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의 원조는 아트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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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123회 작성일 12-06-04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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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을 왁자지껄한 장터에서 산다고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까? 자그마한 상점과 간이매점이 즐비한 시장통에 미술품이 잔뜩 걸려 있고 그곳을 둘러보다가 집에 걸 만한 그림 한 점을 사서 돌아온다. 물론 구경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힘들게 발품 팔 것 없이 한곳에서 수많은 미술 작품을 실컷 눈요기한 것으로 대만족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이 대목에서 ‘아트페어(art fair)’의 한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아트페어는 여러 화랑들이 연합해 대형 전시장에서 합동으로 전시하면서 작품을 파는 것을 말한다. 요즘 들어 국내에서도 미술품 거래나 흥행을 위한 중요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트페어’라고 부르면 좀 멋지게 들리지만 있는 그대로 번역하면 ‘미술장터’다. 실제로 아트페어에 가보면 시골 장터처럼 시끌벅적하다. 우아한 미술품을 장돌뱅이에게 사는 것을 못마땅해하거나 어수선한 장터 속에서 제대로 된 미술 감상이 불가능하다고 불평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아트페어를 아주 좋아한다. 수백 개의 화랑이 한곳에 모여서 시골 장날 같은 활기를 보여 주는 모습이 신선해 보이기 때문이다. 또 아트페어의 한 모퉁이를 거닐다 보면 수백 년 전의 중세 미술시장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환영에 잠길 수도 있다.
사실 미술시장의 원조는 아트페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국내 아트페어의 역사는 길어야 20년을 넘지 않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아트페어도 그 역사가 50~60년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아트페어가 20세기 문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술시장의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오늘날의 아트페어의 모습이 이미 수백 년 전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백 개 화랑 모여 벌판에 장터 꾸려
역사상 최초의 전문 미술시장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북유럽으로 떠나야 한다. 벨기에 앤트워프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바로 그곳인데, 이 성당은 우리에게 결코 낯선 곳은 아니다(그림 ➊). 앤트워프 대성당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만화영화 ‘플랜더스의 개’의 주인공인 소년 네로가 마지막까지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대작 ‘십자가에서 내리심’이 걸려 있는 그 성당이다.
앤트워프 대성당은 원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지어졌다. 그러다가 점차 확장돼 앤트워프를 대표하는 주교좌 대성당이 된다. 1352년부터 지어졌는데 백 년이 지난 후에도 건축은 계속됐다. 결국 성당 측은 늘어나는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1460년부터 남쪽 벌판에 시장을 열고 거기서 얻은 임대료를 건축비에 보탠다. 이때 만들어진 시장이 미술품 거래를 위한 전문시장이 된다.
앤트워프 성모 마리아 시장은 사방으로 상점이 들어선 사각형 건물이었다(그림 ➋). 1460년에 만들어져 1560년까지 거의 백 년 동안 유지되는데 시장 운영과 관련된 문헌 자료가 현재까지 잘 전해져 온다. 특히 허물어지기 직전 20년 동안의 운영에 관련해서는 임대한 작가와 미술 중개상의 이름까지 세세히 전해 오고 있다.
500여년 전에 미술품과 목공예품을 파는 70여개의 가게가 한곳에 모인 시장이 있었으니 놀라울 뿐이다. 이 시장을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미술시장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의 주장이 허풍은 아닌 듯하다. 사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탈리아에서도 미술품을 거래하던 상점이 있었지만 미술품만을 전문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여러 진귀한 상품을 다루는 종합 무역상사에서 부분적으로 거래됐던 것 같다. 앤트워프 말고도 인근 브루게(Brugge)에도 미술시장이 있었는데 참여한 화가나 미술 중개상 수는 11명에 불과했다.
성모 마리아 미술시장은 앤트워프의 다른 시장처럼 기독교 축일에 맞춰 열리던 연시(年市)였다. 오순절과 성 바보(St. Bavo) 축일에 맞춰 연간 2회 열렸는데, 일단 장이 서면 6주씩 계속됐다. 규모뿐 아니라 한시적으로 열렸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아트페어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화랑 임대료 50년 새 5배 오를 만큼 호황
앤트워프 성모 마리아 미술시장도 오늘날의 아트페어처럼 참가하는 화랑들이 내는 임대료로 운영됐다. 1460년에는 성당이 올린 임대수익이 연간 20파운드(Brabant Pound)로 알려졌다. 미술 장사가 아주 잘 이뤄졌는지 임대수익은 점차 올라 1485년에는 40파운드, 1510년에는 100파운드까지 오른다(그림 ➌). 1540년부터는 아예 상시적으로 문을 여는 정기시장으로 전환하는데 이때부터 임대수익은 200파운드까지 급상승한다. 성당 측은 이 시장을 운영하던 100년 동안 수익을 1000%까지 끌어올렸으니 아주 성공한 사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앤트워프 성모 마리아 미술시장에서 거래한 미술품에 대한 기록도 간간이 전해 온다. 1524년 아베르보드 수도원(Averbode Abbey)의 원장은 수도원 성당에 봉헌할 조각상을 이 시장에서 구매한다. 수도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524년 성 바보 축일(10월 6일)에 맞춰 8피트짜리 제단화를 앤트워프 성모 마리아 시장에서 조각가 라우레이스 겔더만에게 구매했다. 구매금액은 21파운드였다.” 한편 성모 마리아 시장에서는 중고 미술품도 거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미약하나마 오늘날의 2차 시장 역할도 했던 것 같다. 아베르보드 수도원은 1518년 성모 마리아 시장에서 얀 데 몰더(Jan de Molder)가 조각한 조각상을 사서 성 요한 예배당에 봉헌하고 그 자리에 있던 오래된 조각품을 이 시장에 가져다 팔아 버린다.
대체로 앤트워프 미술시장에 참여한 화가나 조각가들은 이름만 전해오는 예가 많다. 반대로 당시 앤트워프에서 활동한 대가들의 이름은 여기서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미술사 책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브루겔(Bruegel)이나 아르트센(Aertsen) 같은 작가들의 이름은 시장의 임대인 명단에 올라와 있지 않다. 진정한 대가들은 이런 미술시장에 기웃거리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들의 작품은 이미 다른 곳에서 잘 팔렸기 때문에 굳이 장터에 나가 작품을 팔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쨌든 대가들의 작품이 미술장터에 그리 많이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의 미술시장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오늘날의 아트페어에 걸린 수천 점의 작품 중에서도 먼 훗날 기억될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아트페어에서 많은 작가들을 한눈에 보면서 미술시장의 흐름을 읽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될 진정한 대가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트페어뿐 아니라 미술에 대한 본질적 고민과 함께 미술계 이곳저곳을 계속 쑤시고 다녀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아트페어라는 대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작가들도 크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 평가는 그리 쉽고 편하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우리들이 기억하는 대가들은 시장에 순응하기보다는 때로는 시장과 부딪치면서 시장의 관성과 타성을 변모시켜 나갔다. 번영하는 미술시장 속에서 괴짜 미술가들이 벌이는 좌충우돌의 역사도 앞으로 필자의 글에 중요한 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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