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자 4인의 파란만장 '창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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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ale 댓글 0건 조회 2,380회 작성일 11-05-12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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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를 쓰자니 처자식 얼굴이 어른거린다. 돈벌이가 제대로 될까?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결론은 이렇다. ‘에이, 더 다니자….’ 남자들에게 내 사업을 시작한다는 건 대단한 로망이자 모험이다. 모든 걸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엔 30대의 젊은 나이에 자기 사업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다.그들은 어떻게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고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한국에 없던 ‘쇼’를 하다
카페 겸 공연장 <루프> 김형남 대표 헝클어진 머리칼, 골반에 걸친 바지, 팔에 새긴 문신…. 인디 밴드 멤버 같은 모습의 그가 한 첫 번째 모험은 대학에서 전공을 바꾼 것이었다. 일어일문학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어일문학과에 들어갔지만 내 길이 아니란 생각에 연극영화과로 전과했다. 그리고 일찌감치 대학로 극단으로 나갔다. 현장에서 부딪히며 돈도 벌고, 연출도 하자생각한 거다. 왜인지 그는 어릴 때부터 밥벌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형남표 작품’은 파격적이었다. ‘포엠 퍼포먼스Poem Performance’라 이름 붙인 공연에서는 시 낭송을 하며 퍼포먼스를 했다.시구는 내러티브나 음악으로 바꾸었다. 연극판에 오래 있진 못했다. “밥을 먹거나 버스를 타도 돈이 들잖아요. 사람을 쓰려고 해도 돈이 들고요.그런데 항상 가난했어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눈치를 보며 벽에 포스터를 붙이고, 돈 없이 술을 먹는 것도 싫었어요.” 대학로를 떠난 그는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사진과 파인 아트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밟으며 8년을 살았다. IMF 때 떠난 유학은 ‘생애 최대의 모험’이었다. “용돈이라도 벌기 위해 일을 많이 했어요. 그중 스텔라 매카트니의 쇼룸을 론칭하는 작업도 있었죠. 런던은 인구의 70%가 유동 인구예요.학생도 많고 백수, 패션 디자이너도 많아요. 그들 대부분은 밥벌이에 대해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해 확실한 삶의 철학이 있었어요.”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다양한 일을 했다. 패션 사진 작업, 서울시 해외 마케팅, 광화문 가든 플레이스 옥상 개조 프로젝트, 갤러리 전시 큐레이팅…. 하지만 ‘이게 내 일이다’ 하는 확신이드는 직업은 없었다. “기획 단계부터 직접 해야재미가 있는데 대행사 수주를 받아 잠깐씩 참여하는 일이 많아서인지 재미가 없더라고요.”
올해 서른여덟의 그는, 마침내 진짜 모험을 하기로 결정한다. 자본금은 약 1억 원. 이태원에 있는 가정집을 임대해 카페로 바꾸었다. 옥상에서면 남산 일대가 시원스레 펼쳐지는 곳이었다. ‘루프Ruf’라는 간판을 달고 2층에는 작은 공연장도 만들었다. 노란 끈이 그대로 묶여 있는 종이 박스를 툭툭 쌓아 의자로 썼다. 어깨를 붙이고 앉으면 약 40명이 앉을 수 있다. 그곳에서 공연을 하는 배우들의 대부분은 일대에 사는 외국인들이다. “노래와 악기 연주에 능한 친구들이 많아요. 대부분 무대에 서는 걸 부담스러워하지도 않지요. 그들과 재미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어요.” 입장료 1만 원을 받는 공연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저녁 8시에 펼쳐지는데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이 꽤 많다. 특히 캐나다에서 온 대니Danny가 팬티만 입고 등장해 약 30분간 이 닦고 옷 입으며 부산하게 아침을 보내는 내용의 공연 <굿모닝>이 인기다. “이게 무슨 공연이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재미있다”고 하는 이도 많다. 이곳에서 그는 사장 겸 연출가 겸 요리사다.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후닥닥 내려가 요리를 한다. 수입의 다각화를 위해 평일 해 질 녘에는 요가 강좌도 한다. 이름하여 선셋 요가! 요가를 하는 곳이 전망 좋은 옥상이라 은근 인기가 높다. 그의 꿈은 이 독특한 컨셉트의 카페가 요코하마와 베를린까지 진출하는 것. 6개월 전, 한국에 없던‘쇼’를 시작한 그가 말한다. “<드래곤 볼>의 손오공처럼 살고 싶어요. 신나고, 재미있게!”
