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가 만나는 도시,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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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ica 댓글 0건 조회 1,566회 작성일 12-02-2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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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위치
이스탄불을 가리켜 ‘동서가 만나는 도시’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견해도 없지 않다. 이는 이스탄불, 아니 그 전신이라고 할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을 수도로 한 로마제국을 염두에 두면서, 이를 하나의 중심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을 이해하자면, 아무래도 이스탄불의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스탄불은 유례가 드문 도시이다. 그것은 두 가지 중요한 요소로부터 기인한다. 하나는 지리적 위치의 특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위치의 특이성이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는 마르마라해와 보스포러스 해협, 그리고 금각만(金角灣, Golden Horn, Halic)에 접해 있다. 이스탄불 남쪽에 열려 있는 마라마라해는 온화한 내해로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끼고 에게해와 연결된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폭 1km 전후의 바닷길로서, 북쪽은 흑해에 가닿는다. 금각만은 도시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는데, 마르마라해나 보스포러스 해협, 또는 금각만이나 모두 격리시키는 바다가 아니라, 연결시키는 바다이다. 그것은 길로서의 기능과 함께 정보 회로 역할도 한다.
이스탄불의 위치는 지정학적으로도 절묘하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수로 상에 자리 잡은 동시에, 트라키아반도 및 소아시아반도와 접점을 이룬다. 소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 세계와 아랍 세계로 간다거나 트라키아로부터 그리스 세계로 간다거나 할 때, 반드시 이스탄불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로써 이스탄불은 말하자면, 정보량이 큰 신경중추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이스탄불의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이다.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된 것은 330년이었다. 1453년에 오스만 터키제국의 영내로 편입된 후에도 이곳은 계속해서 수도였다. 이스탄불의 수도로서의 역할은 1923년까지 계속되었으니, 1600년에 가깝도록 수도의 위치를 지켜온 것이다. 이만큼 장기간에 걸쳐 계속해서 수도였던 도시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도시의 중심성
이스탄불은 거대한 중력을 가진 도시이다. 여러 가지 것을 흡수하는 힘을 갖추고 있는데, 그 힘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천도와 함께 발휘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앞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동로마제국의 수도라고 했는데, 이는 동서 로마제국의 분열이라고 하는 역사학상의 관용을 따른 것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다소간 문제가 없지 않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사고에 따르자면, 이는 어디까지나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선택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현재의 우슈큐달 지방에서 쳐부순 후, 콘스탄티노플의 건설에 손을 대었다. 그가 로마와 비슷하게 일곱 개의 언덕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을 때, 거기에는 처음부터 로마를 모범으로 그러나 로마를 대신하는 도시를 건설하려는 그의 의도가 엿보였다. 330년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의 성대한 개도식이 거행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천도는 로마제국의 중심이 그때까지보다 얼마쯤 동쪽으로 옮겨갔다는 것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이 중심이 되었음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탄불에서 동양과 서양이 만난다는 표현은 자칫 편견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가 등장한 것이다. 극동의 반대라는 맥락에서 ‘극서’에 몸을 둔 채 말한다면 모르거니와, 동로마제국이라든지 비잔틴제국이라든지 하는 표현에도 유럽과의 단절을 암시하면서 은연중에 이를 비정상적인 듯이 여기는 어감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 정교와 후에 지배적인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를 이교적인 것으로 제외시키려는 ‘극서’의 정통의식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동지중해 지역의 관점에서 볼 때, 이스탄불은 어디까지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해온 로마제국은 시대를 거듭하면서 지배영역을 넓혀갔다. 6세기 중반의 유스티니아누스황제 시대에 그 지배영역은 그리스, 발칸반도,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이탈리아로부터 스페인의 일부로까지 넓혀졌다. 이는 로마를 수도로 삼았던 로마제국 시대와 거의 마찬가지로 지중해제국의 실체를 지켰다고 할 수 있다. 8세기 중엽이 되면, 우마이야조(朝)와 프랑크 왕국의 출현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로마제국의 지배영역이 대체로 그리스와 소아시아로 한정되는 듯하게 되었고, 그 후 몇 차례 성쇠를 보이면서 최후로는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만으로 지배영역이 축소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로마제국은 7세기 이후 점차로 그리스화되면서, 로마제국이라는 의식이 차츰 사라져갔다.
