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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와 차 한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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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화 댓글 0건 조회 2,091회 작성일 11-04-3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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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를 살았던 다성(茶聖) 초의(草衣)는 홀로 차를 마시면 신비롭다 하고, 근현대를 살았던 문학평론가 김현은 술을 두 사람 사이의 틈을 불태워 없애주는 신비로운 매개체라 한다. 확실히 차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롭다. 차가 지닌 여러 유익한 성분들이 몸에 끼치는 좋은 영향들은 실로 마술과 같아서, 사실만을 전달할 때에도 혹여 사기꾼 소리를 들을까 말하길 주저할 정도다.
 
그런데 초의가 말한 신비는 차 자체에만 있지 않다. 물론 차가 중요한 매개체이긴 하나, 초의의 신비는 홀로 차를 마시는 나, ‘차 마시는 단독자’로서의 나와 세계에 있다. 그리고 이 신비로움은 슬픔과 관련해 있다. 홀로 차를 마실 때의 슬픔, 그것은 차가 지닌 ‘차성(茶性)’을 몸이 느껴서이기도 하다. 가령 차는 직근성(直根性) 식물로서 홀로 잔뿌리 없이 땅 속 깊숙이 뿌리내리고, 꽃도 다른 대부분의 꽃들이 지는 가을에 핀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참 외로운 식물이다.
 
이 외로운 차를 외로이 홀로 마시면 나도 모르게 슬프다. 적적하다. 이렇게 부지불식간 스며드는 감정은 ‘한’이나 ‘우울’은 아니다. 어쩌면 ‘차 마시는 단독자’로서의 고독, 나와 너, 세계, 자연 사이에 이 건널 수도 불태워 없애버릴 수도 없는 ‘사이’와 ‘틈’, 그 심연에서 오는 슬픔, 연민이다.
 
반면 술은 나와 너, 세계, 자연 사이의 틈을 불태워 없애버리기에 신비롭다. 우린 때때로 술이 필요하다. 설령 불태워 없애버린 줄 알았던 그 틈이, 다음날 더 크게 벌어져 수습 불가능해질지라도, 술이 주는 즉각적인 황홀경, 그 매혹적인 휴식을 포기할 순 없다. 그렇지만 술 마시기가 너무 잦다. 세계에서 제일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 한국. 왜 우리는 이토록 자주 술이 주는 신비와 황홀경에 속절없이 빠져드는가

조르쥬 바타유는 미개인들의 시간이 ‘세속적 시간’과 ‘신성의 시간’으로 갈려 있었다는 로제 카유아의 <인간과 신성>을 인용하며, 세속적 시간인 ‘노동과 금기의 시간’만큼이나 신성의 시간인 ‘디오니소스적인 축제의 시간’ 또한 인간에게 필요한 시간이라 말한다.
 
‘노동과 금기의 시간’. 가까이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 친구들, 직장 동료들과 선후배들이 밤낮으로 살아내는 시간. 나는 이들이 축제의 시간을 즐기는 풍경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다만, 술을 마신다. 차를 올리는 차례(茶禮)에도 차가 아닌 술을 올려 아침 댓바람부터 술을 마신다. 밤낮으로 일해도 화폐가 쌓이지 않으니, 오늘은 어제보다 더 일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일할 예정인 내 아버지와 어머니, 친구들, 직장 동료들과 선후배들은 축제의 시간을 노동의 시간에 반납하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폭탄주’를 제조해 급하게, 즉각적으로 취해버린다.
 
철학자 김영민은 “술이 개인의 종교적, 음악적, 예술적 실존을 각성시키고 고양시킬 시적 뮤즈의 매체였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고 선언하였는데,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술자리만 보아도, 술자리는 이제 더 이상 신비롭지 않으며, 차라리 괴롭다. 그렇지만 한 개인에게, 이토록 지난한 노동과 금기의 시간만으로 짜여진 체제 안에서, 술을 끊고 맨 정신으로 자신과 세계와 심연을 직시하라는 요구는 가혹해보인다.
 
그러나 차도 술도 단지 개인의 취향과 기호에 머물 수 없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뒤엉킨 삶의 한 양식이라는 점에서, 술 마시기 버릇을 단속하려는 의지와 실천은 여전히 필요하다.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아침, 술로도 불태워 없애버릴 수 없는 체계의 피로를 풀려고 마시는 차는 그래서 조금 더 쓸쓸하고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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