가난한 유학생, ‘슈퍼스타 K’가 되다
사진가 김명중 클라우디아 시퍼, 스파이스 걸스, 폴 매카트니, 고故 마이클 잭슨…. 서른아홉, 프리랜스 사진가로 일하는 김명중의 고객 리스트다. 물론 처음부터 고객 명단이 이렇게 화려했던 건 아니다. 런던에 있는 그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을 배운 적도 없는 가난한 유학생이 어떻게 사진가가 되었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필름과 비디오 공부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IMF가 터져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가세가 기울어 도움을 받을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으로 그냥 돌아가기는 억울했다. 일단 살아남자 결심하고 온갖 일을 하며 버텼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법원 담당견습 사진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고 응시해 합격했다. 영화 공부를 준비하며 사진에 관심이 생겨 장비도 구입하고, 한국에서 사진 관련 책을 사다가 독학을 하던 참에 얻은 기회였다.
그 후 게티 이미지로 옮겨 수석 사진기자까지 올랐다. 인정을 받은 이유가뭘까?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하지 않더냐. 이곳에서는 ‘남의 잔디가 더푸르게 보인다’고 하는데 다른 사진가가 찍은 작품이 내 작품보다 좋아 보였다. 나도 그런 사진을 찍고 싶어 패션, 아트, 건축 잡지를 많이 보며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장비는 어떤 걸 썼을까’ 생각했다. 이미 성공한 스타 사진가들의 작품을 계속해서 보니 자연스럽게 안목이 생겼고 사진도 달라졌다. 절박함과 욕심이 모험심을 키우는 것 같다.
세계적 사진 에이전시에서 수석을 맡았으니 연봉도 꽤 높았겠다. 약 6만파운드였다. 보너스를 합하면 7만 파운드 정도.
우리나라 돈으로 1억 원이 넘는데 그런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왜 프리랜서를 선언했나? 더 이상 도전할 것이 없으니 도태되는 것 같았다. 아카데미 영화제,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많은 셀러브러티를 몇 년간 찍었더니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다.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 상태를 묵인하는 건 회사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실패의 두려움에 몸을 사리기보다 성공했을 때의 희열을 더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달라질 내 인생도 그려본다. 긍정적인 생각은 말투와 태도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긍정의 기운이 내 몸을 통해 그대로 발산되는 거다. 기회는 밝은 사람에게 더 많이 찾아온다.
스파이스 걸스, 폴 매카트니, 마이클 잭슨과는 어떻게 일하게 된 건가? 2007년, 스파이스 걸스가 재결성을 하고 기념투어를 계획하면서 투어 전담 사진가를 구했다. 영국 친구 중 한 명이 나를 추천해줬는데 워낙 세계적인 그룹이라 별 기대를 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뽑혔다고 연락이 왔다. 그걸 계기로 폴 매카트니, 마이클 잭슨과도 작업을 했다. 마지막 월드 투어를 준비 중인 마이클 잭슨을 런던에서 만났는데 키가 생각보다 커 놀랐다. 180cm인 데다 부츠를 신어 훨씬 커 보였다.악수를 하며 “갓 블레스 유”, “갓 블레스 유” 하고 말했는데 손이 무척 따뜻했다.
세계적 셀러브러티와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뭔가? 일단 사진을 잘 찍어야 한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실력이 좋지 않으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내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이 그 사람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 특유의 공손함과 겸손함도 큰 장점이 된다.
고졸이라는 학력이 모험에 걸림돌이 된 적은 없었나? 없었다. 지금 어떤 작품을 하느냐가 중요할뿐 과거에 어떤 공부를 했는지는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사진을 제대로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나? 그러지 않아도 새로 학교에 들어가 사진을 공부하고있다. 계속 일을 하다 보니 궁금한 것들이 생겨결심하게 됐다. 폴 매카트니와 월드 투어도 다니고 있어 이래저래 바쁘게 살고 있다.
꿈꾸는 또 다른 모험이 있다면? 로스앤젤레스에서 함께 일을 해보자는 제안이 많이 들어와 거주지를 아예 그쪽으로 옮길까 생각 중이다.도전하고 모험하는 것도 습관처럼 몸에 배어 한두 번 해버릇하면 계속하게 되는 것 같다.