1299년에 건국된 오스만 터키제국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병탄한 후 급속히 강대해졌다. 16세기에는 그리스를 포함해 발칸반도와 소아시아반도로부터 아라비아반도, 북아프리카까지를 그 지배영역으로 만들었다. 지중해 서북부의 일부 지역을 빼놓고는 대체로 지중해제국을 형성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스만 터키제국은 로마제국을 재현한, 정통적인 직계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가능케한 것은 콘스탄티노플이 지닌 여러 면에 걸친 정보 흡수력과 발신력을 거의 그대로 온존시키면서, 여전히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오스만 터키제국의 경우, 이슬람 제국이라는 속성이 이스탄불의 정보중심으로서의 기능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극서’ 문명에게는 이슬람제국이라는 속성이 대단히 큰 장애가 되어, 오스만 터키제국을 필요 이상으로 왜소화시키고, 그 평가를 의도적으로 끌어내리는 경향이 있는데, 문명사적으로 볼 경우, 그리스 로마문명의 유산은 사실상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로마제국으로부터 오스만 터키제국 계열로 바로 계승되었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콘스탄티노플은 하나의 빛을 발하는 도시로서, 그 빛의 원천은 집적된 정보와 거대한 풍요, 굉장한 건조물 등인바, 이것들은 언제나 중심성을 지닌 이 도시의 속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슬람도시 이스탄불
오스만 터키의 점령 이후 이스탄불에는 이슬람 사원인 쟈미가 한 때는 수천에 이르렀다. 이슬람에서는 신도들이 하루 다섯 차례 예배를 드리도록 되어 있는데, 새벽 미명으로부터 일몰 후까지에 걸쳐 이루어지는 이 다섯 차례의 예배시간이 오면 쟈미의 첨탑(미나레)으로부터 ‘예배에의 부름’이라 할 에쟌 노래가 전 시가로 흘러나 온다. 수백 이상의 쟈미로부터 미묘한 시간차를 두고 공간 속으로 계속해서 파고드는 이에쟌의 클라이막스는 장대한 에쟌 합창이다. 그 순간은 전 공간과 전 시간이 모두 에쟌으로 가득 찬다.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음성으로 주거공간을 파고 드는 에쟌은 이슬람의 절묘한 통치 장치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1천 년을 넘는 영화를 자랑하던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이처럼 이슬람국가로 변모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뭐라 해도 소피아대성당일 것이다.
이스탄불의 신시가로부터 금각만에 걸쳐있는 가라타의 부교를 건너 이전의 그리스도교 로마제국, 비잔틴의 사적을 둘러 구시가로 들어서면, 앞서 말한 대로 로마의 일곱 언덕을 닮은 언덕길이 펼쳐지는데, 지금은 모스크(이슬람사원) 특유의 기둥 네 개로 둘러싸인 채 커다란 둥근 지붕을 머리에 인 성 소피아대성당(하기아 소피아)이 그 중심을 이룬다. 명실상
부하게 동방 비잔틴교회의 정점에 서있는 이 성당에 발을 들여놓으면, 장대한 규모의 원개(圓蓋)가 계산된 채광창의 효과를 내면서 공중에 가볍게 떠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원개 아래로 확보된 넓게 펼쳐진 공간은 위압감 없이 조화로운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 오스만제국 지배 아래 모스크로 개장되면서 원개 정상과 정면 상부에는 쿠란(코란)의 구절들을 그린 크나큰 원들이 걸려있는 것 외에는 아랍문명 특유의 문양들이 추상적인 세계를 단순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스탄불의 오늘과 내일
이처럼 이스탄불은 한 나라의 수도인 동시에 지중해 지역의 수도이자 세계 수도의 하나였다. 1923년에 터키공화국이 설립되었는데, 이즈음 오스만 터키 시대의 지배영역은 줄곧 축소되어 국토가 소아시아와 트라키아 일부로 한정되었다.
