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inus, Aurelius 1편 중세 철학 그 입구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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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178회 작성일 10-08-0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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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철학은 한 사람의 기이한 믿음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는 철학사의 한 편을 뒤적이며 그 명민하고 정교한 체계와 서술에 압도되어 천년의 육중한 카테고리를 쫒고 있지만 실제 중세 철학을 조성한 사람은 철학적 언어에 능통한, 혹은 철학적으로 토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식민지의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하층민이었을 뿐 아니라 지적인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권리와 대부분의 욕망과 대부분의 인간적 기쁨을 체념해야 했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신의 살아 있는 이유와 그 목록들을 찾아내기 어려운 불행한 시대의 불행한 삶이었다. 그는 유대의 땅에서 몰이해와 무관심 속에 절망적으로 폐기되었으며 그 자신의 민족에 의해 거의 정상적인 과정으로 처형되었다. 그는 자신의 소명(召命)을 위해 산화하였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은 그의 전통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모독 외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우연한 사건이 인류의 전체 역사를 뒤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가장 명백한 실화(實話)인 동시에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루어본 적이 없는 거대한 세계정신사의 막강한 지식생산기관 및 그 권력의 주체가 되었다. 중세는 철학뿐 아니라 정치, 문화, 경제, 예술, 역사 모두가 그의 사상과 믿음에 대한 주석이며 해석이고 또한 타당한 부언이거나 그 활동이었다. 신학의 이와 같은 독점적 지위는 비정상적 시대에 노출되어 있었던 그의 체험으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그의 체험이란 현실로부터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된 목록(그 목록이 타당한 것이라면)을 다른 누군가 손에 쥐고 있을 것이고 그가 정의롭고 선한 존재라면 그는 반드시 그러한 이유로 삶으로부터 고통과 슬픔과 억압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그 목록을 되돌려줄 것이라는 가상의 심리적 체험이었다. 이 가상의 심리적, 그러나 그에게는 확고부동한 논리적 체험은 심리적인 이유로 많은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지지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당한 이유와 조건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든 저항하는 존재인 동시에 그 자신의 삶이 부당한 이유와 조건에 희생되기를 원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행위로 드러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러한 예수의 논제를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던 사도 바울은 그리스적 지적 구성과 철학적 합리성으로 체계화하여 로마 시민에게 내놓았고, 로마 시민들은 그들이 그렇게 찾고자 한 삶의 의미, 또는 존재의 이유를 기독교를 통하여 점차 획득하게 되었다. 예수와 바울이 내놓은 논제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救援)할 것이며, 그 구원은 이 세상을 창조한 전능의 존재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善)한 삶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의(敎義)는 로마의 기성 교단과 매우 격렬하고 광범위한 논쟁과 투쟁을 통하여 보편적 집단표상으로 전도되었다. 무자비한 순교와 잔혹한 희생이 뒤따르는 가운데 기독교는 신앙과 구원의 명패를 들고 중세의 지대를 가로지르게 되었으며, 그것은 어떤 강인한 심리적 구속을 포함하는 천년의 역사가 되었다. 철학은 기독교의 메워지지 않은 지적 의문이나 난해하고 미묘한 질의에 답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그 기능을 위해 탐구되거나 수행되었다. 이성에 앞선 신앙을 위하여 신앙에 앞선 이성으로서의 철학이 요구되었으며 이것이 중세의 철학의 존립 이유였다.
교부철학(敎父哲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 354~430)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에 대해 성찰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이루어낸 신학자로 그의 철학은 자신의 방탕한 젊은 시기의 삶과 직접 관계함으로써 중세의 지도적인 교부(敎父) 철학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는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젊은 시절 육욕과 타락의 지대(地帶)에서 방황하였으며, 그 때문에 자신의 삶으로 하여금 진정한 지혜와 정신적인 평안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깊은 집착을 항시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354년 아프리카의 누미디아(Numidia) 지방의 타가스테(Tagaste)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이교도이었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15세에 이르러 그는 쇠락한 항구 도시인 카르타고에서 수사학(修辭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기독교의 교리와 행실을 가르치려 했으나 그는 이때에 이미 기독교적 신앙과 도덕 따위를 모두 내던지고 한 유부녀와 동거하며 아들을 두었으며, 호색과 방탕으로 삶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런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10년 동안 지속하는 한편 그런 가운데 그는 지식욕에 불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수사학의 뛰어난 학생이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이러한 일련의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철학에의 접근 방식이 매우 독특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가 되었을 때 그는 철학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내용을 담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의 단어 하나하나가 아우구스티누스의 학문에 대한 정열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지만 그는 어디에서 지적인 확실성을 찾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당면하여 깊은 의문에 잠기게 되었다. 특히 그는 만연되어 있는 도덕적 악의 문제에 대해 어떠한 해답을 얻지 못해 끝내 깊은 회의와 격렬하게 반응하였다.
