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탄생 신화 간직한 세인트 어거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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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999회 작성일 10-05-13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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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올랜도) 최정희-김명곤 기자 = 미국의 오일 공급을 좌지우지하던 록펠러. 그러나 그의 사업 판을 실제로 짠 사람은 파트너 핸리 플래글러(Henry Flagler)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1878년 플래글러가 휴가차 플로리다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그 역시 록펠러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이 때 그가 들른곳은 잭슨빌. 그는 이 지역에 리조트시를 건설하리라 단번에 마음먹는다.
플래글러가 5년 뒤 플로리다를 다시 방문했을때 그는 잭슨빌 아래쪽 세인트 어거스틴까지 둘러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잭슨빌보다는 세인 어거스틴에 더 반해버리고 만다. 이 도시는 당시 방문객들에게 편한 곳은 아니었다. 2세기 전에 지어진 집들과 이끼 낀 건물 그리고 해안가에 스산한 전투성만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래글러는 그의 북쪽 부자친구들을 위해 최신식 리조트를 짓기로 결정하고, 지금은 플래글러 대학의 기숙사로 쓰여지고 있는 540개의 방이 있는 폰스 드 리온(Ponce de Leon) 호텔을 지었다. 그리고 이곳에 방문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잭슨빌과 세인트 어거스틴 그리고 헬리팩스(Helifax) 철도를 사게된다.
그는 이후 이 지역뿐 아니라 오몬드비치를 거쳐 팜비치, 마이애미 그리고 키웨스트에 이르기까지 그의 리조트 제국을 확장시킨다. 그러나 그의 열정이 가장 크게 들어있는 곳은 역시 세인트 어거스틴.
태고의 신화, 탐험가들, 식민지 그리고 기독교와 인디언, 전투의 역사들을 바닷바람에 빼앗기지 않은 채 끌어 안고 있던 세인 어거스틴은 플래글러가 뿌려놓은 금빛 가루를 입고 플로리다 역사의 메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세인트 어거스틴이 플래글러에 의해 빛을 보기 이전의 역사로 더듬어 올라가본다.
폰스 드 리온 '플로리다' 최초로 명명
인디언만이 살고 있던 플로리다에 처음 상륙한 유럽인은 스페인 장교 '폰스 드 리온(Ponce de Leon)'. 미 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의 2차여행에 참여한 적이 있
던 그는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의 샘(Fountain of Youth)' 을 찾으려 항해하다 그 샘이 있다고 믿어지는 곳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바로 세인트 어거스틴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폰스가 도착한 곳은 세인트 어거스틴이 아니라 그보다 남쪽인 세인 죤스 강 입구와 세인트 어거스틴 사이 어느 지점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플로리다라는 이름은 폰스가 지은 것에 동의한다.
1513년 그가 이 지역에 상륙했을 때 짙푸른 숲을 배경으로 각종 꽃들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이 땅을 Pascua Florida(Feast of the Flowers·꽃들의 제전)'라 이름 지었는데, 제전 이라는 용어를 붙인 것은 그날이 마침 부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음의 샘'을 찾으러 들어온 폰스는 샘 대신 적개심에 가득찬 인디언들만 맞닥뜨리고 바다로 도망친다.
스페인으로 돌아간 그는 한참 열강의 식민지화에 몰두해 있던 왕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백인의 하나님' 을 이들에게도 전파한다면 좋은 관계가 맺어 질 것이라 귀뜸한다. 그의 이같은 아이디어는 결국 열강들의 식민지화 전략에 기독교가 선봉을 서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플로리다 주위 카리비안 제도 식민지화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왕은 전초기지를 쌓기 위해 배 두척에 200여명의 식민 개척자들을 플로리다로 보낸다.
