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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남기는 이유 - 시애틀의 개스웍스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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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899회 작성일 10-10-12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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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의 유래를 잃어버린 공원들
서울의 영등포구 영등포동 일대에 새 공원이 조성되어서 지난 여름에 문을 열었다. 원래 이 자리는 OB맥주 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OB맥주 공장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남은 자리(‘이전적지’라는 용어로 표현되는)를 두산그룹이 서울시에 매각하고 서울시는 그 자리를 영등포공원으로 꾸민 것이다. 면적은 약 1만8천평 정도된다.
공원화 계획이 확정된 뒤 97년 3월부터 7월까지 설계가 완료되었고 그해 가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올해 6월에 완공된 공원이다. 이곳이 과거 맥주를 생산하던 공장지대임을 알릴 수 있는 공장 건물들과 기타 시설들은 모두 사라지고 대신 깨끗한 진입로와 광장, 잔디밭 그리고 보기 좋은 숲이 조성되었다. 공원녹지가 다른 지역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던 영등포지역으로 보면 인근 여의도에 조성된 여의도공원과 더불어 영등포공원 조성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영등포공원을 가면서 느끼는 것은 그 공원의 우수한 공간설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 아쉬움의 가장 큰 이유는 이 새로운 공원이 왜 갑작스럽게 나타났는지, 그리고 이 공원이 나타나기 전에 이 공간이 무엇이었는지를 영등포공원이 전혀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영등포공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근의 여의도공원(얼마 전까지 서울시민의 사랑을 받던 여의도광장이었던 곳)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 문제의 본질은 아마도 장소가 갖고 있는 장소성의 연속과 관련된 문제, 즉 어떤 장소가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내고 고치고 적응해가고 다듬어 갔던 그 자신만의 얘기, 즉 그 장소만의 의미를 어느 순간엔가 졸지에 잃어버리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영등포공원은 다시 태어났지만 그 장소에 쓰여졌던 이전의 얘기들은 잃어버린 채 새로운 얘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이 공원의 설계를 맡았던 동명기술공단의 정주현 이사 얘기를 들어보면, 최소한 공장의 굴뚝(상당히 높아 랜드마크의 역할도 기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만큼은 살리는 방향으로(즉 이 장소가 과거에 무엇이었는지를 알리는 일종의 이정표로서) 추진했으나, 공원이용자의 안전문제(왜냐하면 굴뚝이 무너질지 모르므로)를 고려한 지나친 걱정 때문에 결국 취소되었다고 한다.


▲공원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예날 원유처리시설들이 사람들을 맞는다.


● 옛 공장의 이미지를 포용하는 개스웍스파크
미국 서부의 큰 도시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도시인 시애틀은 겨울에 비가 많이 내리고 여름에 고온건조한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도시이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전해 주는(약간은 우울한) 낭만이 실제로 잘 어울리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개스웍스파크(Gas Works Park)라는 좀 별종의 도시근린공원이 있다. 개스웍스파크가 공원으로 조성되기 이전에는 정유공장지대이었고, 지금의 영등포공원과 같이 이전적지의 공원화라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위치도 시애틀의 중심에서 약 30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 영등포가 종로에서 떨어져 있는 만큼의 거리에.
이 두 공원의 다른점은 그러나 같은점보다 훨씬 많다. 개스웍스파크는 옛 공장의 건물들과 부대시설의 모습들을 모두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다. 이 공원을 방문할 때 공원 방문자들을 사로잡는 것은 공원의 아름다운 조경이 아니라 옛 공장의 이미지를 존속시키며 옛 장소의 의미를 자연스레 포용하고 있는 공원의 아량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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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헤그가 만들어 놓은 15m 높이의 동산. 정상부에는 해시계가 있고, 사람들이 햇빛을 즐기고 연을 날리는 장소로 인기를 얻고있다.

개스웍스파크는 1973년에 조성되었다. 당시 이 곳은 도시 내에 있기에는 부적격시설이며 혐오시설이었던 정유공장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공장건물, 원유처리타워, 개스파이프 등 원유처리시설이 그대로 방치된 채로 있었다. 정유처리 공장지대의 토양은 원유처리 후 남는 화학처리물들 (benzine과 xylene들이라고 하는데 화학에 워낙 무지한 필자는 잘 모르는 것들이다) 때문에 심하게 오염된다고 한다.
당시 이곳이 워낙 시애틀시의 곳곳에서 조망되는 주요 경관지점이기도 하고(실제 유니온 호숫가에 위치하기 때문에 남쪽의 다운타운쪽에서 그리고 호수변 도로로부터 쉽게 조망되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시애틀의 다운타운쪽을 바라보는 경관의 아름다움도 대단해서 시애틀시로서는 이곳을, 즉 오염된 채 버려져 있는 도시의 흉물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시애틀시는 1970년에 이곳을 도시근린공원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조경가인 리처드 해그(Richard Haag)에게 공원계획을 맡기게 된다.
통상적인 계획안, 즉 모든 공장시설을 깨끗이 철거하고 오염된 토양을 정화한 뒤 멋진 조경으로 채우는 공원계획안을 기대하는 한편, 오염된 토양의 정화비용이 워낙 엄청나서 고민하고 있던 시애틀시에 해그는 새롭고 솔깃한(저렴한 조성비용 때문에) 제안을 한다.
그것은 공장시설의 일부를 남기고 토양도 그대로 두되 깨끗한 토양을 다른 곳에서 반입한 다음 깨끗한 토양 내에 살고 있는 미생물로 하여금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는 생태학적 방법을 제시한다. 당시에 토양처리방안은 그렇다하더라도 공장시설을 일부 남기는 해그의 제안은 시애틀 시민으로부터 심각한 반대에 부쳤치지만 해그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당시 해그의 생각으로는 정유공장시설들이 지금은 아무리 도시의 흉물일지언정(또는 오히려 흉물이기 때문에) 시민들의 기억속에 남길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토양미생물을 이용한 해그의 토양정화 아이디어는 약 25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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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정상부의 해시계는 사람이 시침이 된다. 오른쪽 호수 너머로 시애틀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 멋진데 아쉽게도 보이지 않는다.

