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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된 녀석들


 

인생에 대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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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미 댓글 0건 조회 805회 작성일 15-06-0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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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암동 로터리에 자리잡고 있는 영철버거는 마케팅이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질 좋고 싼 제품을 고객에게 감성적으로 제공하면 된다는, 어쩌면 아주 단순한 원칙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중퇴 학력에 가진 것 없던 이영철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장사꾼이 되었다. **

지난 2005년 가을, 영철버거는 5년 만에 새 제품을 선보였다. 얇게 썰어 훈제한 돼지고기 등심을 넣은 버거였다. 영철버거 2탄을 준비하면서 이영철은 고민했다. 가격 때문이었다. 2000원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1500원을 받을 것인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식재료 가격을 따지자면 2000원이 비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영철은 끝내 1500원으로 정했다. 그 가격에 그런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본점에 있는 두 가게를 다 내주겠다고 그는 말했다.

영철버거의 가격은 5년째 1000원이다. 버스'지하철 요금, 담뱃값 등 모든 물가가 계속 오르는데도 영철버거의 가격은 늘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식재료 원가만 따진다면 700원가량 된다고 이영철은 말했다. 300원의 이윤으로 직원 월급, 자릿세 같은 고정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양배추나 청양 고추 따위 식재료의 가격이 오르면, 많이 팔수록 손해가 난다. 게다가 고려대 옆에 자리잡고 있어, 방학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 판매량이 뚝 떨어진다.

그래도 영철버거는 수익을 내며 잘 버티고 있다. 여섯 평 가게에서 하루에 영철버거를 1500개나 팔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 내놓은 버거도 하루에 500개가량 팔린다. 물론 영철버거는 맛있고 싸기 때문에 잘 팔린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이처럼 판매량이 높은 건 아니다. 진짜 이유는, 1000원짜리 영철버거가 주인과 손님이 교감하는 매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영철은 학생들의 순수함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씻어냈고, 학생들은 비상업적인 이영철의 장사 방식에 정을 느꼈던 것이다.

* 막노동으로 번 돈, 도박으로 다 날려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여읜 뒤로 이영철은 한 번도 편하게 살아 보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서울과 고향 해남을 오가며 가구 공장, 목걸이 공장, 군복 공장 같은 온갖 공장과 중국집, 레스토랑 따위를 전전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그를 지켜 줄 사람도 없었기에 그는 늘 주눅이 들어 있었고, 남들보다 못하다는 열등감 속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생활은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공사 현장에서 8년 동안 일하면서,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도 받았다. 그러다 한번은 무리하게 벽돌을 지고 오르다 떨어져서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돈이 아까워 치료도 안 하고 버텼더니 병세는 더욱 나빠졌다. 그 상태로 막노동의 비수기인 겨울을 맞았다.

일이 없는 동안 지루함을 달래려고 그는 도박에 손을 댔는데, 완전히 거기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주말만 되면 경마장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모아둔 돈을 다 쓴 것도 모자라 생활비도 갖다 도박에 쏟아 부었다. 닥치는 대로 돈을 빌리기도 했다. 하루에 1000만 원을 잃을 때도 있었다.

가정 경제는 금방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공교롭게도 그 즈음 딸이 가와사키병에 걸렸는데, 치료비 대기가 어려웠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워 밥 대신 죽을 써서 먹어야 했다. 보다 못한 아내가 "처가로 들어가자"는 말을 꺼냈다. 한 가장의 독립권을 포기하는 일이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영철은 그토록 결혼을 반대했던 장인어른을 날마다 보며 살게 되었다.

처갓집 반지하방으로 옮긴 이영철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돈을 벌려면 장사를 하라고 했던 어머니의 충고를 떠올리고, 포장마차를 차려 장사를 하기로 했다. 무일푼이었던 그는 동서에게 50만 원을 빌려 포장마차를 끌고 거리로 나섰다.

처음에는 떡볶이를 팔았는데, 장사는 잘 됐지만,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어묵, 순대, 토스트를 추가했는데, 오히려 장사가 더 안 되었다. 품목이 많다고 좋은 게 아니라고 판단해 달걀 빵과 햄버거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핫도그 빵에 야채를 볶아 채운 버거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는 새로운 버거 개발에 나섰다. 돼지고기, 양배추, 양파 따위를 살짝 볶아 빵 사이에 넣으니 맛이 참 좋았다. 두어 달 동안 연구하여 완성한 그 버거가 지금의 영철버거다.