다시 플로리다 해안지역에 돌아온 폰스는 정착지를 찾다 당시 플로리다 남부에 자리잡고 있던 전투적 인디언 칼루사(Calusa) 의 공격을 받고 간신히 푸에르토리코로 도망, 결국 인디언에게 입은 상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이후 스페인 왕의 허락하에 금과 부를 찾으러 플로리다로 향한 행렬은 계속된다.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도착한 개척자 나바에즈 일행은 파선으로 거의 몰살됐다. 그 뒤를 이은 '헤르난도 드 소토' 일행 역시 탬파 베이 지역에 도착, 금이 있다는 북쪽을 향해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리고 테네시까지 올라갔으나 기력이 탕진된 채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또 멕시코지역을 정복하고 있던 개척자 중엔 지금의 펜사콜라까지 전진해 정착지를 만든 '드 루나' 일행도 있었으나 이들도 결국 나눠먹기를 거부하는 인디언으로 인해 자리를 뜨고 말았다.
이로써 폰스가 플로리다에 첫 상륙한 이후 50여년동안 식민개척자들은 금은보화를 보지도 못하고 정착도 못한 채 대부분 죽고 말았다.
결국 멕시코와 남미 정복 에 빠져있던 스페인왕이 플로리다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을 즈음, 이를 틈타 스페인의 번창을 시기하고 있던 프랑스가 세인트 죤스 강 가에 도착해 정착지를 만들어 버린다.
이에 다시 자극을 받은 스페인은 강력하게 무장한 페드로 메넨데즈(Pedro Menendez) 일행을 다시 보낸다. 1565년 8월 5백여명의 병사와 200명의 배꾼 그리고 100명의 시민을 이끈 메넨데즈 일행은 1565년 8월 플로리다 동부 해안에 도착한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세인트 어거스틴.
병사들은 곧장 프랑스 정착지를 치러 가고 시민들은 남아 정착지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 날이 마침 어거스틴 성자 축제날이라 그 곳 정착지 이름을 세인트 어거스틴이라 붙이게 된다.
결국 지금의 세인트 어거스틴 을 처음으로 밟은 사람은 '젊음의 샘' 을 찾기 위해 플로리다에 처음 도착한 '폰스 드 리온' 이 아니라 50년 이후에 온 '페드로 메넨데즈'였다.
플로리다의 맹주 스페인
이후 세인트 어거스틴은 스페인에서 계속 유입된 인구로 집이 들어서고 길이 닦여지기 시작, 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스페인이 세인트 어거스틴을 세운지 40년 뒤인 1607년에야 미 북동부로 식민지 개척에 진출한 영국이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을 세우고, 1620년 메사추세츠에 플리모스를 세웠으니, 플로리다의 세인트 어거스틴은 단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로 불려지기에 충분했다.
한편 스페인이 세인트 어거스틴을 기점으로 땅을 계속 확보해 나가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역시 인디언이었다.
스페인은 이 때부터 또다시 기독교 선교사들을 이용한다. 즉 선교사들이 먼저 인디언과 접촉, 그들을 교화시키는 가운데 친해지면 자연 인디언 지역을 드나들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욱 바라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식민지 쟁탈에 혈안이 되어 있는 다른 유럽 열강들이 자신들이 먼저 점령한 땅을 넘볼 때 인디언들이 자신들의 편이 되어 함께 물리치는 것이었다.
1600년부터 계속된 스페인 기독교 선교단체 유입으로 쿠바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비숍은 플로리다뿐 아니라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선교지까지 지휘하게 된다. 이에 플로리다에서도 선교사 수가 계속 늘어나며 동부 세인트 어거스틴부터 서부 팬핸들 지역까지 선교지 부락이 이어진다.
결국 스페인에 우호적이 된 인디언들 덕분에 서부 멕시코쪽으로 들어와 펜사콜라를 거쳐 다시 플로리다를 넘보려는 프랑스는 퇴치되고 펜사콜라도 제2의 스페인 정착지로 확실히 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협이 끝나자 이번에는 미 북동부에서부터 점차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오는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이 위협을 해왔다.
결국 스페인 정착자들은 1672년 세인 어거스틴에 거대한 전투지이자 방어성을 짓게 된다. 이것이 지금도 세인트 어거스틴에 어였하게 서있는 '카스틸로 드 상 마르코스(Castillo de San Marcos)' 성이다.
이 성은 육지나 바다로 부터 공격을 막기 위해 성벽 아래부분을 12피트나 두껍게 해 난공불락의 요새로 지어졌으며 또한 필요시에는 1,500여명이 두세달을 기거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건설됐다.