수도가 이스탄불로부터 앙카라로 옮기면서 1600년 가까이에 걸친 수도로서의 이스탄불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터키혁명을 주도한 무스타파 케말은 이스탄불의 구세력과의 단절을 위해 천도를 단행했던 것이다.
정치수도의 속성을 잃은 이스탄불은 우선 세계도시로서의 발신기능을 잃게 되었다. 특히 이슬람 여러 나라에 대한 영향력이 소실된 채 하나의 지방 도시로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인구와 지역의 크기에서 뿐만 아니라 유입, 유출되는 정보량의 거대함에 힘입어 이스탄불은 터키 내에서 의연히 중심도시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유력한 신문사와 출판사 등은 대부분 이스탄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면서 인구가 대규모로 증가했다. 이 증가 경향은 1950년대로부터 비약적으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던바, 도시 주변부에는 게세콩두(하룻밤새 세운 집)라고 불리는 불법건축이 늘어났다. 이스탄불의 인구를 800만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 이미 터키공화국 전 인구의 7분의 1에 해당한다.
이스탄불의 겪는 또 하나의 변화는 도시의 민족형성 변용이다. 이미 국제도시로서 이스탄불의 민족형성은 복잡했는데, 1923년 이래로 그 틀이 유지되는 중에 그 내용상 다소간 변화가 생겨나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유태인, 아르마니인 등의 인구가 감소한 반면, 최근에는 중동에서의 여러 가지 상황변화와 함께 페르시아인과 아랍인, 쿠르드인이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를 배경으로 이스탄불이 2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강력한 문화수도로 소생한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거대한 문화유산을 역사동결적인 의식을 중심으로 보호ㆍ보존하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을 지적 자극으로 가득 찬 살아 있는 생활공간으로 집어넣는 방책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탄불을 가리켜 ‘동서가 만나는 도시’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견해도 없지 않다. 이는 이스탄불, 아니 그 전신이라고 할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을 수도로 한 로마제국을 염두에 두면서, 이를 하나의 중심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을 이해하자면, 아무래도 이스탄불의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스탄불은 유례가 드문 도시이다. 그것은 두 가지 중요한 요소로부터 기인한다. 하나는 지리적 위치의 특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위치의 특이성이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는 마르마라해와 보스포러스 해협, 그리고 금각만(金角灣, Golden Horn, Halic)에 접해 있다. 이스탄불 남쪽에 열려 있는 마라마라해는 온화한 내해로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끼고 에게해와 연결된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폭 1km 전후의 바닷길로서, 북쪽은 흑해에 가닿는다. 금각만은 도시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는데, 마르마라해나 보스포러스 해협, 또는 금각만이나 모두 격리시키는 바다가 아니라, 연결시키는 바다이다. 그것은 길로서의 기능과 함께 정보 회로 역할도 한다.
