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도 공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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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452회 작성일 11-04-3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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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하는 한자는 ‘덕(德)’ 입니다. 이 한자는 작은 걸음(步)을 뜻하는 ‘척(彳)’과 德의 고자인 ‘덕(悳)’으로 이루어진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모양새가 마치 술 주(酒)와 비슷하지요. 주(酒)의 고자는 유(酉)가 맞습니다. 물 수(水)가 부수(部首)로 쓰일 때 삼수변(氵)으로 쓰이죠. 그런 것처럼 주(酒)를 읽을 때처럼 고자인 덕(悳) 자와 척(彳)이 합쳐진 것으로 ‘덕(德)’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步)를 보세요. 그러면 멈출 지(止)와 적을 소(少)가 합쳐진 모양이지요. 따라서 해석하면 ‘작은 걸음’이 됩니다.
한자는 참 재밌습니다. 허무맹랑한 게 없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제가 아는 100명의 경영자(CEO)에게 가장 좋아하는 한자를 하나만 답하라고 전화로 혹은 만나서 인터뷰 형식으로 물어봤습니다. 60% 이상이 한결같이 ‘덕(德)’이란 한자를 가장 좋아한다고 답하더군요. 왜 그런 건가요?
이게 몹시 궁금했습니다. 궁리(窮理)한 결과부터 먼저 말하겠습니다.
“덕(德)이란 곧 도(道)와 연결되는,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덕을 제대로 알면 경영자에게 성공의 길이 보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정리가 되더군요. 요컨대 도덕(道德)이 그 수순이 아니었습니다. 수순은 덕도(德道)가 바르고 맞는 것이지요.
옛날 <천자문>을 보시죠. 그 중에는 이런 명구가 나옵니다. 다음은 소설가 김성동의 <金聖東 千字文>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덕건(德建)이면 명립(名立)하고 형단(形端)이면 표정(表正)하니라.”(66쪽, <김성동 천자문>, 김성동 쓰고 지음, 청년사 펴냄)
‘덕이 세워지면 이름이 서게 되고, 몸매가 깔끔해야 겉모습이 똑바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책에 자세히 설명하길, “덕(德)이란 알맹이를 말하고 명(名)이란 그 알맹이를 나타내는 이름이니, 속이 알차면 이름은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것이 ‘덕건명립(德建命立)’ 임. ‘형단표정(形端表正)’은 <예기(禮記)>의 겉모습이 똑바르면 그림자 또한 똑바르다(形正則, 影必端)를 다시 쓴 것임”이라고 풀이를 달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도덕이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가 이런 명언을 했더군요.
“나는 단지 도덕적인 것은 행한 후에 느낌이 좋고 비도덕적인 것은 행한 후에 느낌이 나쁘다고 알고 있다.”
이렇듯 헤밍웨이는 느낌을 가지고서 판단(도덕적인 것과 비도덕적인 것)을 했다고 합니다. 느낌은 주관적인 영역이지요. 결코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도(道)나 덕(德)은 보통사람의 눈에는 형이상학적, 즉 한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성인의 세계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소설가 성석제의 산문집인 <즐겁게 춤을 추다가>에는 ‘밤의 공자’라는 에세이가 나오는데 참 재밌습니다. 그대로 소개합니다.
공자가 사는 마을 빨래터에 아낙네들이 나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때 공자의 부인이 빨랫감을 안고 나타났다. 한창 수다를 떨고 있던 아낙네들 가운데 하나가 공자의 부인에게 말했다.
“아 그래 부인께선 요새 무슨 재미로 사세요? 사람 사는 재미는 애 낳고 키우고 아웅다웅 싸워가면서 정도 들고 하는 게 아니겠수. 공자님하고 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기는 해요?”
공자의 부인은 모른 체하며 계속 빨래만 했다. 곁에 있던 아낙네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덕이 그렇게 높으면 뭘 하나, 학문이 그렇게 높으면 뭘 하나, 제자가 그렇게 많으면 뭘 하나, 사람 사는 재미는, 재미는 그저… 그러거나 말거나 빨래를 마친 공자의 부인은 빨래를 챙겨 돌아서며 혼잣말처럼 한마디 했다.
<밤에도 공잔가?>(135~136쪽, 성석제 지음, 강 펴냄)
그렇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남의 말을 하길 좋아하지요. 부부관계는 부부만이 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밤의 공자’라는 에세이는 노자가 말한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의 뜻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마을 빨래터에 아낙네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수다를 떨었던 것이죠. 반면 공자의 부인은 알고 있지요. 그렇지만 모른 체하죠. 그러다가 혼잣말처럼 “밤에도 공잔가?” 했던 것이죠.
