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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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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809회 작성일 10-08-0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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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그의 1) 동굴의 비유, 2) 분할된 선(線)의 비유, 3) 이데아론을 통해 인간 정신이 지식을 획득하는 방식을 설명했고, 지식의 구성 요소를 표현했다. 먼저 동굴의 비유와 분할된 선의 비유를 다루고, 이데아론은 다음 장에서 취급해야 될 듯 하다.
1) 동굴의 비유 -

  플라톤은 그가 말하는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커다란 동굴 속에 살고 있는 몇 사람의 죄수들을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 곳에서 그들의 발과 목에 사슬을 묶어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고 상정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머리를 돌릴 수조차 없기 때문에 단지 그들의 전방에 존재하는 것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뒤에는 그들이 앉아 있는 바닥으로부터 돌연히 솟아오른 높은 지대가 있다. 이 높은 지대에는 물건들을 나르면서 앞뒤로 걷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나르는 물건들은 나무와 돌과 그 밖의 다양한 물질들로 만들어진 동물과 인간의 상(像)들이었다. 이 걷고 있는 사람의 뒤에는 불이 있고, 그보다 훨씬 뒤에 동굴의 입구가 있다. 족쇄에 묶여 있는 죄수들은 단지 동굴의 벽만을 볼 수 있을 뿐, 서로를 보거나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거나 그들 뒤에 있는 불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죄수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 앞에 있는 벽에 비친 그림자가 전부이며, 그 그림자는 사람들이 불 앞으로 걸을 때 비친 반영이었다. 그들은 대상물이나 그것을 나르는 사람을 결코 볼 수 없으며, 그 그림자들이 다른 사물들의 그림자인지 어떤지도 전혀 알 수 없다. 그들은 한 그림자를 보며 어떤 사람의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이 벽에 반사된 메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소리가 그림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진실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밖에 다른 것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죄수들은 벽에 만들어진 그림자들만을 인식하게 될 뿐이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일 이 죄수들 중 한 사람이 그의 족쇄를 풀고 일어나 주위를 돌아 불빛을 향해 걸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처음에 그의 모든 운동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가 벽을 통해 그림자를 보는데 익숙했던 그 움직이는 대상들을 직접 보게 되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혹시 이 움직이는 대상물들이 그림자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또는 그 대상이 그의 눈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만일 그가 불 자체로부터 직접 나오는 빛을 보게 된다면, 그의 눈이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그 때 틀림없이 그는 그를 풀어준 사람으로부터 도망쳐 그가 아무런 모순 없이 경험할 수 있었던 예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려 할 것이다. 그 그림자들이 그가 불빛 속에서 보았던 실존하는 대상물보다 더욱 분명한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이 죄수가 되돌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동굴 입구로 통하는 가파르고 험준한 통로를 통해 강제적으로 끌려와 태양빛을 접하게 된 후를 생각해보자. 태양 광선은 눈에 매우 고통스러운 충격을 주게 되고, 그는 그가 방금 실재적이라고 믿었던 어떠한 사물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의 눈이 동굴 외부의 세계에 익숙해지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에 그는 몇몇 그림자들을 인지할 것이며, 그것에 대해 친밀감을 가질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람의 그림자라면, 그는 이전에 그것이 동굴의 벽에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모양을 보게 될 것이며, 수면에 비친 인간과 사물의 그림자들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지식에 있어 중요한 전환, 또는 진보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한때 순전히 어둡고 흐린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이제 좀더 세밀한 선과 색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꽃의 경우, 그림자로는 실제의 모습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 그러나 물에 비친 꽃잎의 상은 시각에 하나하나의 잎새와 놀랍고 다양한 색상을 보다 분명하게 제공해준다. 이윽고 그는 꽃 자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자신의 눈을 하늘로 쳐들었을 때, 그는 밤에 빛나는 하늘의 물체들, 달과 별과 은하수를 보는 것이 대낮의 태양을 보는 것보다 용이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마침내 그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바로 보게 될 것이며, 더 이상 그림자나 그 밖에 다른 어떤 것을 통하여 그것을 경험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비상한 체험을 통해 그 풀려난 죄수는 점차적으로 사물들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태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고, 계절들과 사물의 온갖 변화를 이끄는 것이 태양이며, 그 밖의 많은 사물이 그와 같이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동굴의 벽에서 보았던 것, 즉 그림자 반영들과 가시계(可視界)에 실재하는 사물들과의 차이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태양 없이는 가시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 죄수는 동굴 속에서의 삶에 대해 어떻게 느끼게 될 것인가?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지혜(知慧)라고 믿었던 것을, 즉 지나가는 그림자들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사람을 칭송하며, 그림자들이 진행되는 질서를 가장 훌륭하게 기억함으로써 다음에 올 그림자를 가장 잘 추측했던 사람에게 상을 주어 모두에게 존경하도록 하였던 행동 방식을 회상하면서, 동굴 속에서 자신이 존경하였던 인물을 부러워할 것인가?