대기업 맨, 디자인 맨이 되다
디자인 스튜디오 <비스타디아> 강명석 대표 직장 생활을 하는 샐러리맨이라면 경비행기로 세계 일주를하고, 몸짱이 되기 위해 무한 도전을 시작하는 이보다 여기 소개하는 강명석 대표가 더 부러울 수 있겠다.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 수차례 하면서도 용기를 내기가 어려운데 올해 서른셋의 강 대표는 딱 한 달 고민하고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직장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LG생명과학. 담당 업무는 해외 마케팅이었다. “집이 있는 암사동에서 회사가 있는 여의도까지 약 1시간이 걸렸어요. 셔틀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30분간 눈을 붙였다가 뜨면 막 해가 떠올랐습니다. 감상적인 것 같긴 한데, 무심히 밖을 보다가 문득 삶이 무미건조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출근했다가 퇴근하고,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가방을 들고 버스를 타는…. 뭔가 역동적인 직장 생활을 꿈꿨는데 어느 순간 재미없는 일상을 사는 거죠.그때부터 ‘뭘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부모는 잘 다니던 대기업을 왜 그만두냐고 말렸고, 회사에서는 불만이 있으면 조정해주겠다고 했다. 2005년 12월 공채로 입사했는데 LG 그룹 전체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서 3등을 차지할 만큼 성적이 좋았으니 회사에서도 기대가 컸다.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손에 쥔 걸 놓아야 다른 걸 쥘수 있다고 생각하니 의외로 정리가 쉬웠다. “주저하다가 모험을 하지 못하는 이가 많은데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 결행이 쉬워요. 마음의 소리는 본인이 가장 잘 알잖아요. 명함 내밀기에 좋은 빛 좋은개살구로 남을 것이냐, 진정 행복한 일을 할 것이냐 곰곰 생각하면 답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직 후 그는 1년간 디자인 여행을 떠났다. “뉴욕, LA, 샌프란시스코, 런던, 파리, 로마, 홍콩 등을 여행하며 디자인 숍과 스튜디오, 갤러리를 집중적으로 봤어요. 대학 시절부터 <월간 디자인>을 보고, 드로잉도 하고, 디자인 제품이나 서적도 열심히 샀거든요. 뉴욕에서는 작지만 강한디자인 스튜디오도 여럿 방문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2명이면 충분하다고 하더라고요.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돌아온 그는 바로 모험을 시작했다. 잠깐 네이버에서 일할 때 알게 된 편집 디자이너와 500만 원씩 투자, <비스타디아>란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렸다. ‘기업의 웹진이나 스마트폰 사이트를 디자인적이고 예술적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 서비스의 핵심! ‘디자인 감感 좋다’는 인정을 받으면서 뮤지컬 <궁>, 뮤지컬 <42번가>, 로만손, 아모레퍼시픽 샴푸 브랜드 ‘려’,제시 뉴욕 등의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슈에무라와 키엘, 앱솔루트의 제안을 받아 각 브랜드의DNA를 보여주는 디자인 작품도 만들었다. 가로수길의 모든 문화가 콘텐츠가 되는 <가로수길>의 웹진도 비스타디아의 작품이다. “<가로수길>을 직접 만든 분들이 따로 있어요. 두 분이 사비를 털어 만든 것인데 그분들과 함께 어울리다가 자연스럽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가로수길>의 컨텐츠는 재미있다. 지난해 소개한 ‘가로수길 배달 음식 특집’은 50여 가지의 배달 음식을 직접 시켜 먹고 평점을 매겨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스티브 잡스처럼 세계적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재야의 실력파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는 온라인 잡지 <비플VEOPLE>도 준비 중이다. “유력매체에 나올 정도로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진짜 실력이 뛰어난 분들이 많거든요. 이들을 여러작품과 함께 릴레이 형식으로 소개하는 것이 컨셉트입니다!” 이제 그는 사장으로 산다는 것의고충과 기쁨을 하루하루 절감하며 살고 있다.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예요?” “하하, 클라이언 트에게 돈 들어오는 날이오!”