카스틸로 성은 이후 유럽 열강의 세력이 변화하면서 프랑스인, 스페인인 그리고 영국 본토로부터 독립한 미 동부 13개주의 독립혁명 지도자들을 감금하는 감옥으로도 쓰여지게 된다.
플로리다에도 인디언의 비참한 역사가
한편 영토 확장을 위해 선교사들을 먼저 풀어 인디언 득을 보고 있던 스페인은 부메랑을 맞는다.
영국이 세인트 어거스틴을 공격했으나 카스틸로성은 견고했고 그곳에 피난한 스페인 정착자들은 2달동안의 영국인들의 공격을 견디어 냈다. 그러자 영국은 인디언들을 이용해 공략하기 쉬운 서부쪽에서 부터 치고자 계획을 세운다. 더 강하고 더 부자였던 영국은 더 많은 물량공세로 결국 인디언들의 마음을 돌려놓기에 성공한다.
이제 영국인들은 인디언들과 함께 스페인 선교지 부락들을 차례로 공략해 나간다. 비무장 스페인 선교사들은 인디언과 영국병사들에 의해 무참히 쓸어져 갔다. 이들은 스페인이 정착한 펜사콜라까지도 공격해 시를 파괴시킨다.
이제 플로리다에서 스페인은 힘을 잃고 대신 영국이 거대한 힘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인디언들은 위협을 느끼고 영국에 등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다시 스페인과 함께 막아보고자 했으나 스페인은 거절한다. 결국 인디언들은 외부 세력들 사이에 끼어 방황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1763년 영국은 결국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빼았는데 성공한다. 이는 플로리다가 스페인의 영향에 놓인지 250년만의 일이었다.
이후 플로리다는 열강의 화해 조약으로 다시 스페인 손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스페인의 힘은 유럽에서 점점 약화되어 갔다. 또 영국에서 건너와 미 동북부에 자리잡고 살던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은 영국 본토의 과도한 세금 부과에 불만, 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13개주 미 합중국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그 합중국의 강력한 힘은 플로리다에서 인디언도 스페인도 모두 쓸어내기에 충분했다.
세인트 어거스틴, 플로리다 역사 관광지로
이후 플로리다 태동의 소용돌이와 열강다툼에서 벗어나 한동안 잠들어 있던 세인트 어거스틴은 백만장자 플래글러의 손길에 힘입어 휴향지겸 관광지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세인트 어거스틴은 구 스페인 정착지와 현대적 비치 리조트가 혼합돼 관광지와 휴향지로서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다.
'더 플라자(The Plaza)' 란 구역에 가면 18세기에 지어진 세인트 어거스틴 성당이 있는데 이곳에선 아직도 미사가 올려지고 있으며, 근처에는 과거 스페인 식민지 본부로 쓰이던 빌딩이 이 지역 정부청사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세인트 어거스틴에 가면 누구나 둘러보는 역사지(Historic Distric) 는 다운타운에 위치해 있는데 해안가에서 20분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에는 폰스가 찾아 헤매던 젊음의 샘 이 있는데 물론 신화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또 이 지역에는 일명 가장 오래된 집-가게-학교 등이 보존 돼 있다.
실제 '가장' 이라는 어휘를 붙이기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1700년대 지어진 동네를 둘러보면서 애써 이를 따지고자 하는 이들은 없다. 걸어서 2시간 가량이면 이 옛동네를 다 구경할 수 있으며, 말이 이끄는 마차나 트롤리(객차가 여러개 이어진 것)를 이용해 돌아볼 수 있다.
세인트 어거스틴에서 최고의 명물을 꼽으라면 두말할 필요없이 '카스틸로 드 상 마르코스(이하 카스틸로)' 성이다. 해안가에 위치한 이 성에서는 주말에 스페인 군복을 입은 모델 병사가 대포를 쏘며 300년 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곳에는 포탄방, 식품 저장소, 침실 등이 보존돼 있고, 영국 통치 시절때 감옥으로 사용됐던 흔적도 있다.