새로운 버거를 들고 새롭게 자리를 잡은 곳은 이문동 외국어대 앞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점심식사 시간에 맞춰 재료를 불판 위에 잔뜩 볶아 연기를 풀풀 날리며 냄새를 퍼뜨렸다. 그 냄새에 끌려 학생들이 버거를 맛보기 시작했다. 한 번 먹어 보고 맛있다고 하더니 자꾸 먹으러 왔다. 하루에 100개가량 팔려 나갔다. 괜찮은 판매량이었다. 그런데 6개월쯤 지나자, 처음에는 별 말 않던 동네 주민들이 몰려와서 막무가내로 장사를 그만두라고 했다. 장사가 잘 되자 주변에서 시기했던 것이다.

깡패들이 와서 집기를 부수기도 했다. 결국 이영철은 이문동을 떠났다. 그날 그는 못 먹는 술을 마구 들이키고는 집으로 와서 아내와 딸을 껴안고 울었다. 세상은 그가 잘 되는 꼴을 보지 않으려는 것만 같았다.

* 단속을 피해 안암동 로터리를 전전하다

이문동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여전히 영철버거의 가능성을 굳게 믿고 있었다. 2000년 가을에 그가 새롭게 자리를 잡은 곳은, 고려대가 있는 안암동 로터리 부근이었다. 그곳에서 첫날 80개나 팔았고, 곧 200개를 넘어섰다. 주위 사람들도 매우 우호적이었다. 밥과 숭늉을 갖다 주는가 하면, 물도 쓰게 해주었다. '추운데 고생이 많다'는 따뜻한 한마디는 그가 좀처럼 느껴 보지 못했던 훈훈함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점포가 없이 장사하는 상태는 늘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영철버거와 맞닿은 곳에 샌드위치 가게가 들어섰다. 비슷한 음식이라서 이영철이 자리를 다른 데로 옮겨야 했다. 인근 전파사 앞으로 옮기자, 한 달 뒤에는 노점 집중 단속이 벌어져 즉결 처분을 받았다. 그래도 계속 장사를 하자, 경찰이 노점 상인들과 함께 파출소로 연행해 갔다. 그래도 이영철은 떠날 수가 없었다. 다시 단속원이 뜨자, "음식을 버릴 수 없으니, 있는 것만이라도 팔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지만,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즉결 처분에 넘기겠다는 형식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이영철은 택배 회사가 박스를 쌓아두는 곳을 근처에서 발견하고, 그곳에서 장사하게 해달라고 건물 주인에게 부탁했다. 다른 사람들도 노리던 곳이었지만, 이영철의 간곡한 부탁에 주인은 허락을 해주었다. 하지만 장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편의점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무리를 해서라도 그 자리를 사들이려고 했지만, 이미 체결된 계약을 바꿀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다시 주변을 살피다 가까이에 있는 꽃집을 주목했다. 하지만 멀쩡히 장사 잘 하는 곳을 비우게 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 옆 건물에 자리가 났다. 주차장을 지으려고 비워둔 곳이었다. 그래서 공사를 시작하게 되면 언제라도 비워 주기로 하고 계약을 했다. 그렇게 해서 영철버거는 드디어 어엿한 점포를 갖게 되었다. 겨우 여섯 평짜리 가게였지만 이영철은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이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던 이영철은 특이하게도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그 부족함을 메우려고 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서경대나 외국어대 앞에서 장사를 하려고 했고, 고려대까지 왔던 것이다. 고대 앞에서 장사를 할 때, 처음에는 자격지심에 학생들과 눈도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차츰 말을 건네기도 하고, 자주 들르는 학생들과는 친해지기도 했다. 영철버거를 얼마나 더 파느냐 하는 것보다 학생들과 얼마나 친해지느냐가 그에겐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영철을 형이라고 부르는 학생이 많아졌다. 이영철은 동생 같은 학생들에게 가끔 자판기 커피 심부름도 시키고, 영철버거를 공짜로 주기도 했다. 영철버거 하나는 양에 차지 않지만 두 개 먹기는 부담스러워하는 학생이 있으면, 반을 뚝 잘라 내밀기도 했다.

어느덧 그는 버거를 파는 장사꾼이 아니라 학생들의 형이자 친구가 되어 갔다. 학생들은 그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고, 그는 인생 선배로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술에 취해 멋대로 행동하면 따끔하게 나무라기도 했다. 아직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학생들은 이영철의 진심을 받아들였고, 이영철 또한 순수한 학생들에게 깊이 끌렸다.