‘국가 대표’가 되는 그날까지 Go, Go~
<국대 떡볶이> 대표 김상현 노점상에서 시작해 전국에 18개 매장을 오픈한 국대 떡볶이 대표 김상현은 겨우 서른한 살이다. 운이 좋았거나 돈이 많았을 거란 생각은 마시길!
떡볶이 사업을 하기 전 의류 사업을 하다 실패했다고 들었다. 흰 셔츠나무채색 원피스 등 가장 기본이 되는 클래식 아이템을 직접 제작해 팔았다. 가격이 싼 건 품질이 떨어지고 명품은 너무 비싸니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적정한 가격에 팔면 잘될 것 같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지식도 경험도 없었으니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3억 원 정도를 까먹었더라. 사금융권에서 돈을 빌려 마지막 직원 월급을 줬다. 빚 8000만 원이 생겼다. 자본금이 꽤 많았다. 어떻게 충당한 건가? 캐나다 유학 시절 장사를 해 번돈, 부모님이 보태주신 돈 등 수중에 있는 모든 자금을 그러모았다. 스물세 살부터 스물일곱 살까지 캐나다 토론토에 있었는데 도중에 학교를 그만두고 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군고구마를 팔고, 1년 넘게 이삿짐센터에서 일했다.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았다. ‘약간’ 성공한 사업도 있었다. ‘다이얼 어 보틀Dial a Bottle’이란 회사가 있었는데 7~8달러의 배달료를받고 술을 사 집까지 배달해줬다. 캐나다에서는 술을 아무 곳에서나 팔지않으니 가능한 사업이었다. 아이디어다 싶어 토론토에 있는 한식당과 계약을 맺고 음식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온 더 고On the Go’가 회사 이름이었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2만5000달러를 받고 그 사업체를 팔았다.
유학까지 가서 왜 그렇게 돈이 벌고 싶었을까?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럭셔리 크루즈도 타고 싶고 세계 이곳저곳에서 몇 달씩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다. 무역학과 교수인 아버지영향 때문인지 예전부터 세계를 무대로 살고 싶단 생각이 있었다. 유학도 그래서 결심한 거다. 영어만큼은 잘하고 싶었다. 예전 아버지와 나눈 대화도 학업 대신 ‘실전’을 택한 배경이 됐다. “아버지, 대학에서 4년을 공부하는 게 낫습니까? 무역 회사에 1년을 다니는 게 낫습니까?” “음, 아무래도 무역 회사에 1년 다니는 게 낫겠지?”
의류 사업과 떡볶이 사업은 전혀 연관이 없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집이 대구인데 그곳에 떡볶이를 기막히게 하는 집이 있었다. 사업체를 정리한 바로 다음 날 그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차마 용기가 안 나더라. 먼 발치에서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다음 날 아침 주인 할머니께 사정을 말했다. “나는, 니 같은 사람들이 젤로안쓰럽다” 하시면서도 쉽게 허락을 하지 않으셨다. 틈날 때마다 찾아뵌 지 3개월 정도 지났을까? 할머니가 직접 떡볶이 만드시는 걸 볼 수 있었다. “자 봐라, 소금 이만큼, 고추장 이만큼~” 하는 식이었지만 사진을 찍듯 머릿속에 박았다.그날부터 약 3개월간 매일같이 연습했다. 그리고 이화여대 앞에서 노점상을 시작했다.
성공했나? 돌아보면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다.외국 손님이 오면 남에게 보이려고 괜히 영어를써가며 필요하지도 않은 대화를 했다. 떡볶이장사나 한다고 무시할까 봐 고개도 뻣뻣이 쳐들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나를 낮추니 서서히 손님이 늘었다. 신사동에 1호점을 냈고, 1년도 안 돼 전국에 18개 매장을 갖게 됐다.
다른 길도 많았을 텐데 굳이 모험을 한 이유가 뭔가? 모험을 하면 진짜로 신기한 일이 펼쳐진다. 국대 떡볶이는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만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꿈꾼 대로 하나하나 착착 그림이 그려지는 거다. 그 과정이 정말신기하다. 주저주저하다가 아무 일도 못 하는 사람이 많은데 모험을 하면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간의 모험을 통해 얻은 최고의 교훈은 뭔가? 사람을 얻으라는 거다. 실패의 과정을 통해 내신용은 더 좋아졌다. 어떻게 해서든 빚을 모두 갚았기 때문이다. 대출 업체에서 오는 전화도 당당히 받았다. 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고, 가게를 오픈하는 과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다음 목표는? 대한민국 국가 대표 떡볶이가 되려고 ‘국대’라고 이름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1등을 하고 세계 1등에 도전하겠다.
