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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섭(퀄컴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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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544회 작성일 10-05-13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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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벤처업계의 한국인 신화 김범섭 퀄컴 부사장


교수직 박차고 실리콘밸리 간 까닭? "예측 가능한 삶은 재미없잖아요"
미국 벤처업계의 한국인 신화로 불리는 김범섭(48) 퀄컴 부사장은 어렸을 때 꿈이 교수였다. 퀄컴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의 휴대전화 원천기술을 가진 세계적 IT(정보기술) 업체이다.

김 부사장은 1994년 34살의 나이에 KAIST의 교수가 되면서 어릴 적 꿈을 이루는가 싶더니, 2000년 미국에서 벤처기업 버카나 와이어리스를 창업하고 2006년엔 부사장으로 퀄컴에 합류했다. 그는 현재 퀄컴의 최고위직 한국인이다. 그가 창업한 버카나 와이어리스는 휴대전화용 송수신 칩을 개발하는 회사였는데, 퀄컴에 5600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547억원)에 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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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6일 건국 60주년 명예위원으로 위촉돼 서울을 방문한 김 부사장을 숙소인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외교통상부는 8월 15일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 지구촌 곳곳에서 한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기여한 재외동포 주요 인사와 그 후손을 건국 60주년 명예위원으로 선정해서 초청했다. 미국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경제계 인사로 김 부사장이 선정됐다. 김 부사장은 42명의 건국 60주년 명예위원 중 최연소다.
김 부사장은 우선 왜 안정적인 직업으로 꼽히는 교수를 그만두고 벤처기업가에 도전하게 됐는지 털어놨다. 그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UC(캘리포니아주립대학)버클리 캠퍼스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기 전까지만 해도 교수가 되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였다”며 “때문에 당시는 교수가 되기 위해 논문을 쓰고 업적을 쌓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상과학소설 읽는 것을 좋아했고 학생과학이란 잡지의 애독자로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


미 유학시절, 공학도들의 벤처 정신에 충격
한국 학생이 책만 볼 때 그들은 주식 얘기

그러던 김 부사장은 박사 학위 후 1990년 칩스 앤 테크놀러지란 회사에 근무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김 부사장은 교수 지원을 위한 연구소 경력을 쌓기 위해 회사에 입사했건만, 미국 회사에서 만난 건 새로운 벤처 문화였다. 칩스 앤 테크놀러지는 1985년 벤처기업으로 창업해 김 부사장이 입사할 당시는 주식시장에 상장을 하고 연간 3억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해 있었다. 회사에선 창업가 정신이 투철한 공학도를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김 부사장은 “한국에서 공부할 땐 단지 학문에 대해서만 들을 수 있었지만 미국 회사에선 공학도들이 주가와 월스트리트 문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들은 단어 중 에인절(angel)이란 새로운 개념은 기업이 망하면 감옥에 가야 한다는 한국적 문화에 물들어 있던 나에겐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에인절은 벤처업계 용어로 창업을 하면 자금을 대주고 사업 가이드도 해주며 인력도 뽑아주는 등의 도움을 주면서 회사와 운명을 같이하는 초기 투자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미국에선 벤처사업을 하다 망해도 에인절이 내 돈 물어달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수의 길이 인생의 목표였던 김 부사장에게 새로운 벤처문화는 맛보기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교수 임용에 더욱 도움이 될 수 있는 글로벌 대기업 필립스의 연구소로 직장을 옮겼다.

1994년 마침내 30대에 인생의 목표인 교수가 됐다. 김 부사장은 “교수가 되고 나니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예측 가능하게 됐지만 오히려 인생의 흥미가 없어지게 됐다”며 “이러다 도끼 자루 썩는지 모르고 살 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한 번 받은 벤처의 세례가 그의 사고를 완전히 바꿔버렸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시스템 반도체 설계 씨앗 뿌려
보장된 미래 대신 실리콘밸리에 도전장

그런 와중에도 김 부사장은 KAIST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에 시스템 반도체 설계의 씨를 뿌리게 된다. 당시 외국에서 유학한 반도체 전공자들은 대부분 반도체 만드는 공정을 전공했지만 김 부사장은 설계를 전공했다. 김 부사장은 “당시는 이미 만들어진 반도체 칩을 모아다가 시스템을 설계했지만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앞으론 반도체 칩 하나에 시스템이 모두 들어가게 설계하는 게 주류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설계를 집중해서 연구했다”고 말했다.