  그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예전의 환경에서 벽면에 반영된 그림자들을 분별하는 데 다른 죄수들과 경쟁한다면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대상들에 관해 다른 죄수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며 그 설명을 죄수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죄수들은 그 상황을 매우 우스꽝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이렇게 비웃을 것이다. 동굴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의 시력은 완벽했으나, 이제 그는 시력을 상한 채 돌아왔다고,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플라톤은 "만일 그들이 자신들을 속박에서 풀어 이끌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 노력하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들은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비유는 분명 인간을 동굴의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죄수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그림자의 불분명한 세계 주변에 자신들의 생각을 정향(定向)시켜 왔다. 교육의 기능은 인간을 동굴에서 빛의 세계로 이끌어 내는 데 있다. 빛의 세계로의 이끌어냄은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부과하는 것 이상의 의미인 것처럼, 교육도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인간의 영혼에 지식을 주입시키는 문제 이상의 것이다. 지식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빛을 응시하는 행위와 유사하다. 죄수의 눈이 어둠 대신에 밝음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결박하고 있던 족쇄를 끊고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에 있어서도 영혼의 무지의 원인이 되는 변화와 욕망의 기만적인 세계와 전적으로 결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전회(轉回 : conversion)의 문제, 즉 현상계(現象界)로부터 실재계(實在界)로의 완전한 전회를 의미한다. 플라톤은 이를 이렇게 말했다.

 "영혼의 눈은 이미 시력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영혼의 전회'는 영혼의 눈에 시력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방향으로 보는 대신에 마땅히 보아야 할 방향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으로 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고매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올바른 길을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통치자들이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고양(高揚)시키기 위해서는 "강제를 통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굴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 지고(至高)의 지식을 획득했을 때, 그들은 고결한 명상의 세계에 계속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동굴로 다시 내려와 죄수들의 생활과 노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두 개의 세계, 즉 동굴의 어두운 세계와 빛의 밝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소피스트의 회의주의에 대한 그의 반론이었다. 플라톤에 있어 지식이란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절대로 확실한 것이었다. 지식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이 가장 실재적인 어떤 것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었다. 소피스트들은 사물의 다양성과 계속적인 변화에 감염된 나머지 참된 지식의 가능성에 관해 언제나 부정적이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은 우리의 경험에서 나오므로 다양성을 띠게 되며 따라서 각자에게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플라톤 역시 우리의 감각적 경험에 준거하는 지식이 상대적이며 다양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소피스트의 사고를 인정할 수 없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무지한 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모든 행위 속에서 그들이 목적하는 어떤 유일한 지표도 그들의 목전에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림자들뿐이라면 우리는 결코 믿을 만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림자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실재적 대상의 운동들에 따라 크기와 모양에 있어서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은 매우 다양한 그림자들의 배후에 있는 유일한 "지표", 즉 "실재적" 대상을 발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신은 참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하나의 참된 이데아로서 정의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통치자나 사회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 다른 기준을 갖고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참된 정의의 이데아가 흐려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감각계(感覺界)와 가지계(可知界)를 구분한 배후에는 이러한 주 논의가 놓여 있었던 셈이다.