인간이 경험하는 악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당시의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신(神)이 만물의 창조주이며 선(善)한 존재라고 조금의 의심 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완전한 선으로부터, 혹은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알려진 선한 신(神)으로부터 악이 생겨날 수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릴 때 배운 기독교에서는 그 해답을 구할 수 없었으므로 마니교(Manichaeannism)라는 집단에 의지하게 되었다. 마니교도들은 대부분의 기독교 교리에 동조하면서도 자신들의 지적 우월성을 내세우면서 구약성서의 유일신(唯一神)과 창조주와 인간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교의를 부정하였다. 마니교도들이 제시하는 교리에 따르면, 우주 안에는 두 개의 근본 원리가 있는데 그 하나는 빛 혹은 선(善)의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어둠 혹은 악(惡)의 원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 두 원리는 모두 영원하며, 영구히 서로 투쟁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빛으로 구성된 영혼과 어둠으로 구성된 육체 사이의 투쟁으로 인간의 삶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 이원론(二元論)은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이론은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 어떻게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를 직설적으로 증거할 뿐 아니라 선과 악의 원리적 모순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제 자신의 감각적이고 부적절한 욕구를 어둠이라는 외적인 힘의 탓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이원론이 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 있는 악의 모순을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자연에는 왜 하필 두 개의 투쟁하는 원리가 존재하는가? 그보다 많은 원리가 상존하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만일 이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지적(知的)인 확실성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도덕적인 타락을 외적인 힘에 의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그러한 타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그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무질서한 정욕에 대한 “책임”을 그 자신의 외부의 원인에게 전가하였다 하여도 현재의, 또는 앞으로의 무질서한 정욕의 상태가 조금도 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부조리이었다. 원래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도에게 이끌리게 된 것은 그들이 기독교도들처럼 “이성에 앞선 신앙”을 요구하지 않고도 성실하게 논의할 수 있는 진리를 보여 줄 수 있다는 마니교도의 유치한 긍지 때문이었다. 대개의 사정을 이해하게 된 그는 결국 마니교도와 결별한 후 신에 대한 약간의, 그리고 불확실한 믿음을 지닌 채 “철학자들이 진정 현명하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며 결국 어떤 진리도 인간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회의주의에 끌리게 되었다. 그는 사물들의 유물론적(唯物論的)인 견해를 지지했으며 이 견해에 근거를 두고 비물질적(非物質的) 실체(實體)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회의하게 되었다.
이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의 경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희망을 지니고 아프리카를 떠나 로마를 향하였으며 그 곳에서 384년 수사학 교사로 초빙되어 밀라노로 가게 되었다. 그는 당시 밀라노의 주교(主敎)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에게 특별히 감명을 받은 동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수사학의 기술을 그로부터 얻지는 못하였지만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더 할 수 있게 되었다. 밀라노에 머무는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에 남겨둔 부인을 버려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그가 처음으로 플라톤주의, 특히 플로티누스의 「엔네아데스(Enneades)」를 비롯하여 신플라톤주의를 접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많은 사상에 매료되었는데, 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물질세계와는 완전히 분리된 비물질 세계에 대한 개념과, 신(神)과 비물질적인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해 주는 정신적인 감각을 인간이 소유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더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누스로부터 악은 적극적인 실재가 아니라 단지 결핍이라는 문제, 즉 선(善)의 부재(不在)라는 개념을 얻어 냈다. 무엇보다도 신플라톤주의에 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의주의와 유물론, 그리고 마니교의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플라톤 사상을 통하여 모든 활동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물질적인 실재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실재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는 영혼과 육체의 배후에는 두 개의 원리가 있다는 가정 없이도 세계의 단일성을 논의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플로티누스는 실재의 논거(論據)를 통하여 물질을 최하위 단계로 하는 단일한 등급 체계로서 세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지적인 면에서, 플라톤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제까지 회의하고 고심하던 난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지만, 그의 도덕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그대로 남겨 놓았다. 그가 이제 필요로 하는 것은 그의 지적인 통찰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도덕적인 힘이었으며, 그는 이것을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서 발견하였다. 마침내 신플라톤주의는 그로 하여금 기독교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하였으며, 또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그는 자신이 어떤 미신에 빠져 들고 있다는 느낌이 없이 온건한 정신적인 힘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그의 이 극적인 회심(回心)은 386년에 일어났는데 이 때 그는 수사학의 직업을 버리고, 신(神)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는 철학을 추구하는 데 그의 생을 바치겠노라는 “진실된 동의”를 하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플라톤주의와 기독교를 사실상 동일시하였는데, 이는 그가 신플라톤주의에서 기독교의 철학적인 교리를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에 의하면, “나는 플라톤주의의 가르침이 우리 종교의 교리와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힐 자신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예수보다 더 강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이 순간부터 나는 예수의 권위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그가 말하는 지혜에 이르는 그의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철학은 신앙과 이성의 합일(合一)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지혜란 기독교적 지혜였다. 물론 계시(啓示) 없는 이성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결코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것은 특별한 진실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궁극적인 정신적 운명을 갖지 않은 순수 자연인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간의 구체적인 조건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는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세계 전체도 신앙의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서술하게 되었다.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철학과 신학은 전혀 구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13세기에 아퀴나스에 의해 얼마간 수정되기는 하였지만 이런 해법으로 중세 철학에 대한 지배적인 분위기와 기독교적 스타일을 이루어 놓은 철학자였다.