한국에 없던 ‘쇼’를 하다
카페 겸 공연장 <루프> 김형남 대표 헝클어진 머리칼, 골반에 걸친 바지, 팔에 새긴 문신…. 인디 밴드 멤버 같은 모습의 그가 한 첫 번째 모험은 대학에서 전공을 바꾼 것이었다. 일어일문학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어일문학과에 들어갔지만 내 길이 아니란 생각에 연극영화과로 전과했다. 그리고 일찌감치 대학로 극단으로 나갔다. 현장에서 부딪히며 돈도 벌고, 연출도 하자생각한 거다. 왜인지 그는 어릴 때부터 밥벌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형남표 작품’은 파격적이었다. ‘포엠 퍼포먼스Poem Performance’라 이름 붙인 공연에서는 시 낭송을 하며 퍼포먼스를 했다.시구는 내러티브나 음악으로 바꾸었다. 연극판에 오래 있진 못했다. “밥을 먹거나 버스를 타도 돈이 들잖아요. 사람을 쓰려고 해도 돈이 들고요.그런데 항상 가난했어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눈치를 보며 벽에 포스터를 붙이고, 돈 없이 술을 먹는 것도 싫었어요.” 대학로를 떠난 그는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사진과 파인 아트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밟으며 8년을 살았다. IMF 때 떠난 유학은 ‘생애 최대의 모험’이었다. “용돈이라도 벌기 위해 일을 많이 했어요. 그중 스텔라 매카트니의 쇼룸을 론칭하는 작업도 있었죠. 런던은 인구의 70%가 유동 인구예요.학생도 많고 백수, 패션 디자이너도 많아요. 그들 대부분은 밥벌이에 대해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해 확실한 삶의 철학이 있었어요.”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다양한 일을 했다. 패션 사진 작업, 서울시 해외 마케팅, 광화문 가든 플레이스 옥상 개조 프로젝트, 갤러리 전시 큐레이팅…. 하지만 ‘이게 내 일이다’ 하는 확신이드는 직업은 없었다. “기획 단계부터 직접 해야재미가 있는데 대행사 수주를 받아 잠깐씩 참여하는 일이 많아서인지 재미가 없더라고요.”
올해 서른여덟의 그는, 마침내 진짜 모험을 하기로 결정한다. 자본금은 약 1억 원. 이태원에 있는 가정집을 임대해 카페로 바꾸었다. 옥상에서면 남산 일대가 시원스레 펼쳐지는 곳이었다. ‘루프Ruf’라는 간판을 달고 2층에는 작은 공연장도 만들었다. 노란 끈이 그대로 묶여 있는 종이 박스를 툭툭 쌓아 의자로 썼다. 어깨를 붙이고 앉으면 약 40명이 앉을 수 있다. 그곳에서 공연을 하는 배우들의 대부분은 일대에 사는 외국인들이다. “노래와 악기 연주에 능한 친구들이 많아요. 대부분 무대에 서는 걸 부담스러워하지도 않지요. 그들과 재미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어요.” 입장료 1만 원을 받는 공연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저녁 8시에 펼쳐지는데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이 꽤 많다. 특히 캐나다에서 온 대니Danny가 팬티만 입고 등장해 약 30분간 이 닦고 옷 입으며 부산하게 아침을 보내는 내용의 공연 <굿모닝>이 인기다. “이게 무슨 공연이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재미있다”고 하는 이도 많다. 이곳에서 그는 사장 겸 연출가 겸 요리사다.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후닥닥 내려가 요리를 한다. 수입의 다각화를 위해 평일 해 질 녘에는 요가 강좌도 한다. 이름하여 선셋 요가! 요가를 하는 곳이 전망 좋은 옥상이라 은근 인기가 높다. 그의 꿈은 이 독특한 컨셉트의 카페가 요코하마와 베를린까지 진출하는 것. 6개월 전, 한국에 없던‘쇼’를 시작한 그가 말한다. “<드래곤 볼>의 손오공처럼 살고 싶어요. 신나고, 재미있게!”
