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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로저스 등 세계적 '거물'들이 전하는 최신 투자, 경영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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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wha 댓글 0건 조회 2,811회 작성일 11-05-16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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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주최한 ‘제2회 아시안 리더십 콘퍼런스’는 글로벌 정치*경제 무대 대스타들의 크고 작은 목소리를 한곳에서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지난 2월 21일과 22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이 대회엔 우선 호주*핀란드*뉴질랜드*싱가포르의 전 총리 4명 등 전*현직 장관급 이상의 정치인 8명이 모였다. 여기에 미 <포천> 선정 ‘2007년 글로벌 500대 기업’ 중 12개 기업 CEO들, 중국 5대 명문 대학 중 3개 대학의 스타 교수들이 가세, 자그마치 39명에 이르는 전 세계 정*재*학계 최고의 리더들이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세계 정치*경제의 거대한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이들 사이에 과연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까. 세계 정치계와 비즈니스계를 이끌어가는 별들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어떤 정보들이 들어 있을까.

DMZ 부근의 땅과 물 산업에 투자하라
월가의 전설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
푸른색 나비넥타이에 청바지 차림으로 행사장에 나타나, 손에 신줏단지 모시듯 블랙베리를 끼고 전 세계 투자가들과 실시간 메일로 소통하던 머리 희끗희끗한 60대 후반의 남자. 그가 바로 세계적인 스타 투자가 짐 로저스다.
그는 최근 글로벌 투자 무대에서 가장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오토바이로 지구를 두 바퀴 반 돌고 노란색 벤츠 승용차로 무려 116개국을 횡단한 그의 기행은 이미 유명세를 탔고, 그의 저서들은 뉴욕과 홍콩 서점 진열대에서 로열석을 꿰차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원자재 시장 강세, 중국 증시 거품론 등 그의 투자 예측이 속속 맞아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의 사람들은 이제 그가 풀어내는 ‘돈 버는 방법’에 열광한다. 특히 전 세계를 돌며 각종 강연과 인터뷰를 통해 거침없이 쏟아내는 투자와 관련한 폭탄 발언이 세간의 이목을 모은다. “나는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는 말에 사람이 귀 기울이는 한,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계속해서 떠들어댈 생각이에요.” 그의 한마디 한마디엔 유머와 끝없는 자신감이 배어난다.
콘퍼런스 행사장 곳곳에서 사인 공세에 시달린 로저스는 이번 대회에서도 서슴없이 자신의 의견을 풀어놨다. “5년 안에 남북한이 통일될 것이니, 미리 비무장지대DMZ의 땅을 봐둬라”, “앞으로 10~15년 동안은 절대 어떤 종류의 채권에도 투자하지 마라” 등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투자팁을 참석자들은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웠다. 특히 그는 만찬 도중 옆 자리에 앉은 한 투자가에게 “DMZ 부근의 땅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가?”라고 묻는 등 이 지역 부동산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주식 시장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자에도 일가견이 있다. 최근 그가 몇 년 전 헐값에 산 뉴욕의 낡은 건물이 어느새 2000만 달러를 호가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가 제시한 최고의 투자 힌트는 뭘까. 가장 독특한 시각은 “재앙에서 기회를 엿보라”다. 지구 온난화, 물 부족 사태 등 앞으로 세계에 거대한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이슈들에서 또 다른 투자 기회를 노리라는 것. 그는 특히 “물 관련 기술에 투자하라”고 조언했다. “거대한 경제 파워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물 부족 문제는 아주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나는 중국과 홍콩, 싱가포르에 걸쳐 물 관련 주식을 매입했죠. 수자원과 관련한 운반·정화·양수揚水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면 정부가 찾아와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아부’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의 동물적 투자 감각의 원천은 바로 모험이다. 그는 헤지 펀드 매니저 중 최초로 세계 여행길에 오른 인물이다. 1969년, 조지 소로스와 함께 퀀텀 펀드를 창업한 그는 이곳에서 일하는 12년 동안 3365%라는 경이로운 누적 수익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1980년 헤지 펀드 투자가로선 한창 때인 서른일곱의 나이에 월가를 훌쩍 떠났다. “한곳에 앉아 끊임없이 숫자 놀음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90년엔 오토바이로, 1999년엔 자동차를 타고 세계 여행길에 올랐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큰돈’ 벌기 위한 투자 혜안을 키우는 여행이었다. 일례로 그는 1999년, 여행 도중 한국에서 여성 인권 향상을 보고 경구 피임약 업체에 투자해 6년 만에 15배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당시 한국 여성들의 옷차림이 매우 자유분방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사람들 말이 최근 몇 년 새 여성의 옷차림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건 뭔가를 의미하는 거다 싶어, 당장 경구 피임약 업체에 투자했습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성의 옷차림은 당당한 ‘자기표현’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요.”
한마디로 그는 호기심 덩어리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저곳 돌아보고 싶은 게 많다”며 현금 지급기에서 곧바로 300만 원가량을 인출했다. 피곤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유난히 즐겼다. “세계 곳곳에서 나는 항상 ‘보통 사람’과 대화 나누는 것을 즐깁니다. 그들의 말속에 곧 투자의 기회가 있죠. 마치 내가 한국에서 보통 여성들의 옷차림에서 투자 힌트를 얻은 것처럼요.”
이런 그가 제시한 돈 버는 방법은 의외로 평범하고 단순했다.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으라”는 것. “돈을 벌려면 많이 알아야 해요. 자신이 좋아하고, 미쳐 있는 분야만큼 남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분야가 또 있을까? 만약 당신이 정원 가꾸는 걸 좋아한다면, 자신의 집 앞에 텃밭부터 가꾸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의 눈에 어떤 씨앗이 가장 튼실한 열매를 맺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은 곧 당신이 어떤 씨앗으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지 알려주겠죠.”