396년에 그는 고향 타가스테 근처의 항구인 힙포(Hippo)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는 지식인으로 알려지는 동시에 주목받는 지도자가 됨에 따라 점차 신앙의 증인으로서, 이교(異敎)에 대한 교리 비판자로서 또는 변론자로서 활동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의 많은 반대자들 가운데 그와 유명한 논쟁을 벌인 펠라기우스(Pelagius)는, 만인은 올바른 삶을 누릴 수 있는 본래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 원죄설을 부인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의지가 자신의 구원 능력을 스스로 갖추고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신의 은총의 기회 및 의미를 감소시킬 뿐 아니라 따라서 인간의 참된 본성을 오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논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떠한 주제에 관한 어떠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철학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성서에 계시된 진리를 고찰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다시 한번 보여 주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사유에 있어 이러한 종교적인 입장을 우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후에 그에 대해 “플라톤주의자들의 교의에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들의 저서 속에서 신앙과 부합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채택하였으며,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수정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의주의에서 기독교적인 합리성과 강한 설득력을 이해할 수 있었고, 철학과 신학에 있어서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은 바로 신플라톤주의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하였다. 그의 격동적이고 극적인 생애를 대변하듯 그는 430년 반달족(Vandals)이 힙포를 포위하고 있을 때 시편 가운데 ‘속죄의 시’를 암송하면서 75세의 생애를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무리
새해 달력이 한쪽 벽에 걸렸다. 유리창을 통하여 밝은 빛이 일요일 아침을 뚫고 들어와 앉아 있다. 독감에 걸려 근육통을 앓는 며칠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워드작업을 실행시켰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교리를 배우며 성장한 나에게 그는 모종의 압력이었다. 그의 교부철학은 그 내용을 거부하면 할수록 “너의 지혜로는 신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지하곤 하였다. 인간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 신의 지혜가 시작된다는 말은 내가 앎의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우리 자신의 한계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의 한계를 잊기 위하여 윈앰프를 실행시켜 Eagles의 Hotel California를 듣는다. 내가 Hotel California를 처음 들었던 것은 25년 전 여름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건축사로 처음 부임한 젊은 구리빛 피부의 소장은 내게 당시 처음 세상에 나온 금성사의 검고 투박한 카세트를 틀어 놓고 이것이 호텔 캘리포니아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오랫동안 호텔 캘리포니아를 밤낮으로 들었다. 지금도 그 때의 잔흔이 남아서인지 호텔 캘리포니아를 듣고 있노라면 묘한 동경에 잠기곤 한다. Eagles의 Hotel California는 나에게 우리에게 일정한 한계란 없는 것이라는 청춘시절의 혈류를 느끼게 하는 몇 안 되는 음악 가운데 하나이다.
나에게 영향을 행사한 것은 무수히 많다. 알게 모르게 작용한 그러한 영향으로부터 나는 자유롭지 못하며 그러한 작용의 많은 매개변수들이 알게 모르게 나를 만들어온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부인하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자신의 번민과 방황으로부터 항상 그 자신의 삶을 올바른 지대에 올려놓고 싶다는 생각을 지녔었다. 그가 지켜보았던 것, 그리고 그가 체험하였던 것들이 끝내 그의 철학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을 그는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인과 그 모든 것의 결과들이 모든 사건이나 물질보다 우위에 있는, 따라서 모든 현상에 선행하는 정신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가 그러한 결과를 수용한 것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고 오직 완전한 존재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불성실한 영혼이 구원될 수 없다고 깨닫게 된 작용이 있었다. 우리는 충분히 잘못이나 실수를 거듭 도안할 수 있는 존재이나 그 잘못과 실수를 용서할 존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나 존재를 기안하고 용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그의 논제는 지식의 논리적 타당성을 떠나 인성(人性)의 정연(挺然)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를 한 편의 철학사로 접하는 이들은 그의 삶으로 붙잡으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았으면 싶다. 다음 편에는 그의 철학적 개념과 내용을 보다 용이한 서체로 [철학과 삶] 서양철학사에 남기고자 한다. 새해 2004년에 우리가 뜻하는 바가 우리의 한계 너머에 있든 우리 한계 내에 있건 우리의 권역에 보다 가지런한 줄기를 내렸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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