가난한 유학생, ‘슈퍼스타 K’가 되다
사진가 김명중 클라우디아 시퍼, 스파이스 걸스, 폴 매카트니, 고故 마이클 잭슨…. 서른아홉, 프리랜스 사진가로 일하는 김명중의 고객 리스트다. 물론 처음부터 고객 명단이 이렇게 화려했던 건 아니다. 런던에 있는 그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을 배운 적도 없는 가난한 유학생이 어떻게 사진가가 되었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필름과 비디오 공부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IMF가 터져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가세가 기울어 도움을 받을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으로 그냥 돌아가기는 억울했다. 일단 살아남자 결심하고 온갖 일을 하며 버텼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법원 담당견습 사진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고 응시해 합격했다. 영화 공부를 준비하며 사진에 관심이 생겨 장비도 구입하고, 한국에서 사진 관련 책을 사다가 독학을 하던 참에 얻은 기회였다.
그 후 게티 이미지로 옮겨 수석 사진기자까지 올랐다. 인정을 받은 이유가뭘까?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하지 않더냐. 이곳에서는 ‘남의 잔디가 더푸르게 보인다’고 하는데 다른 사진가가 찍은 작품이 내 작품보다 좋아 보였다. 나도 그런 사진을 찍고 싶어 패션, 아트, 건축 잡지를 많이 보며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장비는 어떤 걸 썼을까’ 생각했다. 이미 성공한 스타 사진가들의 작품을 계속해서 보니 자연스럽게 안목이 생겼고 사진도 달라졌다. 절박함과 욕심이 모험심을 키우는 것 같다.
세계적 사진 에이전시에서 수석을 맡았으니 연봉도 꽤 높았겠다. 약 6만파운드였다. 보너스를 합하면 7만 파운드 정도.
우리나라 돈으로 1억 원이 넘는데 그런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왜 프리랜서를 선언했나? 더 이상 도전할 것이 없으니 도태되는 것 같았다. 아카데미 영화제,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많은 셀러브러티를 몇 년간 찍었더니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다.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 상태를 묵인하는 건 회사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실패의 두려움에 몸을 사리기보다 성공했을 때의 희열을 더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달라질 내 인생도 그려본다. 긍정적인 생각은 말투와 태도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긍정의 기운이 내 몸을 통해 그대로 발산되는 거다. 기회는 밝은 사람에게 더 많이 찾아온다.
스파이스 걸스, 폴 매카트니, 마이클 잭슨과는 어떻게 일하게 된 건가? 2007년, 스파이스 걸스가 재결성을 하고 기념투어를 계획하면서 투어 전담 사진가를 구했다. 영국 친구 중 한 명이 나를 추천해줬는데 워낙 세계적인 그룹이라 별 기대를 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뽑혔다고 연락이 왔다. 그걸 계기로 폴 매카트니, 마이클 잭슨과도 작업을 했다. 마지막 월드 투어를 준비 중인 마이클 잭슨을 런던에서 만났는데 키가 생각보다 커 놀랐다. 180cm인 데다 부츠를 신어 훨씬 커 보였다.악수를 하며 “갓 블레스 유”, “갓 블레스 유” 하고 말했는데 손이 무척 따뜻했다.
세계적 셀러브러티와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뭔가? 일단 사진을 잘 찍어야 한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실력이 좋지 않으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내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이 그 사람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 특유의 공손함과 겸손함도 큰 장점이 된다.
고졸이라는 학력이 모험에 걸림돌이 된 적은 없었나? 없었다. 지금 어떤 작품을 하느냐가 중요할뿐 과거에 어떤 공부를 했는지는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사진을 제대로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나? 그러지 않아도 새로 학교에 들어가 사진을 공부하고있다. 계속 일을 하다 보니 궁금한 것들이 생겨결심하게 됐다. 폴 매카트니와 월드 투어도 다니고 있어 이래저래 바쁘게 살고 있다.
꿈꾸는 또 다른 모험이 있다면? 로스앤젤레스에서 함께 일을 해보자는 제안이 많이 들어와 거주지를 아예 그쪽으로 옮길까 생각 중이다.도전하고 모험하는 것도 습관처럼 몸에 배어 한두 번 해버릇하면 계속하게 되는 것 같다.
