포(內包)의 원리라고 하는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특히 제시했던 것은 과학적 표현은 엄밀하게 한 단계로부터 다른 단계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결론이 전제로부터 올바르게 추론될 수 있게 해주는 규칙들을 발견하려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내린 결론이 그것의 전제로부터 추론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혹은 우리가 어떤 두 가지 명제를 가지고 있을 때, 어떻게 이 양자로부터 제 3의 명제를 추론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은 삼단 논법의 기본 구조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하였다.

  삼단논법은 언어 관계의 특수한 형식을 나타낸다. 과학적 논증이 가능한 이유는, 사물들의 어떤 속성이나 성질이나 특성을 나타내는 어떤 단어들이 존재하기 때이며, 이러한 단어들은 "우연적"인 속성들과 비교할 때 "본질적"인 속성들을 나타낸다.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들 중 한 가지를 묘사해 주는 것이라고 그는 파악하였다. 반면에 누군가 검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명제는, 우연적인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한 인간에 있어 머리카락의 색, 혹은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사실조차도 필연적이거나 본질적인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죽는다는 사실은 "본질적"이며, 과학적 명제들이 내포하는 것도 사물의 그러한 본질적 속성들이다. 바로 여기에서 삼단논법의 특수한 언어 연관 형식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삼단논법은 본질적인 속성들에 관한 명제들을 연결시킴으로써, 결론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방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론을 유도하는 것은 대전제와 소전제의 단일 명사인데, 그것은 이 두 전제를 연결시킴으로써 결론에 필연적으로 도달된다. 명제들을 연결해 주는 이 명사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중명사(中名辭)"라고 불렀다. "내가 말하는 중명사는 그 자체는 다른 것 속에 존재하면서 그 자체 속에 다른 것을 내포하는 명사이다. 그것의 위치는 필연적으로 중간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가 참인 이유는, 그 명제가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는 대전제와 "모든 인간은 생명체이다"라는 소전제로부터 중명사(여기서는 생명체)에 의해 연결된 결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명사는 "죽는다"는 술어와 "모든 인간"이라는 주어를 연결해 준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결론이 검증 가능한 참이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 논법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만일 A가 모든 B에 속하며
      또한 B가 모든 C에 속한다면
      A는 필연적으로 모든 C에 속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연한 추론을 위해 하나의 형식적인 도구를 제공하는데, 형식적이라는 점에서 그 추론은 수학과 유사하다. 추론은 대전제와 소전제 그리고 결론으로 구성된다.

      대전제 : A는 모든 B에 속한다.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소전제 : B는 모든 C에 속한다. (모든 인간은 생명체이다.)
      결론 : A는 필연적으로 모든 C에 속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전제들과 결론간의 논리적인 관계를 결정하기 위한 도구이지만, 그가 삼단논법을 제시한 이유는 단순히 논리적인 추론을 확실히 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그의 실제 목적은 과학적인 논증을 위한 도구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관계, 즉 우리의 인식 방법과 사물들의 존재 및 행동 양식간의 관계를 거듭 강조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언어가 반영하는 사물들은 상호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단어들이나 명제들도 상호 연관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전제가 타당한 가정(假定)에 근거하지 않는다 해도 (즉 만일 전제가 참된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 해도), 삼단논법은 논리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진리나 과학에 도달하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종류의 추론을 구분하였다. 그 각각은 모두 삼단논법을 도구로써 사용할 수 있지만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는 "변증법적" 추론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의견들"로부터의 추론이다. 둘째로는 "논쟁적"인 추론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 같지만 실재로는 그렇지 않은 속견들로부터 출발한다. 셋째로는 "논증적인 추론이다. 이 추론이 출발하는 전제들은 참이며 근본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삼단논법의 가치는 전제들의 정확성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참된 과학적 지식이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사용되는 전제들이 속견이나 개연적 진리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논증적 추론은 마치 결론으로부터 전제들-결론의 필연적인 출발점을 구성하는-에로 거꾸로 진행되는 것 같다. 우리가 "모든 인간은 죽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사실상 인간의 죽음을 암시해 주는 생명체에서 그러한 원인들과 속성들을 거꾸로 추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을 생명체들의 집합에 포함시킴으로써 인간을 그러한 속성들과 연결시킨다. 논증적 추론은 확실한 전제들, 원리들 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 1원리들(archai)을 전제해야 한다. 논증적 추론은 참된 제 1원리들, 즉 어떤 사물이나 유(類)의 엄밀하게 정의된 속성들로부터의 추론이다. 그러므로 타당한 추론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참된 제 1원리의 발견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제 1원리들 혹은 아르카이는 어떻게 도달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에 의하면, 우리는 이 아르카이를 관찰과 귀납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어떤 사실들을 여러 번 관찰하면 "그곳에 존재하는 보편자는 명백히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저것"을 관찰할 때마다, 우리의 기억은 그것을 저장하며, 따라서 유사한 "저것들"을 자주 관찰하게 되면 이 모든 특정한 "저것들"로부터 하나의 보편적인 의미가 발생한다. 정신은 귀납의 과정을 통해 개체들 내부에 존재하는 보편자를 발견한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그 아르카이 혹은 원리들이 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간단하다. 즉 어떤 사실들에 작용하는 정신은 그것들의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이 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아르카이나 근본 전제들은 차례대로 논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전제들을 논증해야 한다면 이는 무한한 소급을 의미한다. 즉 각각의 전제에 선행하는 전제들이 무한히 증명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지식의 축적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르카이 혹은 근본 전제들을 재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지식이 다 논증될 수는 없다. 직접적인 전제들에 대한 지식은 논증으로부터 독립해 있다." 그에 의하면 과학적 지식은, 과학적 결론들과 동일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식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 이외에도, 우리들이 정의들을 명석하게 인지(認知)할 수 있게 해주는 지식의 근원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진리들을 인식하는 방식을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설명한다. 즉 "인지한다"는 단어는 플라톤의 "상기한다"든지 "기억한다"는 단어와 대조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진리를 "인지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2 + 2 = 4를 인식할 때처럼 진리를 즉각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산술적 진리를 "인지하는" 경우는 구체적인 사물들에 대한 덧셈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정신은 이러한 구체적인 경우들로부터 어떤 사물들이 어떤 종(種)이나 유(類)에 속한다든지, 어떤 관계들이 그 사물들간에 존재한다든지 하는 진리를 "파악"하거나 "인지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이란 근본 전제들에 의존하며, 그 근본 전제들은 지적 직관(nous)에 의해 도달된다고 주장했다. 사물의 본성들에 대한 근본 전제들과 정의들이 파악되면 논증적 추론 역시 가능해진다. 이 전제들이 정확하게 실재의 양상을 파악하고 있는 한에서, 삼단논법은 중명사라는 매개자를 통해 대-소 전제의 연결 관계를 확고히 해주며 따라서 타당한 결론들이 도출되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정리하면서 매우 불충분한 자료와 곤궁한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정도의 안내로 마무리해야만 했다. 삶은 매우 피곤한 것이어서 의지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고 또한 취할 수 있는 노력 이상의 것을 요청하고 싶어하는 순간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제한하는 것들을 초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제 3 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관해 이야기할 예정이며, 마찬가지로 형편과 시간과 고단함이 얼마간 양해한다면 서양철학사를 정리하기 위한 작업을 지시하거나 이끌어내도록 촉구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