이스탄불의 위치는 지정학적으로도 절묘하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수로 상에 자리 잡은 동시에, 트라키아반도 및 소아시아반도와 접점을 이룬다. 소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 세계와 아랍 세계로 간다거나 트라키아로부터 그리스 세계로 간다거나 할 때, 반드시 이스탄불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로써 이스탄불은 말하자면, 정보량이 큰 신경중추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이스탄불의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이다.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된 것은 330년이었다. 1453년에 오스만 터키제국의 영내로 편입된 후에도 이곳은 계속해서 수도였다. 이스탄불의 수도로서의 역할은 1923년까지 계속되었으니, 1600년에 가깝도록 수도의 위치를 지켜온 것이다. 이만큼 장기간에 걸쳐 계속해서 수도였던 도시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도시의 중심성
이스탄불은 거대한 중력을 가진 도시이다. 여러 가지 것을 흡수하는 힘을 갖추고 있는데, 그 힘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천도와 함께 발휘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앞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동로마제국의 수도라고 했는데, 이는 동서 로마제국의 분열이라고 하는 역사학상의 관용을 따른 것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다소간 문제가 없지 않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사고에 따르자면, 이는 어디까지나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선택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현재의 우슈큐달 지방에서 쳐부순 후, 콘스탄티노플의 건설에 손을 대었다. 그가 로마와 비슷하게 일곱 개의 언덕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을 때, 거기에는 처음부터 로마를 모범으로 그러나 로마를 대신하는 도시를 건설하려는 그의 의도가 엿보였다. 330년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의 성대한 개도식이 거행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천도는 로마제국의 중심이 그때까지보다 얼마쯤 동쪽으로 옮겨갔다는 것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이 중심이 되었음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탄불에서 동양과 서양이 만난다는 표현은 자칫 편견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가 등장한 것이다. 극동의 반대라는 맥락에서 ‘극서’에 몸을 둔 채 말한다면 모르거니와, 동로마제국이라든지 비잔틴제국이라든지 하는 표현에도 유럽과의 단절을 암시하면서 은연중에 이를 비정상적인 듯이 여기는 어감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 정교와 후에 지배적인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를 이교적인 것으로 제외시키려는 ‘극서’의 정통의식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동지중해 지역의 관점에서 볼 때, 이스탄불은 어디까지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해온 로마제국은 시대를 거듭하면서 지배영역을 넓혀갔다. 6세기 중반의 유스티니아누스황제 시대에 그 지배영역은 그리스, 발칸반도,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이탈리아로부터 스페인의 일부로까지 넓혀졌다. 이는 로마를 수도로 삼았던 로마제국 시대와 거의 마찬가지로 지중해제국의 실체를 지켰다고 할 수 있다. 8세기 중엽이 되면, 우마이야조(朝)와 프랑크 왕국의 출현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로마제국의 지배영역이 대체로 그리스와 소아시아로 한정되는 듯하게 되었고, 그 후 몇 차례 성쇠를 보이면서 최후로는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만으로 지배영역이 축소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로마제국은 7세기 이후 점차로 그리스화되면서, 로마제국이라는 의식이 차츰 사라져갔다.
1299년에 건국된 오스만 터키제국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병탄한 후 급속히 강대해졌다. 16세기에는 그리스를 포함해 발칸반도와 소아시아반도로부터 아라비아반도, 북아프리카까지를 그 지배영역으로 만들었다. 지중해 서북부의 일부 지역을 빼놓고는 대체로 지중해제국을 형성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스만 터키제국은 로마제국을 재현한, 정통적인 직계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가능케한 것은 콘스탄티노플이 지닌 여러 면에 걸친 정보 흡수력과 발신력을 거의 그대로 온존시키면서, 여전히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오스만 터키제국의 경우, 이슬람 제국이라는 속성이 이스탄불의 정보중심으로서의 기능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극서’ 문명에게는 이슬람제국이라는 속성이 대단히 큰 장애가 되어, 오스만 터키제국을 필요 이상으로 왜소화시키고, 그 평가를 의도적으로 끌어내리는 경향이 있는데, 문명사적으로 볼 경우, 그리스 로마문명의 유산은 사실상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로마제국으로부터 오스만 터키제국 계열로 바로 계승되었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콘스탄티노플은 하나의 빛을 발하는 도시로서, 그 빛의 원천은 집적된 정보와 거대한 풍요, 굉장한 건조물 등인바, 이것들은 언제나 중심성을 지닌 이 도시의 속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슬람도시 이스탄불
오스만 터키의 점령 이후 이스탄불에는 이슬람 사원인 쟈미가 한 때는 수천에 이르렀다. 이슬람에서는 신도들이 하루 다섯 차례 예배를 드리도록 되어 있는데, 새벽 미명으로부터 일몰 후까지에 걸쳐 이루어지는 이 다섯 차례의 예배시간이 오면 쟈미의 첨탑(미나레)으로부터 ‘예배에의 부름’이라 할 에쟌 노래가 전 시가로 흘러나 온다. 수백 이상의 쟈미로부터 미묘한 시간차를 두고 공간 속으로 계속해서 파고드는 이에쟌의 클라이막스는 장대한 에쟌 합창이다. 그 순간은 전 공간과 전 시간이 모두 에쟌으로 가득 찬다.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음성으로 주거공간을 파고 드는 에쟌은 이슬람의 절묘한 통치 장치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1천 년을 넘는 영화를 자랑하던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이처럼 이슬람국가로 변모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뭐라 해도 소피아대성당일 것이다.