일과 생활의 균형에 신경 쓰고 유머와 센스를 키워라
경영의 마술사, 카를로스 곤
쟁쟁한 스타를 제치고 ‘가장 결혼하고 싶은 사람’ 2위로 뽑힐 수 있는 글로벌 CEO는 과연 몇이나 될까. 세계적인 ‘경영 스타’로 대접받고 있는 르노-닛산의 카를로스 곤 회장이 그 몇 안에 포함된다. 이미 네 아이의 아버지인 데다, 어느덧 완연한 중년 사내인 그가 미혼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바로 무한한 카리스마의 힘이다.
그는 2조 엔(16조 원)이 넘는 부채*대규모 적자*최저 수준 가동률*대기업병病으로 파산 직전에 내몰린 일본 닛산자동차에 CEO로 취임, 단 1년 만에 사상 최대 흑자로 돌아서게 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2004년 일본 정부는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훈장인 ‘남수포장藍綬褒章’으로 답했다. 외국인 경영자로선 처음 맞는 일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가 높은 이유는 단순히 닛산을 죽음의 늪에서 구해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닛산의 경영 개혁은 다른 일본 자동차 업체에도 마술처럼 퍼져나갔다. 도요타*혼다 등 곤의 경영술에 자극받은 다른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수술에 나섰다. 이는 당시 일본 자동차 산업 전체가 대약진하는 데 튼튼한 토양이 됐다.

그래서 그는 일본에서 ‘곤사마’로 불린다. 어디를 가든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그의 뒤를 쫓는다. 영웅적인 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수많은 경제 전문지 표지에 얼굴도 실린다. 빌 게이츠 등을 제치고 2001년 <타임>과 CNN이 공동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CEO’로 뽑혔고, 2002년엔 <포천>의 ‘올해의 기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콘퍼런스에서 둘째 날 기조 연설을 맡은 그는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행사장에 나타났다. 콘퍼런스 참석자들 중 ‘희귀’하게도 전용기를 타고 입국한 그는 시간 욕심 많은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 비서에게 “다음엔 또 뭐가 있지?”라고 거듭 물으며 철저하게 시간 관리를 했다. 자신감으로 충만한 그의 여유로운 태도 뒤엔 늘 빼곡한 스케줄이 있다. 콘퍼런스 참석을 제외하고 그의 일정은 수많은 미팅으로 가득 찼다. 심지어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전략 회의가 열렸다는 후문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뚫어지게 응시하며 명함 대신 “카를로스 곤입니다”라는 우렁찬 소개를 건네는 어투에선 ‘코즈모폴리턴’의 향이 짙게 배어나왔다. 그는 영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다. 레바논 아버지와 프랑스 어머니를 둔 이민 3세로 브라질에서 태어나 레바논에서 자랐다. 대학은 프랑스 명문 에콜 폴리테크니크Ecole Polytechnique를 졸업했다. 스물네 살의 나이에 타이어 업체 미쉐린에 입사, 서른한 살 되던 해 남미 사업 총괄자가 됐고, 서른다섯엔 북미 미쉐린 CEO가 됐다. 1996년엔 르노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됐고, 그리고 일본 대기업 최고 경영자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가 이토록 거침없이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그는 “일과 생활의 절묘한 균형”이라고 귀띔했다. “일에 집중하려면 무엇보다 생활이 안정되어야 합니다. 나는 빼곡한 스케줄에 가족과의 시간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놓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죠. 결국 내가 일하는 이유도 가족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는 생각은 업무의 원동력이 됩니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기 때문에 ‘세븐일레븐(7~11)’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지만, 쉬는 시간엔 철저히 가족과 함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네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과 수영을 즐기고, 수학*과학*역사 숙제를 도와주기도 한다. 세계 500대 기업 두 곳의 CEO를 겸직하고 있지만, 골프를 치지 않는 것도 바로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그는 콘퍼런스 내내 국가와 기업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그와 같은 글로벌 CEO의 눈에 쏙 드는 인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유머와 센스가 있는 사람이 좋다”며 말문을 열었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다양한 문화 환경에서 경영을 경험한 사람도 기본적으로 내가 원하는 인재상이죠. 좀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세상을 살리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요. 돈과 승진에 목매는 사람은 딱 질색입니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으니까! 남들보다 더 넓은 시야와 더 큰 포부가 결국 기업의 성공 스토리를 이끌어냅니다.”