김 부사장은 “당시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부상하던 때였지만 반도체 설계를 연구할 수 있는 기반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며 “대학에서 이용할 수 있는 반도체 칩 설계용 그래픽 프로그램이나 시험 제작할 수 있는 공장(팹)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경종민 KAIST 교수의 주도 아래 몇몇 뜻이 맞는 교수들과 함께 KAIST에 반도체설계교육센터를 세우고 전국 대학에 반도체 설계를 보급하는 일을 했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 보급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 1999년 또 한번 미국 벤처의 매력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 김 부사장은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실리콘밸리 벤처기업에 자문을 해줬다.

한국에 돌아와서 창업을 고민하던 김 부사장은 2000년 KAIST 교수직을 사임하고 미국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김 부사장은 “창업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당시는 무선 설계가 고집적 설계 기술로 전환되는 시기로, 기술전환기는 몸집이 큰 대기업이 움직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창업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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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만 믿고 덤볐다가 1년간 주문 제로
한국•대만 오가며 직접 영업 나서기도


김 부사장은 버클리 때의 친구인 코맥 콘로이 박사와 함께 버카나 와이어리스란 회사를 자본금 500만달러에 세웠다. 창업 후 에인절의 투자를 받아 곧바로 휴대전화에 사용되는 핵심 반도체 무선 칩을 개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4년여 만에 세계 최초로 CMOS(상보성금속산화물반도체) 기술을 이용한 RF(무선송수신)칩을 개발했다. 이는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가장 핵심적인 칩이다. 예전 무선 칩에 비해 작은 신호도 받을 수 있도록 성능을 개선했을 뿐 아니라 전력 소모도 줄이고 가격도 싸게 했다. 하지만 구매처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당시 경쟁자는 브로드컴,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필립스 등 쟁쟁한 글로벌 기업들이었지만 버카나 와이어리스는 이름 없는 벤처 기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김 부사장은 “영업을 간단하게 생각하고 20년 이상 경험을 가진 영업 전문가를 영입해 맡겨 버렸는데 1년 동안 제품 주문을 받은 게 한 건도 없었다”며 “직원들 월급 주는 것까지 걱정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가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일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김 부사장이 기술 개발에서 손을 떼고 직접 영업에 나섰다. 한국•대만 등지를 오가며 제품을 사줄 곳을 찾았다. 몸무게가 7㎏이나 빠졌다.

그렇게 1년6개월 넘게 구매처를 찾다 구매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퀄컴이 인수를 제안해 왔다. 김 부사장은 “퀄컴도 개발 노력을 하다 실패하니까 우리의 기술을 인정하고 인수 제의를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 부사장은 반쪽의 성공이 아쉽다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론 기업을 더 키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투자자들이 자금 회수를 원해 그에 따랐다”고 말했다.


한국선 성적 순이지만 미국에선 열정 순!
한국 젊은이들 좋아하는 일에 열정 바치길

퀄컴에 합류한 후 김 부사장은 기술 개발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김 부사장은 “이젠 보다 다양한 분야의 인력과 함께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됐고, 멀리 내다보는 제품도 개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단 샌디에이고에 본사가 있는 퀄컴은 버카나 와이어리스를 인수한 후에 실리콘밸리에 1000여명이 근무할 수 있는 연구센터를 만들었다. 김 부사장은 현재 실리콘밸리의 연구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김 부사장이 이끄는 팀은 과거 벤처기업 시절 50여명에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150명으로 늘었다.