이스탄불의 신시가로부터 금각만에 걸쳐있는 가라타의 부교를 건너 이전의 그리스도교 로마제국, 비잔틴의 사적을 둘러 구시가로 들어서면, 앞서 말한 대로 로마의 일곱 언덕을 닮은 언덕길이 펼쳐지는데, 지금은 모스크(이슬람사원) 특유의 기둥 네 개로 둘러싸인 채 커다란 둥근 지붕을 머리에 인 성 소피아대성당(하기아 소피아)이 그 중심을 이룬다. 명실상
부하게 동방 비잔틴교회의 정점에 서있는 이 성당에 발을 들여놓으면, 장대한 규모의 원개(圓蓋)가 계산된 채광창의 효과를 내면서 공중에 가볍게 떠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원개 아래로 확보된 넓게 펼쳐진 공간은 위압감 없이 조화로운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 오스만제국 지배 아래 모스크로 개장되면서 원개 정상과 정면 상부에는 쿠란(코란)의 구절들을 그린 크나큰 원들이 걸려있는 것 외에는 아랍문명 특유의 문양들이 추상적인 세계를 단순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스탄불의 오늘과 내일
이처럼 이스탄불은 한 나라의 수도인 동시에 지중해 지역의 수도이자 세계 수도의 하나였다. 1923년에 터키공화국이 설립되었는데, 이즈음 오스만 터키 시대의 지배영역은 줄곧 축소되어 국토가 소아시아와 트라키아 일부로 한정되었다.
수도가 이스탄불로부터 앙카라로 옮기면서 1600년 가까이에 걸친 수도로서의 이스탄불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터키혁명을 주도한 무스타파 케말은 이스탄불의 구세력과의 단절을 위해 천도를 단행했던 것이다.
정치수도의 속성을 잃은 이스탄불은 우선 세계도시로서의 발신기능을 잃게 되었다. 특히 이슬람 여러 나라에 대한 영향력이 소실된 채 하나의 지방 도시로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인구와 지역의 크기에서 뿐만 아니라 유입, 유출되는 정보량의 거대함에 힘입어 이스탄불은 터키 내에서 의연히 중심도시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유력한 신문사와 출판사 등은 대부분 이스탄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면서 인구가 대규모로 증가했다. 이 증가 경향은 1950년대로부터 비약적으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던바, 도시 주변부에는 게세콩두(하룻밤새 세운 집)라고 불리는 불법건축이 늘어났다. 이스탄불의 인구를 800만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 이미 터키공화국 전 인구의 7분의 1에 해당한다.
이스탄불의 겪는 또 하나의 변화는 도시의 민족형성 변용이다. 이미 국제도시로서 이스탄불의 민족형성은 복잡했는데, 1923년 이래로 그 틀이 유지되는 중에 그 내용상 다소간 변화가 생겨나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유태인, 아르마니인 등의 인구가 감소한 반면, 최근에는 중동에서의 여러 가지 상황변화와 함께 페르시아인과 아랍인, 쿠르드인이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를 배경으로 이스탄불이 2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강력한 문화수도로 소생한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거대한 문화유산을 역사동결적인 의식을 중심으로 보호ㆍ보존하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을 지적 자극으로 가득 찬 살아 있는 생활공간으로 집어넣는 방책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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