 




2) 분리된 선(線)의 비유 -

 플라톤에 따르면 참된 지식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정신은 발전의 네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각각의 단계에는 정신이 제시되는 대상의 종류와 이 대상이 만들 수 있는 사유의 종류간에 하나의 평행선이 존재한다. 이들 대상들과 그것들에 나란히 하고 있는 인식의 양태(樣態)들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platon1.jpg

  X --> Y 로의 수직선은 연속적인 것이며 매지점마다 어떤 정도의 지식이 존재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선이 실재의 최하급 형태로부터 최고급 형태로 진행됨에 따라 진리도 가장 낮은 정도로부터 가장 높은 정도에로 평행적으로 발전한다. 무엇보다도 선은 두 개의 다른 크기의 부분으로 분할되어 있다. 상층의 커다란 부분은 가지계(可知界)를 나타내며 하층의 작은 부분은 가시계(可視界)를 보여준다. 이 다른 크기로의 분할은 가시계에서 발견되는 좀더 낮은 정도의 실재와 진리를 상징하며 이는 가지계의 더 큰 정도의 실재와 진리에 비교된다. 이 두 부분은 같은 비율로 세분되어 네 부분이 되며 그 각각은 아래 부분보다 더욱 명석하고 확실한 사유(思惟)의 양태(樣態)를 나타낸다. 동굴의 비유를 생각해보면, 죄수는 어두운 그림자의 세계 X로부터 시작하여 밝은 빛의 세계 Y에로 올라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X로부터 Y로의 진행은 한 연속적인 정신의 과정을 나타낸다. 각각의 수준에서 정신에 현시된 대상들은 4개의 서로 다른 실재적 대상들이 아니라 같은 대상을 보는 4개의 다른 방식을 나타낸다.

     상상(想像 : Imagining)

  정신 활동의 가장 피상적인 형식은 선(線)의 가장 낮은 수준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정신은 허상(虛像)들 혹은 최소량의 실재와 상응한다. 물론 상상이라는 단어는 사물에 대한 단순한 현상을 넘어 보다 심층의 실재를 규명하려는 활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플라톤이 상상이라는 단어를 통해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현상들에 대한 감각적 경험 - 여기서는 현상들이 참된 실재로 간주된다 -이었다. 한 명백한 실례는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실재적인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한 실재적인 대상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러나 상상을 최저급의 지식 형태로 만드는 것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그림자 혹은 하나의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다시 동굴의 비유에서 인용되었던 죄수들은 결국 가장 깊은 무지의 족쇄에 걸려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대상들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림자 외에도 플라톤이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던 몇 가지 허상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예술가와 시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허상이라 하였다. 화가에 의해 소크라테스의 초상이 그려진다고 할 때, 이 초상은 1) 인간의 이데아, 2) 이 이데아의 소크라테스에로의 체현(體現), 3) 화폭에 표현된 소크라테스라는 세 단계의 최하단에 위치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예술은 허상을 산출하며 허상은 곧 목격자의 환상적 관념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상은 허상을 실재적인 어떤 완전한 것으로 이해하려 할 때 생겨난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화가란 사물을 보는 자기 방식에 따라 어떤 주제를 화폭에 담는다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진실의 입장에서 예술가의 허상이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을 그려내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력을 왜곡과 과장을 지닌 이와 같은 허상에 국한시킨다면, 그들은 실재 그대로의 사물들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플라톤은 시(詩)와 수사학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언어는 정신보다 먼저 허상들을 창조해내는 힘을 가지며, 시인과 수사학자는 그러한 허상들을 창조하는 언어들을 사용하는 데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영향력은 바로 언어사용의 기술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어떤 주장의 한 측면을 마치 다른 측면과 동일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소피스트나 수사학자들은 화가와 마찬가지로 같은 왜곡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정의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아테네 인들이 이해하는 정의는 한 사람의 변호인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이고, 한 특정한 소송 의뢰인을 위해 왜곡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 특정한 변호인의 정의에 대한 해석은 아테네적 견해도 또한 이데아적 정의의 왜곡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그 특정한 변호인의 정의에 대한 해석만을 들었다면, 그는 최소한 정의의 이데아로부터 두 단계 떨어져 있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아테네적 정의에 대한 그 특정한 변호인의 왜곡이 왜곡으로서 인정된다면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어떤 시민들로 하여금 아테네의 법률 자체가 참된 정의의 개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사는 정신이 자신의 대상으로서 접근할 수 잇는 것에 의존해 잇다. 그 특정한 변호인은 정의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진리를 표현했음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마치 그림자가 어떤 실재에 대한 약간의 증거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왜곡된 형식으로 표현했다. 어쨌든 상상(想像)이란 어떤 사람이 그가 허상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를 의미하며 따라서 상상은 환상이나 무지와 마찬가지라는 것이 플라톤의 논지였다.