대기업 맨, 디자인 맨이 되다
디자인 스튜디오 <비스타디아> 강명석 대표 직장 생활을 하는 샐러리맨이라면 경비행기로 세계 일주를하고, 몸짱이 되기 위해 무한 도전을 시작하는 이보다 여기 소개하는 강명석 대표가 더 부러울 수 있겠다.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 수차례 하면서도 용기를 내기가 어려운데 올해 서른셋의 강 대표는 딱 한 달 고민하고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직장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LG생명과학. 담당 업무는 해외 마케팅이었다. “집이 있는 암사동에서 회사가 있는 여의도까지 약 1시간이 걸렸어요. 셔틀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30분간 눈을 붙였다가 뜨면 막 해가 떠올랐습니다. 감상적인 것 같긴 한데, 무심히 밖을 보다가 문득 삶이 무미건조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출근했다가 퇴근하고,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가방을 들고 버스를 타는…. 뭔가 역동적인 직장 생활을 꿈꿨는데 어느 순간 재미없는 일상을 사는 거죠.그때부터 ‘뭘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부모는 잘 다니던 대기업을 왜 그만두냐고 말렸고, 회사에서는 불만이 있으면 조정해주겠다고 했다. 2005년 12월 공채로 입사했는데 LG 그룹 전체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서 3등을 차지할 만큼 성적이 좋았으니 회사에서도 기대가 컸다.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손에 쥔 걸 놓아야 다른 걸 쥘수 있다고 생각하니 의외로 정리가 쉬웠다. “주저하다가 모험을 하지 못하는 이가 많은데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 결행이 쉬워요. 마음의 소리는 본인이 가장 잘 알잖아요. 명함 내밀기에 좋은 빛 좋은개살구로 남을 것이냐, 진정 행복한 일을 할 것이냐 곰곰 생각하면 답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직 후 그는 1년간 디자인 여행을 떠났다. “뉴욕, LA, 샌프란시스코, 런던, 파리, 로마, 홍콩 등을 여행하며 디자인 숍과 스튜디오, 갤러리를 집중적으로 봤어요. 대학 시절부터 <월간 디자인>을 보고, 드로잉도 하고, 디자인 제품이나 서적도 열심히 샀거든요. 뉴욕에서는 작지만 강한디자인 스튜디오도 여럿 방문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2명이면 충분하다고 하더라고요.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돌아온 그는 바로 모험을 시작했다. 잠깐 네이버에서 일할 때 알게 된 편집 디자이너와 500만 원씩 투자, <비스타디아>란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렸다. ‘기업의 웹진이나 스마트폰 사이트를 디자인적이고 예술적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 서비스의 핵심! ‘디자인 감感 좋다’는 인정을 받으면서 뮤지컬 <궁>, 뮤지컬 <42번가>, 로만손, 아모레퍼시픽 샴푸 브랜드 ‘려’,제시 뉴욕 등의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슈에무라와 키엘, 앱솔루트의 제안을 받아 각 브랜드의DNA를 보여주는 디자인 작품도 만들었다. 가로수길의 모든 문화가 콘텐츠가 되는 <가로수길>의 웹진도 비스타디아의 작품이다. “<가로수길>을 직접 만든 분들이 따로 있어요. 두 분이 사비를 털어 만든 것인데 그분들과 함께 어울리다가 자연스럽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가로수길>의 컨텐츠는 재미있다. 지난해 소개한 ‘가로수길 배달 음식 특집’은 50여 가지의 배달 음식을 직접 시켜 먹고 평점을 매겨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스티브 잡스처럼 세계적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재야의 실력파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는 온라인 잡지 <비플VEOPLE>도 준비 중이다. “유력매체에 나올 정도로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진짜 실력이 뛰어난 분들이 많거든요. 이들을 여러작품과 함께 릴레이 형식으로 소개하는 것이 컨셉트입니다!” 이제 그는 사장으로 산다는 것의고충과 기쁨을 하루하루 절감하며 살고 있다.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예요?” “하하, 클라이언 트에게 돈 들어오는 날이오!”
‘국가 대표’가 되는 그날까지 Go, Go~
<국대 떡볶이> 대표 김상현 노점상에서 시작해 전국에 18개 매장을 오픈한 국대 떡볶이 대표 김상현은 겨우 서른한 살이다. 운이 좋았거나 돈이 많았을 거란 생각은 마시길!
