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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은 소유보다 점유 개념에 가까워야 - 세계 미술 시장에서 작품 값을 천정부지로 올린 장본인 백만장자 사이토 료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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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179회 작성일 12-06-04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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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대한 엽기적 사랑을 말할 때 일본인 백만장자 사이토 료에이(齊藤了英·1916~1996년)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미술품 구매 시장에서 보여준 상식을 벗어난 씀씀이와 독특한 미술 사랑법으로 미술계를 몇 번이나 들쑤셔 놓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그를 세계 미술 시장에서 작품 값을 천정부지로 올린 장본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보여준 비뚤어진 미술 소유욕은 소장가의 도덕성을 환기시키는 사례로 자주 일컬어지고 있다. 사이토는 일본 굴지의 제지회사 다이쇼와제지(大昭和製紙)의 회장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였다. 그는 1990년 5월 뉴욕에서 연이어 열린 미술 경매에서
‘돈키호테’ 같은 유명 미술품을 구매해 순식간에 해외 뉴스를 독점했다. 당시 그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을 8250만달러에 구매했다(그림 ➊). 이 가격은 추정가를 두 배 이상 뛰어넘는 기록적인 낙찰가로 당시 세계 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하는 자세의 가셰 박사는 호소력 있는 붓터치와 멜랑콜리한 색감 등 작품성과 이야깃거리를 두루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술 시장에서 거래될 때마다 가격이 수직 상승했다. 1897년 최초로 미술 시장에 명함을 내밀 때에는 단돈 58달러 정도였지만, 1910년 다시 시장에 나왔을 때는 2700달러로 가격이 크게 올랐다. 고흐에 대한 신화가 쌓일수록 가격은 올랐는데 1938년에는 5만3000달러에 팔렸고, 급기야 199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8250만달러라는 기록적인 가격표를 붙이게 됐다.
8250만달러 낙찰가에 ‘미친 가격’ 논란
1990년 5월 15일 밤 7시 45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불붙은 무한 가격 경쟁이 최종적으로 일본인의 승리로 막을 내리자 경매장에는 순간적으로 적막이 흘렀다. 미쳐버린 그림 값에 사람들이 잠시 말문을 잃어버린 것이다. 당시 경매 상황을 중계하던 텔레비전 캐스터는 ‘크레이지 재패니스’를 연달아 외쳤다고 한다. 앞서 고흐 작품의 최고 경매가는 1987년 소더비 경매에서 ‘아이리스’가 기록한 5890만달러였는데, 사이토는 종전 기록을 크게 눌러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이토는 이틀 후에 열린 소더비 경매장에서도 또다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소더비 경매에서 르누아르의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그림 ➋)’를 갖기 위해 무려 7810만달러를 불렀고, 로댕의 청동 조각 ‘칼레의 시민’을 위해서도 429만달러라는 거금을 썼다. 미술품 서너 점 사자고 단 이틀 만에 약 1억6500만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써버린 것이다.
엄청난 재력으로 세계 미술 시장을 뒤흔들던 사이토는 이듬해인 1991년에 또다시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번에는 경악이나 분노라는 말이 더 정확할 성싶다. ‘고흐와 르누아르의 두 그림을 자기가 죽거든 관에 넣어 함께 화장하고 싶다’는 그의 유언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사이토의 이 같은 엽기적인 발언은 세계인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미술품을 사는 것이 법적으로 작품의 소유권을 갖는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작품을 파괴할 권리까지 갖는 것은 아니다. 명작의 반열에 오른 미술품은 세계 문화유산의 성격도 지닌다는 것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을 아는 모든 세계 애호가들의 사랑과 기억을 파괴할 권리가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 사실 미술품 취득은 소유보다는 점유라는 개념이 더 어울릴 듯싶다. 소장자는 작품을 몇 년이고 잘 보관하다가 세상에 온전히 되돌려 놓아야 할 의무를 지니기 때문이다.
‘고흐의 작품을 자신과 함께 화장시키겠다’는 사이토의 망언에 대한 비난 여론이 전 세계에서 끓어올랐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사이토는 1991년 5월 14일 측근을 통해 발표한 성명서에서 “중국에는 진시황의 점토 병마와 명 13릉이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반 고흐와 르누아르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다시 말해 단지 그 작품들을 영원히 간직하고픈 소원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서둘러 해명했다.
사이토는 자신이 소장한 작품에 대한 세계인의 사랑을 확인했지만 자신의 소장품을 결코 세상과 함께 소유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고흐와 르누아르를 구매하자마자 자신만의 특별한 보관실에 처박아 버렸다. 처음에는 ‘고흐와 르누아르를 일본에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써야 한다’고 말했지만, 막상 일본인들에게 자기 작품을 보여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혼자만 소유하는 것이 얼마나 그를 즐겁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이런 폐쇄적인 애정 덕분에 그가 소유한 명작은 세상과 소통할 기회를 박탈당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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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은 소유보다 점유 개념에 가까워야
빛이 강하면 어둠도 깊은 법. 명화를 둘러싸고 보여준 사이토의 무모하고 속 좁은 행각은 곧이어 닥칠 쓸쓸한 개인사적 종말과 명확히 비교된다. 사실 그의 연이은 몰락은 일본 경제의 추락만큼 드라마틱해 보인다. 1993년 골프장 인허가 과정에서 자민당 고위당직자와 공모해 시즈오카현 지사에게 1억엔의 뇌물을 증여한 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가 불법적으로 추진하던 골프장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고흐의 이름인 ‘빈센트(Vincent Golf Club Sendai)’로 알려져 실소를 자아냈다. 일본 경제의 추락과 함께 그가 벌이던 부동산 개발과 그의 회사들도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 그는 1996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사이토의 사망 이후 경영난에 빠진 그의 회사는 결국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과 르누아르의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각각 4400만달러, 5000만달러라는 헐값에 급히 매각한다. 고흐의 경우 원금 대비 절반, 르누아르는 3분의 2밖에 건지지 못한 것이다. 그의 무모한 투자 때문에 그의 회사는 상당한 손해를 입었다. 그러나 일본 6대 도시의 부동산 가격이 최고점에 비해 80% 가까이 추락한 것에 비교한다면, 그림 투자를 통해 얻은 손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은 사이토의 망언 덕분에 전 세계인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유명 그림이 됐다.
사실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매각된 후에도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행여나 이 그림이 사이토와 함께 한 줌의 재로 사라진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아마도 이 그림이 세상에 다시 나온다면 상당한 뉴스거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일본인 사업가가 보여준 괴물 같은 미술 소유욕은 여러모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원조 기업인들의 미술 사랑과 비교된다. 화폐경제와 자본주의의 씨를 뿌린 현대 기업인의 선조들은 요즘 사람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미술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경제인의 미덕이라 할 자린고비 정신을 망각하지 않았다. 이들이 보여준 순수하고 담백한 미술 사랑은 벼락부자들의 쇼케이스로 변질되는 세계 미술 시장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뒷맛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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