     신념(信念 : Belief)

  상상 다음의 단계는 신념이다. 플라톤이 현실적인 대상들을 감각함으로써 생기는 정신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인식한다는 단어 대신에 믿는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을 감각할 때 우리는 그 감각에 대해 강한 확실성, 또는 그 느낌을 갖는다. 그렇지만 플라톤에게 있어서 감각한다는 것은 단지 믿는다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가시적 대상들은 그것들이 지니는 많은 특성들을 위한 상황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주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확실성이 아니다. 만일 지중해의 물이 바다에서는 푸르게 보이지만 바다에서 퍼냈을 때에는 투명하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바닷물의 빛깔이나 구성에 대한 인간의 확실성은 적어도 의문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모든 물체는 우리가 그것들이 낙하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중량을 갖는다는 것이 하나의 확실성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응시 행위에 대한 증명은 하늘 높이 있는 물체들의 무중력 상태에서도 마땅히 들어맞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에 따르면, 신념은 비록 그것이 관찰에 기초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속견의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가시적 대상에 의해 생겨난 정신 상태는 명백히 상상보다는 더 높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에 대한 보다 높은 형식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현실적인 사물들이 그것들의 그림자들보다는 더 많은 실재를 소유하지만, 그것들 스스로 우리에게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가지기를 원하는 모든 지식을 제공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정의는 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발견될 수 있지만, 또 다른 문화에서 다른 방식으로 규정된 정의를 발견할 때 당연히 정의의 참된 본질에 관한 의문이 생긴다. 색이든, 무게든, 정의든 간에 이러한 사물과 행위의 속성들은 특수한 상황하에서 경험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이들 특수한 상황들에로 제한된다. 그러나 정신은 이러한 종류의 지식, 즉 상황이 변한다면 그것의 확실성이 변할 수도 있는 지식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자와 법률가는 자신들의 오성을 이러한 특수한 경우들에 한정하려 하지 않고 사물들의 움직임 배후에 있는 원리들을 추구하려 한다.

    사고 작용 (Thinking)

  누군가가 믿음으로부터 사고 작용으로 옮겨가면, 그는 가시계(可視界)로부터 가지계(可知界)로, 속견의 영역으로부터 지식(知識)의 영역에로 이동한 셈이다. 플라톤이 사고 작용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상태는 특히 과학자들의 특성이다. 과학자들은 가시적 사물들을 취급하지만 단순히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단순한 응시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과학자에게 있어 가시적 사물들이란 생각될 수는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한 실재의 상징들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유의 정신 활동을 수학자에 대한 언급을 통해 설명한다. 수학자는 "추상화"의 작업, 즉 가시적 사물들로부터 그 사물이 상징하는 것을 이끌어 내는 작업에 종사한다. 수학자는 어떤 삼각형을 볼 때 삼각형의 본질이나 삼각형 그 자체에 관해 사유한다. 그는 가시적 삼각형과 가지적 삼각형 사이를 구분한다. 가시적 기호들을 사용함으로써 과학은 가시계로부터 가지계에로의 다리를 놓는다. 과학은 인간을 사유하게 한다.