또 라잇너(Lightner)박물관도 지나쳐서는 안되는 명물. 1948년에 오픈한 이 박물관은 하비스(Hobbies) 잡지의 콜렉션들을 모아놓은 곳인데, 티파니 글래스에서부터 빅토리안 시대 고품까지 감상할 수 있다.
이 박물관은 미국에서 아마도 최고 잡동사니 박물관일 것이다. 이 박물관은 플래글러가 지었던 호텔을 개조한 것인데 골동품 가게들이 위치한 자리는 한 때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수영장이 있었던 자리로 지금도 발코니를 걸으면서 1세기전 부호들이 그곳에서 수영하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세인트 어거스틴에서 또 빠질 수 없는 구경거리가 있다면 메모리얼 장로교회의 건축물이다.
이는 플래글러가 자신의 딸 을 위해 지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세인트 어거스틴은 해안가에 접해있으나 비치는 없다. 그래서 비치에 가려면 북쪽 아니면 남쪽으로 가야 한다. 또 역사지 에서 다리를 건너 아나스타샤 섬에 가면 219계단으로 되어 있는 등대를 올라가 볼 수 있는데, 그곳에서는 등대지기와 가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섬에는 플로리다에서 가장 오래된 유흥공원 엘리게이터 팜(악어의 집) 이 있다. 사실 옛날에는 몇마리 악어를 케이지에 전시해 놓은 것 만으로도 북쪽 지방 관광객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으나 요즘은 몇백마리 악어와 더불어 하얀색 희귀 악어 전시, 악어급식쇼·레슬링쇼까지 베풀고 있다. 악어의 희귀성이 감소된 까닭도 있으나 디즈니나 시월드같은 메가 공원의 그늘을 벗어나 보려는 안간힘이기도 하다.
일단 세인트 어거스틴을 벗어나면 주위에 비치, 골프장, 리조트 등이 포진하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관광지에서 누릴 수 있는 휴식을 맘껏 취할 수 있다.
세인트 어거스틴을 떠나 비치가에 앉아 대서양을 바라보노라면 '젊음의 샘' 을 찾아 플로리다에 첫 발을 내 딛은 폰스와 스페인 탐험가들의 발자취가 아련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곳을 거점으로 시작된 열강의 세력 다툼에 이용돼 쓰러져 갔던 선교사들과 자신들의 땅을 잃고 방황했던 인디언들의 모습을 해안가 바람결에 시달리고 있는 해초 속에서 보는 듯 하다.
세인트 어거스틴을 방문하기전 웹사이트(www.oldcity.com)에 들어가 충분한 정보를 얻거나, 세인트 어거스틴 북쪽 카스틸로 성 부근에 있는 정보센터에 들러 관광 안내서등을 미리 참조한다면 더욱 알찬 관광을 할 수 있다.
(올랜도) 최정희-김명곤 기자 = 미국의 오일 공급을 좌지우지하던 록펠러. 그러나 그의 사업 판을 실제로 짠 사람은 파트너 핸리 플래글러(Henry Flagler)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1878년 플래글러가 휴가차 플로리다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그 역시 록펠러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이 때 그가 들른곳은 잭슨빌. 그는 이 지역에 리조트시를 건설하리라 단번에 마음먹는다.
플래글러는 그의 북쪽 부자친구들을 위해 최신식 리조트를 짓기로 결정하고, 지금은 플래글러 대학의 기숙사로 쓰여지고 있는 540개의 방이 있는 폰스 드 리온(Ponce de Leon) 호텔을 지었다. 그리고 이곳에 방문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잭슨빌과 세인트 어거스틴 그리고 헬리팩스(Helifax) 철도를 사게된다.
그는 이후 이 지역뿐 아니라 오몬드비치를 거쳐 팜비치, 마이애미 그리고 키웨스트에 이르기까지 그의 리조트 제국을 확장시킨다. 그러나 그의 열정이 가장 크게 들어있는 곳은 역시 세인트 어거스틴.