이제, 경영의 세계로 한자 덕(德)을 해석하고자 합니다. 앞서 작은 걸음(步)을 뜻하는 ‘척(彳)’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먼 곳(목표, 덕)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작은 걸음으로 ‘척(彳)’부터 시작해야 되지요. 그 다음에는 발에서, 종아리로 퍼지고, 넓적다리에서 내(一) 마음(心)에 고루(十) 근육이 되어 번지고 힘으로 되는지를 살펴(目)야죠.
소설 <삼국지>를 읽어 보셨지요. 덕(德)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조조도 아니고, 손권도 아니지요. 오직 유비가 그런 인물이지요.
하지만 독자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답답한 인물이지요. 융통성이 없는 인물이지요. 게다가 바보처럼 보이지요. 울보에다 심지어는 쪼다라고 볼 수도 있는 인물의 성격을 죄다 갖고 있는데 더 훌륭하고 능력 있어 보이는, 관우와 장비는 물론이고, 똑똑한 제갈공명, 용맹한 조운 등이 진심으로 유비를 지도자로 따르지 않습니까? 이른바 유비의 성공은 덕에서 출발한 것이고, 리더십의 요체는 덕이 된 셈이죠.
대다수의 직장인들도 유비 같은 CEO를 제일로 바라고 원하지요. 또 제가 조사한 것처럼 60% 이상의 CEO가 한결같이 유비를 닮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라고 원하지만 아직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아쉬워하는 것이고 결핍욕구로 갖고 있는 것이죠.
덕이라는 여행의 시작이 어쩌면 당신의 비즈니스에 있어서 걸음마가 되고 길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덕(德)은 적선(積善)하는 마음이 출발이고, 복(福)을 주인으로 부리는 마음이고, 운(運)을 가져다주는 마음으로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바보라서, 울보라서, 쪼다라서…. 내 사업이 안 된다고 보지 마세요. 아직 때를 못 만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옆에 왜 아무도 없습니까? 덕(德)이 부족해서죠. 없어서죠. 당신이 무심히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무심(無心)은 말 그대로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덕(德)이란 한자에 마음 심(心)이 들어있는 이유입니다. 유심(有心)하면 어둠속에서도 길이 보이게 되지요. 그런 겁니다.
유비가 왜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했을까요? ‘성공은 지고 밑져라, 에 길이 있다’는 것을 헤밍웨이처럼 본능으로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요.
보(步)를 보세요. 그러면 멈출 지(止)와 적을 소(少)가 합쳐진 모양이지요. 따라서 해석하면 ‘작은 걸음’이 됩니다.
한자는 참 재밌습니다. 허무맹랑한 게 없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제가 아는 100명의 경영자(CEO)에게 가장 좋아하는 한자를 하나만 답하라고 전화로 혹은 만나서 인터뷰 형식으로 물어봤습니다. 60% 이상이 한결같이 ‘덕(德)’이란 한자를 가장 좋아한다고 답하더군요. 왜 그런 건가요?
이게 몹시 궁금했습니다. 궁리(窮理)한 결과부터 먼저 말하겠습니다.
“덕(德)이란 곧 도(道)와 연결되는,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덕을 제대로 알면 경영자에게 성공의 길이 보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정리가 되더군요. 요컨대 도덕(道德)이 그 수순이 아니었습니다. 수순은 덕도(德道)가 바르고 맞는 것이지요.
옛날 <천자문>을 보시죠. 그 중에는 이런 명구가 나옵니다. 다음은 소설가 김성동의 <金聖東 千字文>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덕건(德建)이면 명립(名立)하고 형단(形端)이면 표정(表正)하니라.”(66쪽, <김성동 천자문>, 김성동 쓰고 지음, 청년사 펴냄)
‘덕이 세워지면 이름이 서게 되고, 몸매가 깔끔해야 겉모습이 똑바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책에 자세히 설명하길, “덕(德)이란 알맹이를 말하고 명(名)이란 그 알맹이를 나타내는 이름이니, 속이 알차면 이름은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것이 ‘덕건명립(德建命立)’ 임. ‘형단표정(形端表正)’은 <예기(禮記)>의 겉모습이 똑바르면 그림자 또한 똑바르다(形正則, 影必端)를 다시 쓴 것임”이라고 풀이를 달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도덕이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가 이런 명언을 했더군요.
