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고 3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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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151회 작성일 10-11-2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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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내가 겪은 수험생활의 고통은 끔찍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강도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데 자신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악몽과도 같았다 .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날 해치워야 하는 공부의 양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이 막히곤 했다. 밤이 되어 자려고 누우면 잠이 아니라 죄책감이 먼저 달려들었다. `내가 과연 이 시간에 잠을 자도 좋은 걸까? 친구들은 지금도 공부에 열심일 텐데'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나는 스스로를 새장에 갇힌 새라고 생각했다. 새는 자기 운명이 다하는 날에야 새장을 벗어날 수 있다. 나에게 운명의 관문은 대학입시였다. 대학에 합격하기 전에는 아무리 버둥거려도 새장에서 벗어나올 수 없었다. 나를 더욱 미치게 하는 것은 과연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나의 고3시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온통 칙칙한 회색빛깔뿐이다. 그래도 싱그런 열아홉 시절이었으니 초록빛 추억이 왜 없으랴만 순간적으로 그 잿빛에 묻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질문에 미처 대답을 못하면 선생님은 "야, 그 교복 벗고 가서 식모나 되라우!"하고 소리치곤 했다. 그때마다 어린 자존심은 풍비박산이 났고. 대학에 합격하는 길만이 우리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애써 스스로를 달래보기도 했다.그러나 매달 복도에 나붙는 모의고사 성적표와 부모님의 걱정어린 눈길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길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어둑한 시간 학교 옥상에 올라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아마 정신과 의사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집단 히스테리'라고 진단했을 것이다. 그 시절을 되돌아볼 때마다 또하나 떠오르는 것은 점심시간에 잠깐 쪼이던 햇살이다. 그 따스한 햇볕 속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어느날 그 감정에 짓눌려 우리 곁을 떠난 친구의 정신병원 입원 소식은 또 얼마나 우리를 우울하게 했던지.
새벽에 학교로 향하면서도 잡지에 나온 일류대 합격자의 `나는 이렇게 공부했다'에서 본 대로 손바닥에 영어단어를 써서 외우고 가던 일, 어두운 새벽빛에 글자는 제대로 보이지 않고 "그 사람 손바닥은 야광이었나 봐."하고 투덜거리던 기억도 이제는 새롭다. 잘 외워지지도 않는 잡다한 것들과 씨름하면서 학문에 대해 느꼈던 회의, 대체 우리는 어쩌자고 대한민국에 태어나 이런 기막힌 시절을 보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절망하던 날들, 그 무렵 우리는 삶 자체에 대해서까지 무수한 회의와 의문을 품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수험생이었던 나의 모습이 이처럼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내 아이가 그 길에 접어들고 말았다. 어느날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는 순간, 목구멍에 차오르던 두려움의 감정, 정신과의사인 내가 이럴진대 다른 학부모들의 심정은 오죽하랴 싶기도 했다. 더욱이 지금 대학 입시를 앞둔 고3수험생의 마음이야 무슨 말로 표현이 될까.
입시제도가 바뀌어 다음해부터는 수능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등학교 생활이 좀더 쉬워진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그 시기에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이것은 단지 내 인생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 절대 내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하는 생각이었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상 나는 고민하고 갈등하는 많은 수험생과 그 학부모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곤 한다. 앞으로 이 난을 통해 그러한 나의 경험을 여러 학생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으면 한다.
그 무렵 나는 스스로를 새장에 갇힌 새라고 생각했다. 새는 자기 운명이 다하는 날에야 새장을 벗어날 수 있다. 나에게 운명의 관문은 대학입시였다. 대학에 합격하기 전에는 아무리 버둥거려도 새장에서 벗어나올 수 없었다. 나를 더욱 미치게 하는 것은 과연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나의 고3시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온통 칙칙한 회색빛깔뿐이다. 그래도 싱그런 열아홉 시절이었으니 초록빛 추억이 왜 없으랴만 순간적으로 그 잿빛에 묻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질문에 미처 대답을 못하면 선생님은 "야, 그 교복 벗고 가서 식모나 되라우!"하고 소리치곤 했다. 그때마다 어린 자존심은 풍비박산이 났고. 대학에 합격하는 길만이 우리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애써 스스로를 달래보기도 했다.그러나 매달 복도에 나붙는 모의고사 성적표와 부모님의 걱정어린 눈길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길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어둑한 시간 학교 옥상에 올라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아마 정신과 의사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집단 히스테리'라고 진단했을 것이다. 그 시절을 되돌아볼 때마다 또하나 떠오르는 것은 점심시간에 잠깐 쪼이던 햇살이다. 그 따스한 햇볕 속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어느날 그 감정에 짓눌려 우리 곁을 떠난 친구의 정신병원 입원 소식은 또 얼마나 우리를 우울하게 했던지.
새벽에 학교로 향하면서도 잡지에 나온 일류대 합격자의 `나는 이렇게 공부했다'에서 본 대로 손바닥에 영어단어를 써서 외우고 가던 일, 어두운 새벽빛에 글자는 제대로 보이지 않고 "그 사람 손바닥은 야광이었나 봐."하고 투덜거리던 기억도 이제는 새롭다. 잘 외워지지도 않는 잡다한 것들과 씨름하면서 학문에 대해 느꼈던 회의, 대체 우리는 어쩌자고 대한민국에 태어나 이런 기막힌 시절을 보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절망하던 날들, 그 무렵 우리는 삶 자체에 대해서까지 무수한 회의와 의문을 품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수험생이었던 나의 모습이 이처럼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내 아이가 그 길에 접어들고 말았다. 어느날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는 순간, 목구멍에 차오르던 두려움의 감정, 정신과의사인 내가 이럴진대 다른 학부모들의 심정은 오죽하랴 싶기도 했다. 더욱이 지금 대학 입시를 앞둔 고3수험생의 마음이야 무슨 말로 표현이 될까.
입시제도가 바뀌어 다음해부터는 수능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등학교 생활이 좀더 쉬워진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그 시기에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이것은 단지 내 인생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 절대 내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하는 생각이었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상 나는 고민하고 갈등하는 많은 수험생과 그 학부모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곤 한다. 앞으로 이 난을 통해 그러한 나의 경험을 여러 학생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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