중국의 디자인 에너지를 주시하라
전 세계 메가트렌드 읽는 존 나이스비트
‘메가트렌드Megatrend’, 미래학 분야에서 이것만큼 유명하고 강렬한 키워드가 있을까. 현대 사회의 거대한 조류를 뜻하는 이 말은 지난 20여 년간 기업 CEO와 정치*사회 리더들에게 미래의 힌트가 담긴 주문처럼 회자돼왔다.
애초 이 단어는 ‘주류’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보통 명사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은 이가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 중국 난카이대 교수다. 1982년, 그가 동명同名의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냄으로써 대문자 ‘M’으로 표기되는 메가트렌드는 가장 대중적으로 친숙한 미래학의 상징 기호가 됐다.
<메가트렌드> 발간 후 25년이 지났지만, 나이스비트 교수에겐 여전히 이 단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25년 전 그가 제시한 메가트렌드, 즉 탈공업화와 정보화, 글로벌 경제, 분권화와 네트워크형 조직 등의 흐름은 그 후 속속 현실로 나타났다. 지금 읽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의 미래 예측은 놀랍도록 정교하다.

현재 일흔아홉 살인 그는 빈에서 곧바로 서울로 날아오지 않고, 중간에 있는 베트남의 한 휴양지에서 3~4일간 휴식을 취했다. 행사 시작 이틀 전 입국장에 나타난 그의 옆엔 어김없이 스무 살 연하의 아내 도리스가 있었다. 도리스는 실질적으로 남편의 매니저 역할을 하며, 이번 콘퍼런스 내내 행사장에 나이스비트 교수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 둘이 만난 것은 1995년으로, 도리스는 나이스비트 교수의 저서 <메가트렌드 아시아>의 독일어판 출판업자였다. 5년 뒤인 2000년, 둘은 오스트리아 다뉴브 강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 뒤른슈타인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 한국 방문 당시, 그의 부인은 심지어 신문과의 인터뷰 자리에도 함께 배석했다. 인터뷰 도중에도 나이스비트 교수는 간간이 부인의 손을 잡고, “괜찮느냐”며 수시로 눈을 마주쳤다.
나이스비트 교수는 “하루에 6~7시간씩 신문을 탐독하며 세상의 흐름을 읽는다”고 했다. 휴대전화가 없는데, 전화를 걸어오는 타인의 ‘통화 의도’에 시시각각 자신의 삶이 휘둘리는 게 싫어서라고 했다. 그는 그만의 고집, ‘나이스비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행사 기간에도 “호텔 방으로도 절대 전화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그 이유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에서 보내는 그는 하루에 100여 개가 넘는 중국의 지방지들을 끊임없이 모니터하고 있다. 아예 그를 도와 신문을 스크랩하고 정리하는 ‘신문팀’이 따로 있을 정도. 3~4명의 전문 연구원으로 구성된 이 팀은 중국 각 지방에서 불고 있는 혁명적인 변화들을 탐지하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해 “모든 거대 현상의 출발점은 로컬local 현상”이라며 “특히 중국 지방 곳곳에서 혁신적인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창조적 에너지를 폭발하며 변화를 일으키는 보텀업bottom-up 현상이 무섭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콘퍼런스에서 “중국의 디자인 에너지를 주시하라”고 외쳤다. “상하이의 디자이너들이 속속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진출하고 있고, 중국 화가의 미술품이 미국의 유명 경매 회사를 통해 판매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제 단순한 제조국가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혁신 국가의 길로 들어서고 있어요. 한국은 이제, 이 무서운 이웃과 어떻게 손잡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변화의 바람이 불 때 나는 벽을 쌓기보다 풍차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손에 늘 뭔가 읽을거리를 들고 다니며 열정적으로 세상의 변화를 주시하는 그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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