“나는 단지 도덕적인 것은 행한 후에 느낌이 좋고 비도덕적인 것은 행한 후에 느낌이 나쁘다고 알고 있다.”
이렇듯 헤밍웨이는 느낌을 가지고서 판단(도덕적인 것과 비도덕적인 것)을 했다고 합니다. 느낌은 주관적인 영역이지요. 결코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도(道)나 덕(德)은 보통사람의 눈에는 형이상학적, 즉 한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성인의 세계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소설가 성석제의 산문집인 <즐겁게 춤을 추다가>에는 ‘밤의 공자’라는 에세이가 나오는데 참 재밌습니다. 그대로 소개합니다.
공자가 사는 마을 빨래터에 아낙네들이 나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때 공자의 부인이 빨랫감을 안고 나타났다. 한창 수다를 떨고 있던 아낙네들 가운데 하나가 공자의 부인에게 말했다.
“아 그래 부인께선 요새 무슨 재미로 사세요? 사람 사는 재미는 애 낳고 키우고 아웅다웅 싸워가면서 정도 들고 하는 게 아니겠수. 공자님하고 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기는 해요?”
공자의 부인은 모른 체하며 계속 빨래만 했다. 곁에 있던 아낙네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덕이 그렇게 높으면 뭘 하나, 학문이 그렇게 높으면 뭘 하나, 제자가 그렇게 많으면 뭘 하나, 사람 사는 재미는, 재미는 그저… 그러거나 말거나 빨래를 마친 공자의 부인은 빨래를 챙겨 돌아서며 혼잣말처럼 한마디 했다.
<밤에도 공잔가?>(135~136쪽, 성석제 지음, 강 펴냄)
그렇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남의 말을 하길 좋아하지요. 부부관계는 부부만이 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밤의 공자’라는 에세이는 노자가 말한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의 뜻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마을 빨래터에 아낙네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수다를 떨었던 것이죠. 반면 공자의 부인은 알고 있지요. 그렇지만 모른 체하죠. 그러다가 혼잣말처럼 “밤에도 공잔가?” 했던 것이죠.
이제, 경영의 세계로 한자 덕(德)을 해석하고자 합니다. 앞서 작은 걸음(步)을 뜻하는 ‘척(彳)’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먼 곳(목표, 덕)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작은 걸음으로 ‘척(彳)’부터 시작해야 되지요. 그 다음에는 발에서, 종아리로 퍼지고, 넓적다리에서 내(一) 마음(心)에 고루(十) 근육이 되어 번지고 힘으로 되는지를 살펴(目)야죠.
소설 <삼국지>를 읽어 보셨지요. 덕(德)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조조도 아니고, 손권도 아니지요. 오직 유비가 그런 인물이지요.
하지만 독자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답답한 인물이지요. 융통성이 없는 인물이지요. 게다가 바보처럼 보이지요. 울보에다 심지어는 쪼다라고 볼 수도 있는 인물의 성격을 죄다 갖고 있는데 더 훌륭하고 능력 있어 보이는, 관우와 장비는 물론이고, 똑똑한 제갈공명, 용맹한 조운 등이 진심으로 유비를 지도자로 따르지 않습니까? 이른바 유비의 성공은 덕에서 출발한 것이고, 리더십의 요체는 덕이 된 셈이죠.
대다수의 직장인들도 유비 같은 CEO를 제일로 바라고 원하지요. 또 제가 조사한 것처럼 60% 이상의 CEO가 한결같이 유비를 닮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라고 원하지만 아직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아쉬워하는 것이고 결핍욕구로 갖고 있는 것이죠.
덕이라는 여행의 시작이 어쩌면 당신의 비즈니스에 있어서 걸음마가 되고 길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덕(德)은 적선(積善)하는 마음이 출발이고, 복(福)을 주인으로 부리는 마음이고, 운(運)을 가져다주는 마음으로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바보라서, 울보라서, 쪼다라서…. 내 사업이 안 된다고 보지 마세요. 아직 때를 못 만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옆에 왜 아무도 없습니까? 덕(德)이 부족해서죠. 없어서죠. 당신이 무심히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무심(無心)은 말 그대로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덕(德)이란 한자에 마음 심(心)이 들어있는 이유입니다. 유심(有心)하면 어둠속에서도 길이 보이게 되지요. 그런 겁니다.
유비가 왜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했을까요? ‘성공은 지고 밑져라, 에 길이 있다’는 것을 헤밍웨이처럼 본능으로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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