학생들이 지적하는 것은 뭐든 다 받아들였다. 고기 양이 적다고 하자, 그 비율을 40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끌어올렸다. 뒷맛이 느끼하다고 해서 후추를 넣었다가, 호응이 없자 청양 고추를 넣었다. 청양 고추는 돼지고기와 궁합이 기막히게 잘 맞았다. 돼지고기 뒷다리 부분을 쓸 때, 여학생들이 그 냄새를 싫어하자 과감하게 등심으로 바꿨다. 공짜로 주는 콜라 한 잔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언젠가부터는 마음껏 마실 수 있게 했다. 영업이 끝나면 그 일대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이 흘린 영철버거 포장지를 다 주웠다. 인근 상인들의 인심을 잃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청결은 기본이었다.

하루에 세 번씩 철판을 닦았고, 네 번이나 바닥을 물로 청소했다. 데우다 흐물흐물해진 빵이나 김이 빠진 콜라는 버렸다. 영업 마감 시간에 찾아온 손님을 위해, 남은 것은 버리고 새로 식재료를 볶았다.

학생들은 영철버거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재료비 원가를 계산해 주고, 사진을 찍어 인터넷 여기저기에 올리기도 했다. 신입생이 들어오면 으레 가게에 들러 인사를 시키고 영철버거를 맛보였다. 학교 축제 때는, 노는 것을 포기하고 영철버거에서 일손을 거드는 학생도 있었다.

한 경영대학원 학생은 영철버거의 경영과 영업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는 아이디어를 내주기도 했다. 졸업하고, 결혼하고, 또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학생들은 다시 이영철을 찾아와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졸업식이 있는 날이면 이영철은 학생들과 사진 찍기에 바쁘다.

* 1000원짜리 햄버거 팔아 2000만 원 장학금 기부

이영철이 학생들과 친하다는 것은, 그들의 고민을 안다는 걸 뜻한다. 그는 고려대 인터넷 게시판을 보고, 등록금 때문에 고민하는 학생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대에 장학금 2000만 원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는 아직 처가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가진 돈도 7000만 원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공은 학생들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아끼는 학생들을 위해 그 결정을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2004년부터 지급하기 시작한 장학금은 지난해까지 4200만 원이 들어갔다. 장학금 얘기를 처가에는 숨겼었지만 신문을 보고 알게 된 장인은, 평소에 사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전화를 걸어

"고맙네" 하고 말했다. 장학금은 공식적인 것이고, 비공식적으로도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5억을 벌면 1억을 주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사이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100원을 벌면 200원을 벌고 싶은 게 사람의 욕망입니다. 더구나 저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그 욕망을 억누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일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베풀기로 했습니다."

이제 이영철은 고려대 명물에서 언론이 주목하는 명물이 되었다. 장학금을 지급하자 고대 어윤대 총장이 임직원들과 함께 찾아와 감사의 뜻을 전했고, 저축의 날에는 국민포장을 받았다. 영화 배우 강혜정, 탤런트 박상면, 축구 선수 박주영은 영철버거의 단골이다. 대기업 이사들도 이따금씩 찾아와 영철버거를 맛본다. 그는 강연도 나간다.

2004년 봄에 이영철은 허리 수술을 받았다. 막노동을 하며 다친 부상이 재발하여 등뼈가 심하게 굽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물리 치료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가게를 한동안 비워야 하기 때문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 가게를 비우는 것은 문제 될 게 없지만, 그게 자칫 '돈 좀 벌었다고 가게에 안 나온다'는 인상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영철은 "난 고대생에게 완전히 발목 잡혔다"며 웃는다. 고대 앞에서는 영철버거 가격을 올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랬다가는 학생들의 성토를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최근 영철버거는 다시 자리를 옮기려고 한다. 가게가 들어선 건물이 곧 철거되기 때문이다. 이사를 가도 근처를 벗어나지 않겠다고 한다.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열심히 배웠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모르는 게 있으면 열심히 물어보았고, 인터넷 사용법도 배웠다. 하지만 역시 인생 선배는 이영철이다. 그는 학생들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섣불리 열매를 따려는 것을 경계한다.

"씨앗을 뿌려서 물을 주고 알뜰하게 가꿔서 열매를 따려고 해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대박만을 바랍니다. 씨를 뿌리고 바로 열매를 따려고 합니다. 그러니 마음이 조급해지고, 어려움과 시련이 많아집니다. 인생은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저를 보십시오. 저 같은 사람도 그렇게 살았더니 이렇게 자랑할 게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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