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에 왕은 오로지 가량나가리 태자만을 사랑하여 그 뜻을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곧 명령하여 세철궁전[三時殿]을 지어 겨울에는 따뜻한 궁전에서 살고, 봄과 가을에는 중간 궁전에서 살며, 여름에는 시원한 궁전에서 살게 하고, 풍류를 잡히어 즐기게 하였다.
태자는 점점 자라며 총명과 변재가 뛰어나고, 온갖 세속의 경전을 배워 18부(部) 경을 모두 외워 가지고 통달하였고 그 뜻도 잘 알았다. 뒤에 그는 나가 놀기를 청하였다. 왕은 곧 허락하고, 길을 다스리라 명령하여 온갖 더러운 것을 치우게 하였다.
그는 금․은으로 장식한 흰 코끼리를 탔고, 1천 수레와 1만 말이 앞뒤로 호위하였다. 큰 거리나 좁은 골목에는 모든 사람들이 길 양쪽을 끼고 늘어섰고, 다락 위에는 구경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말하였다.
‘태자님은 마치 범천과 같아서 그 위엄스런 상과 아름다운 얼굴은 인간에서 보기 드물다.’ 그 때 태자는 여러 거지들이 몸은 여위고 옷은 해어졌으며, 왼손에는 깨진 그릇을 들고 오른손에는 부러진 지팡이를 짚고,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비굴한 말로 구걸하는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왜 저렇게 하는가?’ 신하들은 대답하였다. ‘저런 사람들은 부모가 없이 외롭고 빈궁하되 의지할 곳이 없으며, 병들고 미치광이로서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푼 돈이 없으니 우선 먹고 입을 것이 절박하여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태자는 그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마음으로 매우 슬퍼하였다. 태자는 다시 얼마를 가다가 백정들이 짐승을 죽여 조금씩 베어 저울에 달아 파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하는가?’
그들은 대답하였다.
‘우리가 꼭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부 때부터 이 짓을 업으로 삼아 왔습니다. 만일 이 짓을 버리면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태자는 그 말을 듣고 길이 탄식하고 떠났다. 또 얼마를 가다가 들에 이르러 여러 농부들을 보았다. 그들이 땅을 갈아 벌레가 나오면 개구리가 그것을 집어먹고, 또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며, 다음에는 공작이 날아와 뱀을 쪼아먹는 것을 보았다. 태자는 그들에게 물었다.
‘그것은 무엇하는 일인가?’
농부들은 대답하였다.
‘이것은 우리 직업입니다. 이 밭에 종자를 뿌려야 뒷날 곡식을 거두어 그것으로 먹고 살며 또 나라에 바칩니다.’
태자는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사람들은 의식을 위하여 중생을 죽이고, 몸과 힘을 부리면서 저처럼 고생하는 것이구나.’
다시 얼마를 가다가 태자는 여러 사냥꾼을 만났다. 그들은 새들에게 다가가 활을 당겨 쏘았으며, 또는 그물을 땅에 쳐 두었는데, 온갖 새와 짐승들은 그 안에 떨어지면 그물에 놀라 울부짖지마는,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태자는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무엇하는가?’
그들은 모두 대답하였다.
‘이 새와 짐승들을 잡아 그것으로 살아갑니다.’
태자는 그 말을 듣고 깊이 한숨짓고 떠났다.
태자는 강가에 이르러 고기잡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물을 펴서 고기를 잡았는데, 고기는 땅에 널려 뛰기도 하고, 몸을 폈다 움츠렸다 하면서 죽는 놈이 수없이 많았다. 태자는 그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모두 대답하였다.
‘우리는 이 고기 덕으로 먹고 입고 살아갑니다.’ 태자는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며 길이 탄식하였다. ‘저들은 의식을 위하여 저처럼 중생을 죽여 몸을 이바지하면서 그 재앙과 죄가 날로 불어가는데, 뒷날의 과보는 어떠하겠는가?’ 그리고는 곧 궁중으로 돌아갔다. 아무 것도 즐겁지 않고 근심에 잠겼다가 부왕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주소서.’
왕은 대답하였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거절하지 않으리라.’
태자는 아뢰었다. ‘저는 전날 밖에 나가 놀다가 저 중생들이 의식을 위하여 서로 속이고 죽이면서 짓는 죄가 날로 불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저들을 못내 가엾이 여겨 구제하려 합니다. 원컨대 부왕께서는 제가 부왕의 창고 물건을 마음대로 보시하여 저 인민들의 빈궁을 구제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소서.’