태고의 신화, 탐험가들, 식민지 그리고 기독교와 인디언, 전투의 역사들을 바닷바람에 빼앗기지 않은 채 끌어 안고 있던 세인 어거스틴은 플래글러가 뿌려놓은 금빛 가루를 입고 플로리다 역사의 메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세인트 어거스틴이 플래글러에 의해 빛을 보기 이전의 역사로 더듬어 올라가본다.
폰스 드 리온 '플로리다' 최초로 명명
인디언만이 살고 있던 플로리다에 처음 상륙한 유럽인은 스페인 장교 '폰스 드 리온(Ponce de Leon)'. 미 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의 2차여행에 참여한 적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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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폰스 드 리온 |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폰스가 도착한 곳은 세인트 어거스틴이 아니라 그보다 남쪽인 세인 죤스 강 입구와 세인트 어거스틴 사이 어느 지점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플로리다라는 이름은 폰스가 지은 것에 동의한다.
1513년 그가 이 지역에 상륙했을 때 짙푸른 숲을 배경으로 각종 꽃들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이 땅을 Pascua Florida(Feast of the Flowers·꽃들의 제전)'라 이름 지었는데, 제전 이라는 용어를 붙인 것은 그날이 마침 부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음의 샘'을 찾으러 들어온 폰스는 샘 대신 적개심에 가득찬 인디언들만 맞닥뜨리고 바다로 도망친다.
스페인으로 돌아간 그는 한참 열강의 식민지화에 몰두해 있던 왕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백인의 하나님' 을 이들에게도 전파한다면 좋은 관계가 맺어 질 것이라 귀뜸한다. 그의 이같은 아이디어는 결국 열강들의 식민지화 전략에 기독교가 선봉을 서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플로리다 주위 카리비안 제도 식민지화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왕은 전초기지를 쌓기 위해 배 두척에 200여명의 식민 개척자들을 플로리다로 보낸다.
다시 플로리다 해안지역에 돌아온 폰스는 정착지를 찾다 당시 플로리다 남부에 자리잡고 있던 전투적 인디언 칼루사(Calusa) 의 공격을 받고 간신히 푸에르토리코로 도망, 결국 인디언에게 입은 상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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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폰스 드 리온의 탐험경로 |
또 멕시코지역을 정복하고 있던 개척자 중엔 지금의 펜사콜라까지 전진해 정착지를 만든 '드 루나' 일행도 있었으나 이들도 결국 나눠먹기를 거부하는 인디언으로 인해 자리를 뜨고 말았다.
이로써 폰스가 플로리다에 첫 상륙한 이후 50여년동안 식민개척자들은 금은보화를 보지도 못하고 정착도 못한 채 대부분 죽고 말았다.
결국 멕시코와 남미 정복 에 빠져있던 스페인왕이 플로리다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을 즈음, 이를 틈타 스페인의 번창을 시기하고 있던 프랑스가 세인트 죤스 강 가에 도착해 정착지를 만들어 버린다.
이에 다시 자극을 받은 스페인은 강력하게 무장한 페드로 메넨데즈(Pedro Menendez) 일행을 다시 보낸다. 1565년 8월 5백여명의 병사와 200명의 배꾼 그리고 100명의 시민을 이끈 메넨데즈 일행은 1565년 8월 플로리다 동부 해안에 도착한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세인트 어거스틴.
병사들은 곧장 프랑스 정착지를 치러 가고 시민들은 남아 정착지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 날이 마침 어거스틴 성자 축제날이라 그 곳 정착지 이름을 세인트 어거스틴이라 붙이게 된다.
결국 지금의 세인트 어거스틴 을 처음으로 밟은 사람은 '젊음의 샘' 을 찾기 위해 플로리다에 처음 도착한 '폰스 드 리온' 이 아니라 50년 이후에 온 '페드로 메넨데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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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가장 먼저 시의 면모를 갖춘 '올드 시티' 동네 |
플로리다의 맹주 스페인
이후 세인트 어거스틴은 스페인에서 계속 유입된 인구로 집이 들어서고 길이 닦여지기 시작, 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스페인이 세인트 어거스틴을 세운지 40년 뒤인 1607년에야 미 북동부로 식민지 개척에 진출한 영국이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을 세우고, 1620년 메사추세츠에 플리모스를 세웠으니, 플로리다의 세인트 어거스틴은 단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로 불려지기에 충분했다.
