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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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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373회 작성일 10-08-1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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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 때문에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제목만 보면 무슨 인생에 관한 성찰을 담은 에세이집 같아 보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실상 이 책은 기억과 생각에 관한 모든 지식의 집대성 입니다.
인지심리학 분야의 연구, 그중에서도 보통 교과서에는 잘 나오지 않는 사례와 연구들을 충실하게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모두 재미있는 것들 뿐입니다.
데쟈뷰 현상에 대한 설명은 예전에 <스테이>영화평에서도 인용한 바 있습니다. 그 외에도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목한 인간백정이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고 덕분에(일사부재리 원칙 덕분에) 그는 무사히 풀려나버렸다는, 기억이 처절할수록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아주 슬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매년 자신들의 모습을 찍어서 크리스마스 카드로 보낸 덕분에 노화라는 것이 어떻게 진행 되어가는 지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는 한 부부의 이야기도 재미있죠. 노화의 속도는 일정하지 않고 여건에 따라서 인생의 주기에 따라서 빠르거나 느려진다는 사실 이외에도 여러 가지를 알려줍니다.
체스판도 없이 여러 명의 다른 상대들과 동시에 체스를 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을 이길 수 있는 체스 챔피언의 이야기도 있죠. <고스트 바둑왕>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이 진짜 있다니 저 같은 사람이 보기엔 그저 대단할 뿐이라는....
1960년대에 보고된, ‘솔로몬 세라세프스키(Solomon-Veniaminovich Shereshevsky)’ 라는 기억 천재(사실은 일종의 savant)에 대한 루리아(A.R.Luria)의 연구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학술서적에서 간단히 'S'라고 불리는 그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는 군요. 루리아가 그에게 아무리 긴 단어 목록을 보여줘도 그는 그걸 단 한번 만에 줄줄 외울 수 있었답니다. 그냥 외우는 게 아니라 역순으로도 외울 수 있었고 몇 번째 단어가 뭐였는지도 금방 말할 수 있었다죠. 보통 사람에겐 의미묶음 7개 정도이상은 한꺼번에 다룰 수 없다는 인지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겐 그런 한계가 아예 없었던 겁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기억은 수 십년간 변함없이 지속되었습니다. 루리아는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매년 그를 만나서 예전에 보여줬던 목록을 다시 외워보라고 해봤는데 그때마다 그는 그동안 봐온 모든 목록을 줄줄 외워댔다는 거죠...
그에게는 단순히 기억을 잘한다는 것 말고도 다른 특징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선 공감각이 발달되어 있었죠. 사람의 목소리에서 색채를 느낄 수 있었고, 단어에서 맛을 느꼈대요. 식당에 가면 메뉴에 적힌 음식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맛을 기준으로 요리를 선택했다니 할 말 다 했죠. 그는 단어나 숫자를 기억 한다기 보다는 그 단어와 숫자에서 느껴지는 색과 맛을 기억했던 셈입니다.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연상이 되지 않는 단어에는 약했대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논리적으로만 생각해낼 수 있는 ‘무(無)’ 같은 단어는 특히 그에게 쥐약이었습니다. 애초부터 그가 단어를 보고 떠올리는 공감각적인 느낌은 그 단어의 의미와는 상관이 없었거든요. 그저 듣는 순간 떠오르는 어떤 느낌이었을 뿐이죠. 그래서 그는 기억은 잘 했지만, 생각은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모든 사물, 모든 단어는 그 자체로 존재했고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겁니다.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할 때 이런 그의 특성은 극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일주일 전에 본 갑돌이의 얼굴은 정확히 기억했지만 그 갑돌이가 지금 눈앞에 있는 갑돌이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야겠죠. 왜냐하면 그의 눈에는 일주일 사이에 약간 머리털이 자라고 피부가 거칠어진 갑돌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도 매일 매일 새로웠습니다. 매일 조금씩 변해가는 아니 조금씩 늙어가는 자신이 그의 눈에는 모두 보였던 거죠.
그 덕분에 그의 머릿속은 언제나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동안 보고 들은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며 돌아다녔고 뜻밖의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와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는군요.
http://www.memoryelixir.com/history2.html
어쨌든, 세라세프스키의 사례는 기억이라는 게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과정 그 이상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정보는 삭제하고 서로 관련된 정보를 함께 묶어가며 기억을 합니다. 그러니까 기억은 정보 저장이 아니라 정보의 가공과 조합과정인 거죠. 그저 그대로 저장된 정보는 아무리 정확해도 우리가 아는 ‘기억’하고는 다른 겁니다.
어쨌든 이 책은 참 재미있습니다. 심리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책이라고 감히 추천합니다. 단, 번역이 좀 들쭉날쭉해서 처음에 시작하기가 힘들 수는 있습니다.
그 고비만 넘기면 줄지어 기다리는 생생한 사례와 지식을 만날 수 있으니 조금만 참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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