왕은 태자를 더욱 사랑하여 그 말을 듣고 거절할 수 없어 곧 좋다고 승낙하였다. 그래서 태자는 영을 내려 모든 인민들에게 알렸다. ‘가량나가리 태자는 곤궁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보시하여 일체를 대어 줄 것이니, 모두 와서 가지되, 금․은의 보물과 의복․음식과 그 밖의 필요한 것을 가지고자 하는 대로 모두 베풀어 주리라.’
그는 곧 왕의 창고를 열어 온갖 보물을 끌어내어 여러 성문과 시장에 두고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다 주었다.
그 때 여러 나라의 사문과 바라문과 빈궁하고 고독한 늙은이와 쇠약하고 병난 이들이, 강하고 약한 이가 서로 의지하며 차례로 모여 왔다. 옷이 필요하다면 옷을 주고 밥이 필요하다면 밥을 주며 금․은의 보물을 마음대로 주었다.
그러자 인민들은 서로 말을 전해 온 염부제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으므로 왕의 보배 창고는 3분의 2가 줄게 되었다.
그 때 창고지기는 왕에게 들어가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5백의 작은 나라를 거느리고 계십니다. 그 나라 사신들은 수시로 오고 가는데, 그들이 돌아갈 때에는 반드시 보물이 필요하거늘, 이제 태자님이 널리 보시함으로써 대왕님 창고 안 물건이 3분의 2가 줄게 되었습니다.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후회 없도록 하소서.’ 왕은 그 말을 듣고 창고지기에게 말하였다.
‘내 태자는 보시하기를 좋아하되, 그 결심이 굳고 특별하여 도무지 돌릴 수가 없다. 만일 그것을 금하고 막아 혹 그 뜻을 어기면, 그는 몹시 근심하고 괴로워할 것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아직 그 뜻대로 맡겨 두어 어김이 없게 하라.’
이리하여 며칠 동안 태자는 보시하였다. 그래서 창고의 남은 물건에서 3분의 2가 또 줄게 되었다. 창고지기는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먼젓번의 남은 물건을 날마다 보시함으로써 3분의 2가 이미 줄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 사신들에게 줄 것까지 다 써서는 안 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뒷날 허물이 없게 하소서.’ 왕은 생각하다가 창고지기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아들을 다른 아들보다 특별히 사랑한다. 그러므로 차마 드러내놓고 그 뜻을 거스릴 수는 없다. 만일 그가 와서 보물을 요구하거든 잠깐 딴 곳으로 몸을 피하고, 만일 급히 구하거든 우선 조금 주되, 혹 얻기도 하고 혹은 얻지 못하게 하여 날짜를 끌도록 하라.’ 그 때 창고지기가 왕의 분부를 받은 뒤로는, 태자가 와서 보물을 요구할 때에 핑계를 대어 딴 곳을 다녀 왔다. 그래서 태자는 어떤 때는 얻고 어떤 때는 얻지 못하여 번번이 필요한 것을 얻을 수가 없었다. 태자는 짐작하고 생각하였다. ‘지금 저 창고지기에게 어떤 힘이 있기에 감히 나를 어기어 명령을 받들지 않겠는가. 반드시 왕의 뜻을 받들어 그렇게 하는 것일 것이다. 또 나는 사람의 자식된 도리로 부모님 창고 물건을 다 말려 텅 비게 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창고에는 남은 물건이 얼마 안 된다. 내가 어떻게 하면 재보를 얻어 일체 중생에게 보시하여 모자람이 없게 할 것인가.’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 어떤 사업을 하여야 많은 재물을 얻어 마음대로 쓸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곤란을 두려워 말고 멀리 나가 장사하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전답을 개간하여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고, 다섯 가지 곡식을 많이 심으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문은 말하였다.
‘여섯 가지 가축을 많이 길러 항상 보호하고, 때를 맞춰 번식시키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큰 바다에 들어가 용왕궁에 이르러 여의주를 구하십시오. 그 일만 성취하면 가장 많은 재물을 얻을 것입니다.’ 그 때 태자는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였다. ‘장사와 농사와 가축을 기르는 것은 내게 적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얻는 이익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큰 바다로 들어가 용왕궁에 가는 것이 내 마음에 든다. 나는 힘써 이 일을 성취하리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