한편 스페인이 세인트 어거스틴을 기점으로 땅을 계속 확보해 나가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역시 인디언이었다.
스페인은 이 때부터 또다시 기독교 선교사들을 이용한다. 즉 선교사들이 먼저 인디언과 접촉, 그들을 교화시키는 가운데 친해지면 자연 인디언 지역을 드나들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욱 바라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식민지 쟁탈에 혈안이 되어 있는 다른 유럽 열강들이 자신들이 먼저 점령한 땅을 넘볼 때 인디언들이 자신들의 편이 되어 함께 물리치는 것이었다.
1600년부터 계속된 스페인 기독교 선교단체 유입으로 쿠바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비숍은 플로리다뿐 아니라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선교지까지 지휘하게 된다. 이에 플로리다에서도 선교사 수가 계속 늘어나며 동부 세인트 어거스틴부터 서부 팬핸들 지역까지 선교지 부락이 이어진다.
결국 스페인에 우호적이 된 인디언들 덕분에 서부 멕시코쪽으로 들어와 펜사콜라를 거쳐 다시 플로리다를 넘보려는 프랑스는 퇴치되고 펜사콜라도 제2의 스페인 정착지로 확실히 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협이 끝나자 이번에는 미 북동부에서부터 점차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오는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이 위협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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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스틸로 드 상 마르코스'성 |
이 성은 육지나 바다로 부터 공격을 막기 위해 성벽 아래부분을 12피트나 두껍게 해 난공불락의 요새로 지어졌으며 또한 필요시에는 1,500여명이 두세달을 기거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건설됐다.
카스틸로 성은 이후 유럽 열강의 세력이 변화하면서 프랑스인, 스페인인 그리고 영국 본토로부터 독립한 미 동부 13개주의 독립혁명 지도자들을 감금하는 감옥으로도 쓰여지게 된다.
플로리다에도 인디언의 비참한 역사가
한편 영토 확장을 위해 선교사들을 먼저 풀어 인디언 득을 보고 있던 스페인은 부메랑을 맞는다.
영국이 세인트 어거스틴을 공격했으나 카스틸로성은 견고했고 그곳에 피난한 스페인 정착자들은 2달동안의 영국인들의 공격을 견디어 냈다. 그러자 영국은 인디언들을 이용해 공략하기 쉬운 서부쪽에서 부터 치고자 계획을 세운다. 더 강하고 더 부자였던 영국은 더 많은 물량공세로 결국 인디언들의 마음을 돌려놓기에 성공한다.
이제 영국인들은 인디언들과 함께 스페인 선교지 부락들을 차례로 공략해 나간다. 비무장 스페인 선교사들은 인디언과 영국병사들에 의해 무참히 쓸어져 갔다. 이들은 스페인이 정착한 펜사콜라까지도 공격해 시를 파괴시킨다.
이제 플로리다에서 스페인은 힘을 잃고 대신 영국이 거대한 힘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인디언들은 위협을 느끼고 영국에 등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다시 스페인과 함께 막아보고자 했으나 스페인은 거절한다. 결국 인디언들은 외부 세력들 사이에 끼어 방황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1763년 영국은 결국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빼았는데 성공한다. 이는 플로리다가 스페인의 영향에 놓인지 250년만의 일이었다.
이후 플로리다는 열강의 화해 조약으로 다시 스페인 손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스페인의 힘은 유럽에서 점점 약화되어 갔다. 또 영국에서 건너와 미 동북부에 자리잡고 살던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은 영국 본토의 과도한 세금 부과에 불만, 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13개주 미 합중국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그 합중국의 강력한 힘은 플로리다에서 인디언도 스페인도 모두 쓸어내기에 충분했다.
세인트 어거스틴, 플로리다 역사 관광지로
이후 플로리다 태동의 소용돌이와 열강다툼에서 벗어나 한동안 잠들어 있던 세인트 어거스틴은 백만장자 플래글러의 손길에 힘입어 휴향지겸 관광지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세인트 어거스틴은 구 스페인 정착지와 현대적 비치 리조트가 혼합돼 관광지와 휴향지로서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다.
