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나무 침대
ㆍ제작년도 : 1996년
ㆍ제작국가 : 한국
ㆍ감독 : 강제규
ㆍ출연 : 한석규, 심혜진, 진희경, 신현준
한때, 우리나라에서 전생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 적이 있었다. 전생요법, 전생에 관한 영화, 전생소설 등이 유행했으며, 모두들 자신이 전생에 무엇이었는지 매우 궁금해 했다. 사실 이런 전생과 윤회에 대한 생각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그리 역사가 짧지 않다.
특히 우리 민족의 경우는 전생과 윤회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기정사실화하는 신념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현재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우리는 흔히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고생을 하나' 라는 얘기를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현재의 고통은 바로 전생의 업 때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생에 대한 열풍은 우리 민족의 기저에 깔린 생각이 갑작스레 무의식층을 뚫고 튀어나온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 전생의 인연이 현재에 반복?
그런 의미에서 강제규감독의 [은행나무 침대]는 전생의 인연과 악연이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모든 존재는 무수한 삶을 반복한다고 가르친다. 산스크리트어로 윤회는 '삼사라'라고 하며,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모든 존재는 끝없이 삶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또한 '삼사라'는 '방황'이라는 뜻인데, 인간이 반복적으로 윤회의 사슬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업(카르마)때문이라는 것이다.
▒ 전생의 기억이 갑자기 떠올라…
이러한 자극을 가지고 잠시 전생을 다룬 영화, 은행나무 침대를 살펴보자. [은행나무 침대]에서 현생의 수현(한석규 분)은 갑작스레 떠오르기 시작한 전생의 기억과 갑자기 들이닥친 전생의 연인 미단 공주(진희경 분)로 인해 현생의 삶에 혼란이 온다. 전생에 궁정악사였던 자신과 미단공주와 사랑으로 이웃나라의 황 장군(신현준 분)의 공격을 받는다. 그리하여 미단 공주와 궁정악사는 다음 생에는 은행나무로 환생하여 천년 동안 서로 마주보며 지낸다. 그러나 미단 공주를 잊지 못하던 황 장군이 독수리로 환생해서 둘의 사랑을 저주한다. 이제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와 수현은 우연히 미단공주의 혼이 깃든 은행나무 침대를 구해서 집으로 가져오고… 이번에도 황 장군은 미단 공주를 쫒아와서 둘의 사랑을 방해하고 수현의 목숨까지 노린다. 천신만고 끝에 수현은 황 장군에게 벗어나 다른 사람의 몸을 빌린 미단 공주와 잠깐의 애절한 만남을 갖는데…
이렇게 [은행나무 침대]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만일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수현은 어쩌면 계속 미단 공주를 그리워하며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할 수도 있으며, 그녀와 만날 날만을 고대하며 죽기만을 기다릴 수도 있다.
▒ 윤회와 전생에 집착하는 이유
그렇다면, 윤회와 전생에 대한 사상이 여러 문화들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생이 단 한번으로 끝난다는 것에 대한 인류의 공통된 아쉬움과 허망함 때문은 아닐까? 또한 인간은 그들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역사 이래로 어떤 인물도 죽음을 초월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차선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윤회와 전생을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육체는 소멸하더라도 영혼만은 영원불멸할 수 있기를 바라는…
즉 이런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염원이 윤회와 전생이라는 개념으로 모아졌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만일 이렇게만 된다면, 현생의 업을 쌓아 힘든 육신을 걸치고라도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염원은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 전생으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
그러나 한편 전생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잘못하면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도 있다. 즉 고통과 어려움의 원인을 현재에서 찾지 않고 과거에서 찾으려하는 모습들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일단은 고통스런 문제 앞에서 자신이 책임질 일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현재의 문제는 무시되어 이전 보다 사태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또한 전생에 의지하여 문제를 회피하려는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향수에 만 젖는 부적응의 경향을 보이는 수도 많다.
또한 어떤 이들은 "어쩌면 전생에 나는 역사 속의 중요한 인물이거나 귀족, 왕족이었을거야!" 라는 기대감을 전생에서 찾으려 한다. 운명의 장난에 의해 현재와 같은 어려운 처지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뭔가 옛날에는 대단한 사람이었을 거라는 기대감 말이다. 또한 현재 자신이 겪는 고통은 운명의 장난일뿐, 자신의 능력 탓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 전생의 기억을 더듬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들은 현재의 모든 문제를 과거, 그것도 존재하는지 않는지도 알 수 없는 전생에서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
▒ 현재의 문제는 그리 오래지 않은 자신의 모습 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꼭 전생으로까지 끌고갈 필요는 없다. 어린시절 부모와의 관계, 반복되는 부적응 상태, 미숙한 대인관계, 지나친 의식편향 등 가만히 앉아 자신의 인생을 더듬어 보는 것만으로도 해답을 구할 수 있다. 이런 손쉬운 방법을 두고도 많은 이들은 전생을 찾아 한참을 돌아다닌다. 또 이 방법이 자신의 문제를 찾아줄 수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더듬어 보는 모든 노력을 다해본 뒤에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것은 전생요법으로 치유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 하루하루가 유전이며, 한 순간에도 윤회는 있다.
윤회는 하루하루의 삶이 아니라, 전 인생의 과정이라는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인생은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 중년기, 노년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때 각 인생의 단계에서 해야 할 과제를 충실히 수행했다면, 우리는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의 각 단계에서 적절하게 성숙하지 못했을 때, 신체의 성장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만 정신적 성장은 지체되어 이전 단계에서 맴돌게 된다. 마치 몸은 이미 성인이지만 심리적인 성숙 상태는 청소년기에 머물러 있어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하면서 지내거나 항상 부모가 해주리라'는 의존성을 가진 청소년처럼 말이다. 육체를 벗지 못하고 윤회를 반복하듯이, 이런 사람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자신의 생활 태도를 고치지 못하고 청소년기에 고착된 생활만을 반복한다.
마치 과거의 업이나 잘못으로 인해 천국이나 극락이라는 다음 단계로 상승하지 못하고 다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야 하는 반복된 사람과 흡사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하루하루가 유전이며 한 순간에도 윤회는 있다"고 얘기했는지도 모른다.
글/ 김상준(정신과 의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