떡볶이 사업을 하기 전 의류 사업을 하다 실패했다고 들었다. 흰 셔츠나무채색 원피스 등 가장 기본이 되는 클래식 아이템을 직접 제작해 팔았다. 가격이 싼 건 품질이 떨어지고 명품은 너무 비싸니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적정한 가격에 팔면 잘될 것 같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지식도 경험도 없었으니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3억 원 정도를 까먹었더라. 사금융권에서 돈을 빌려 마지막 직원 월급을 줬다. 빚 8000만 원이 생겼다. 자본금이 꽤 많았다. 어떻게 충당한 건가? 캐나다 유학 시절 장사를 해 번돈, 부모님이 보태주신 돈 등 수중에 있는 모든 자금을 그러모았다. 스물세 살부터 스물일곱 살까지 캐나다 토론토에 있었는데 도중에 학교를 그만두고 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군고구마를 팔고, 1년 넘게 이삿짐센터에서 일했다.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았다. ‘약간’ 성공한 사업도 있었다. ‘다이얼 어 보틀Dial a Bottle’이란 회사가 있었는데 7~8달러의 배달료를받고 술을 사 집까지 배달해줬다. 캐나다에서는 술을 아무 곳에서나 팔지않으니 가능한 사업이었다. 아이디어다 싶어 토론토에 있는 한식당과 계약을 맺고 음식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온 더 고On the Go’가 회사 이름이었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2만5000달러를 받고 그 사업체를 팔았다.
유학까지 가서 왜 그렇게 돈이 벌고 싶었을까?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럭셔리 크루즈도 타고 싶고 세계 이곳저곳에서 몇 달씩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다. 무역학과 교수인 아버지영향 때문인지 예전부터 세계를 무대로 살고 싶단 생각이 있었다. 유학도 그래서 결심한 거다. 영어만큼은 잘하고 싶었다. 예전 아버지와 나눈 대화도 학업 대신 ‘실전’을 택한 배경이 됐다. “아버지, 대학에서 4년을 공부하는 게 낫습니까? 무역 회사에 1년을 다니는 게 낫습니까?” “음, 아무래도 무역 회사에 1년 다니는 게 낫겠지?”
의류 사업과 떡볶이 사업은 전혀 연관이 없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집이 대구인데 그곳에 떡볶이를 기막히게 하는 집이 있었다. 사업체를 정리한 바로 다음 날 그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차마 용기가 안 나더라. 먼 발치에서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다음 날 아침 주인 할머니께 사정을 말했다. “나는, 니 같은 사람들이 젤로안쓰럽다” 하시면서도 쉽게 허락을 하지 않으셨다. 틈날 때마다 찾아뵌 지 3개월 정도 지났을까? 할머니가 직접 떡볶이 만드시는 걸 볼 수 있었다. “자 봐라, 소금 이만큼, 고추장 이만큼~” 하는 식이었지만 사진을 찍듯 머릿속에 박았다.그날부터 약 3개월간 매일같이 연습했다. 그리고 이화여대 앞에서 노점상을 시작했다.
성공했나? 돌아보면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다.외국 손님이 오면 남에게 보이려고 괜히 영어를써가며 필요하지도 않은 대화를 했다. 떡볶이장사나 한다고 무시할까 봐 고개도 뻣뻣이 쳐들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나를 낮추니 서서히 손님이 늘었다. 신사동에 1호점을 냈고, 1년도 안 돼 전국에 18개 매장을 갖게 됐다.
다른 길도 많았을 텐데 굳이 모험을 한 이유가 뭔가? 모험을 하면 진짜로 신기한 일이 펼쳐진다. 국대 떡볶이는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만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꿈꾼 대로 하나하나 착착 그림이 그려지는 거다. 그 과정이 정말신기하다. 주저주저하다가 아무 일도 못 하는 사람이 많은데 모험을 하면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간의 모험을 통해 얻은 최고의 교훈은 뭔가? 사람을 얻으라는 거다. 실패의 과정을 통해 내신용은 더 좋아졌다. 어떻게 해서든 빚을 모두 갚았기 때문이다. 대출 업체에서 오는 전화도 당당히 받았다. 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고, 가게를 오픈하는 과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다음 목표는? 대한민국 국가 대표 떡볶이가 되려고 ‘국대’라고 이름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1등을 하고 세계 1등에 도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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