김 부사장은 퀄컴에 합류해서도 휴대전화 핵심 칩 기술을 개발 중이다. 버카나 와이어리스 시절 첫 고객을 찾는 데 1년6개월이 걸렸지만 퀄컴에 합류해서 작년에 개발한 칩은 3개월 만에 고객을 찾았다. 김 부사장 팀이 작년 개발한 칩은 1년 만에 1억개가 넘게 팔릴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4세대 통신 칩을 개발하고 있다. 유럽, 미국, 한국 등에서 사용되는 모든 통신 방식을 지원하면서 GPS(범지구위치결정시스템)나 무선인터넷 등도 한 개의 칩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원 칩 시스템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퀄컴은 휴대전화 기술료만 받아가는 회사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김 부사장은 “한국은 퀄컴에 있어 가장 큰 고객이고, 한국과 퀄컴은 동반자로서 함께 성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부사장은 또 “퀄컴은 규모는 대기업이지만 문화는 벤처처럼 굴러가는 회사”라며 “기술 확보를 중시하는 회사라서 앞으로 10년간은 기술력으로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는 회사”라고 말했다.

김 부사장은 글로벌 인재를 꿈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 즐겨하
는 것을 열심히 하라”고 조언했다. 그도 중•고등학교 때는 서울 종로 세운상가를 다니면서 트랜지스터 등을 사다가 전자제품 조립하기를 즐겨 했다. 김 부사장은 또 “책을 많이 읽고 경험을 많이 해야 하며, 열정과 욕심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부사장은 “한국 대학은 시험 성적에 의해 선발하지만 미국 대학에선 자신이 어떤 일을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수행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며 “열정이 없이는 글로벌 인재가 되기 힘들다”고 말했다. 열정이 필요하긴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다. 김 부사장은 “한국에선 승진 때만 되면 비슷한 사람끼리 다시 경쟁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며 “미국에선 높은 직위로 올라갈수록 더 뛰어난 경쟁자가 나타나 훨씬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엔지니어, 교수, 벤처기업가, 대기업 임원 등을 거치면서 단계별로 만났던 경쟁자들은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며 “위로 올라갈수록 힘든 게 미국 사회”라고 말했다.

김 부사장은 성공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2004년 세계 최대의 공학계열 학회인 국제전기전자기술자협회(IEEE) 펠로(석학회원)에 선정됐다. 한국인 IEEE 펠로는 10여명 정도 있다. 또 작년부터 반도체 설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IEEE 저널 오브 솔리드 스테이트 서킷의 부편집장을 맡고 있다.


| 퀄컴은 어떤 회사 | QUALCOMM

휴대전화 CDMA 원천기술 개발 한국계 250여명 근무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본사를 두고 있는 퀄컴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의 휴대전화 원천기술을 개발한 회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CDMA 방식은 1995년 한국에서 최초로 상용화됐다. 휴대전화 방식으로는 CDMA 외에도 유럽 등에서 사용하는 GSM 방식이 대표적이다.

퀄컴은 1985년 어윈 제이콥스 등 7명의 통신업계 전문가가 모여 설립했다. 당시 퀄컴은 계약제 연구 방식으로 무선 이동통신 제품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88년 개발한 옴니트랙스라는 기술은 현재 가장 널리 쓰이는 위성 통신 기반의 상업용 무선 통신망이다.

퀄컴을 일약 이동통신 업계의 스타로 만든 것은 1989년 CDMA 방식의 이동 통신 방식 개발이다. CDMA는 마치 영화 필름 모양으로 가상으로 통신 주파수를 잘라 디지털화된 음성 신호를 실어 보내는 방식이다. 퀄컴은 현재 7200여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145개의 통신 단말기 제조업체와 특허 제공 계약을 맺고 있다. 휴대전화 도매 가격의 평균 5% 이하를 특허료로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퀄컴은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특허 사용료 등으로 올릴 정도로 기술 개발과 확보를 중시하는 회사다. 특허료 외에도 휴대전화 핵심 칩 판매 등으로 수익을 올린다.

퀄컴의 한국인 직원은 150여명으로 미국 국적의 동포까지 포함하면 한국계가 250명을 넘는다. 한국계는 본사 직원(8400여명) 중 약 3%를 차지한다. 퀄컴의 작년 매출은 88억7000만달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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