  왜냐하면 과학자는 항상 법칙들 혹은 원리들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과학자들이 한 특정한 대상, 즉 한 삼각형이나 하나의 두뇌를 볼 수도 있지만, 그는 이미 이 특정한 삼각형이나 두뇌를 뛰어넘어 보편적 삼각형이나 보편적 두뇌에 대해 사유한다. 과학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에서 "벗어나서" 그 대신 우리의 지능에 의존할 것을 요구한다. 정신은 어떤 종류의 돌이든지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정신은 정삼각형의 세 각은 그 삼각형의 크기에 관계없이 균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유는 개개의 실제적인 대상이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의 집합에 있어서 동일한 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하나의 가시적인 대상으로부터 추상화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어린이, 또는 노인, 또는 흑인이나 백인, 남자나 여자 중 어느 누구를 관찰하든지 간에 우리는 인간의 이데아를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사유를 특징짓는 것은 그것이 가시적 대상들을 기호들로서 취급한다는 점 이외에도 가설들로부터 추론한다는 점에 있다. 플라톤에 있어서 가설이란 좀더 높은 진리에 의존하는 하나의 진리를 의미했다. 플라톤에 의하면 "당신들은 기하나 산수 과목을 배우는 학생들이 어떻게 홀수와 짝수 혹은 다양한 도형들과 세 종류의 각 같은 것들을 전제로 해서 시작하는지를 알 것이다. 그들은 이것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가정으로 채택함으로써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명한 것으로까지 여긴다." 가설들을 사용함으로써 혹은 "이러한 가정들로부터 출발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처음에 계획했던 모든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일사불란하게 나아간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있어 어떤 가설이란 오늘날에 사용되는 의미, 즉 일시적 진리를 뜻하지 않는다. 그는 가설이란 확고한 진리이지만 보다 광범위한 연관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정한 과학이나 수학은 그것들의 주제를 마치 그것들이 독립적인 진리인 양 취급한다. 이 점에 대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만일 우리가 모든 사물을 실제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한다면 모든 사물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유나 가설들로부터의 추론은 우리에게 그러한 사실에 관한 지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몇몇 진리들을 다른 진리들로부터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다. 이 단계에서 정신은 아직 어떠한 진리가 왜 진리인가 하는 의문을 남겨 놓는다.

     지식(知識 : Knowledge)

  정신은 사물들에 대한 좀더 충분한 설명을 요구하는 한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서 우선 정신은 만물의 만물에 대한 관계를 파악해야 하며, 전실재(全實在)에 대한 제일성(齊一性)을 알아야 한다. 완전지(完全知)는 감각적 대상들로부터 완전히 풀려난 정신을 나타낸다. 이 수준에서 정신은 직접적으로 형상(form)들을 취급한다. 형상들은 보편적 인간처럼 현실적 대상들로부터 추상화된 가지적 대상들이다. 정신은 이제 가시적 대상들의 상징적인 성격들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이들 순수 형상들을 취급한다. 또한 여기서 정신은 더 이상 가설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설들은 제한되고 고립된 진리들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정신이 가설들의 제한을 초월하여 모든 형상들의 통일에로 지향할 수 있을 때 이러한 최고 수준의 지식에로의 접근이 가능한다. 정신은 변증술의 기능과 힘을 통해 그것의 가장 높은 목적으로 향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증술은 지식의 모든 부분들의 관계를 동시적으로 파악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지식(知識)은 실재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의미하며 플라톤에 있어 이것은 지식의 제일성(齊一性)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그의 분할된 선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한다. "이제 당신들은 이 네 부분과 상응하는 것으로서 정신의 네 가지 상태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일 높은 것은 순수지(純粹知), 직관지(直觀知)이며, 둘째는 추론지(推論知), 간접지(間接知)이며, 셋째는 신념(信念)과 소신(所信)이며, 넷째는 상상(想像)이다. 당신들은 이 용어들을 비율에 따라 배열할 수 있는데, 이 비율은 그 용어들의 대상이 진리와 실재를 소유하는 정도에 따라 그 각각에 대해 명확성과 확실성의 정도를 배분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그림자나 가시적 대상들과 비교해 볼 때 가장 높은 실재, 또는 확실성 및 불별의 진실을 소유하는 것은 이데아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것이었다. 이제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에 대해 말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이 글을 안내하는 동안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다소간의 차질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철학과 삶]에서 안내하는 서양철학사를 애독하는 분들께 사의를 표하며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통해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명민성과 불멸성을 체득할 수 있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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