'더 플라자(The Plaza)' 란 구역에 가면 18세기에 지어진 세인트 어거스틴 성당이 있는데 이곳에선 아직도 미사가 올려지고 있으며, 근처에는 과거 스페인 식민지 본부로 쓰이던 빌딩이 이 지역 정부청사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세인트 어거스틴에 가면 누구나 둘러보는 역사지(Historic Distric) 는 다운타운에 위치해 있는데 해안가에서 20분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에는 폰스가 찾아 헤매던 젊음의 샘 이 있는데 물론 신화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또 이 지역에는 일명 가장 오래된 집-가게-학교 등이 보존 돼 있다.
실제 '가장' 이라는 어휘를 붙이기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1700년대 지어진 동네를 둘러보면서 애써 이를 따지고자 하는 이들은 없다. 걸어서 2시간 가량이면 이 옛동네를 다 구경할 수 있으며, 말이 이끄는 마차나 트롤리(객차가 여러개 이어진 것)를 이용해 돌아볼 수 있다.
세인트 어거스틴에서 최고의 명물을 꼽으라면 두말할 필요없이 '카스틸로 드 상 마르코스(이하 카스틸로)' 성이다. 해안가에 위치한 이 성에서는 주말에 스페인 군복을 입은 모델 병사가 대포를 쏘며 300년 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곳에는 포탄방, 식품 저장소, 침실 등이 보존돼 있고, 영국 통치 시절때 감옥으로 사용됐던 흔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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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잇너 박물관 내부 |
이 박물관은 미국에서 아마도 최고 잡동사니 박물관일 것이다. 이 박물관은 플래글러가 지었던 호텔을 개조한 것인데 골동품 가게들이 위치한 자리는 한 때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수영장이 있었던 자리로 지금도 발코니를 걸으면서 1세기전 부호들이 그곳에서 수영하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세인트 어거스틴에서 또 빠질 수 없는 구경거리가 있다면 메모리얼 장로교회의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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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리얼 장로교회 앞을 관광 트롤리가 지나고 있는 모습. |
세인트 어거스틴은 해안가에 접해있으나 비치는 없다. 그래서 비치에 가려면 북쪽 아니면 남쪽으로 가야 한다. 또 역사지 에서 다리를 건너 아나스타샤 섬에 가면 219계단으로 되어 있는 등대를 올라가 볼 수 있는데, 그곳에서는 등대지기와 가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섬에는 플로리다에서 가장 오래된 유흥공원 엘리게이터 팜(악어의 집) 이 있다. 사실 옛날에는 몇마리 악어를 케이지에 전시해 놓은 것 만으로도 북쪽 지방 관광객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으나 요즘은 몇백마리 악어와 더불어 하얀색 희귀 악어 전시, 악어급식쇼·레슬링쇼까지 베풀고 있다. 악어의 희귀성이 감소된 까닭도 있으나 디즈니나 시월드같은 메가 공원의 그늘을 벗어나 보려는 안간힘이기도 하다.
일단 세인트 어거스틴을 벗어나면 주위에 비치, 골프장, 리조트 등이 포진하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관광지에서 누릴 수 있는 휴식을 맘껏 취할 수 있다.
세인트 어거스틴을 떠나 비치가에 앉아 대서양을 바라보노라면 '젊음의 샘' 을 찾아 플로리다에 첫 발을 내 딛은 폰스와 스페인 탐험가들의 발자취가 아련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곳을 거점으로 시작된 열강의 세력 다툼에 이용돼 쓰러져 갔던 선교사들과 자신들의 땅을 잃고 방황했던 인디언들의 모습을 해안가 바람결에 시달리고 있는 해초 속에서 보는 듯 하다.
세인트 어거스틴을 방문하기전 웹사이트(www.oldcity.com)에 들어가 충분한 정보를 얻거나, 세인트 어거스틴 북쪽 카스틸로 성 부근에 있는 정보센터에 들러 관광 안내서등을 미리 참조한다면 더욱 알찬 관광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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