과연 해그의 이 아이디어가 성공했는지 아니면 성공하고 있는 지에 대해 얘기하는 주변 문헌들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올해 10월에 필자가 방문했을 때 개스웍스파크의 공원 안내판은 토양정화과정이 아직 진행중이라는 내용의 안내를 하고 있었다. 토양정화과정이 아직 진행중이라는 사실은 이 공원에 나무가 몇 그루밖에 없다는 것으로부터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 나름대로도 필자에게는 좋았지만…….

● 이전적지의 잔재는 미래를 안내하는 이정표
해그는 공장시설들 중 지나치게 혐오스럽고 또 남기기에는 안전도가 의심스러운 것들은 철거하지만 당시 정유처리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알릴 수 있는 주요시설은 남겼다. 사진들에서 보여지는 녹슨 원유처리(열분해 cracking) 타워들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해그는 약 15m 높이의 동산을 호수변에 만들었는데 지금은 이 동산이 공원에서 최고의 인기 장소라고 한다. 여름이 건조하고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시애틀에서 이 동산이 햇볕을 즐기는 장소로 적격이기 때문이고 또 호수변이라 바람이 많은 까닭에 연을 날리기 좋기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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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원의 호숫과. 그대로 내버려둔 지피식물이 한가롭다.

해그는 현재 유일하게 공원의 녹지를 형성하는 잔디의 관리방법에도 그 자신의 철학을 담았다. 스프링쿨러에 의한 관개와 잔디깎기의 통상적인 관리방법보다는 그냥 내버려두는 방법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개스웍스파크의 잔디는 여름에는 노랗게 그리고 겨울에 파랗게 변하는 사철의 변화를 담는다. 여름의 건조기에는 통상 스프링쿨러로 관개하는 미국 서부의 관리 전통으로 볼 때 이것은 색다른 개스웍스파크만의 관리해법이라고 볼 수 있다. 거친 잔디로 덮여진 나무 없는 동산, 정화시설의 녹슨 철제 타워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시애틀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 한 마디로 멋지다.

개스웍스파크에 남겨진 공장시설들은 시애틀의 도시발전사와 더불어 혐오시설이 과거 도시근교에 배치되었었던 시절의 얘기와 그리고 왜 지금은 또 떠나야 했는지에 대한 사연을 우리에게 그 몸 전체로 잘 알려주고 있다.
물론 개스웍스파크에 남아있는 옛 정유공장의 흔적 또는 폐허의 잔재들은 그 자체로서는 시각적인 그리고 예술적인 자질을 그리 크게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옛날과 오늘 그리고 내일을 연결하는 길 위에서 우리를 안내하는 다정한 이정표이다. 이 이정표의 중요성은 새롭게 태어난 영등포공원에서 길을 잃고 있는 우리들을 생각해 보면 더 확실해진다. 어디 우리가 늘 아름다움만 보기 위해서 그리고 단지 쉬기 위해서만 공원에 오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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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정유시설 폐자재들을 이용한 어린이 놀이시설

우리가 생각없이 저지르고 있는 많은 재개발들은(주택재개발사업지역과 도심재개발사업지역 모두를 포함해서) 과거의 흔적을 대개는 남기지 않는다. 그 흔적이 하찮아서고, 그 흔적이 과거의 부끄러움을 오히려 일깨우기 때문이고, 또 그 흔적을 지키기 위해서는 예상 외의 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스웍스파크의 사례는 그 흔적들이 흔적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 조경이론가인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도 해그의 개스웍스파크를,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얘기하면서 ‘장소의 정신’(the spirit of place 또는 genius of loci)을 찾고 보전하려는” 작품으로 해석하고 있다.

● 완숙미 넘치는 공원에 대한 기대
필자는 개인적으로 서대문독립공원을 좋아한다. 서대문독립공원에는(누구의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옛 건물(감옥)의 터를 남겨 놓아 그 공원의 옛 장소성을 유지하고 있다. 아니 옛 장소성을 단지 유지하는 것에 끝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감옥의 터는 공원 전체의 중심적 사고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독립공원에서는 일제하의 독립투사를 탄압해 온 일제의 식민통치를 상징하고 알리려는 문화사적 가치 때문에 그나마 장소성 유지의 사고가 인정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영등포공원 같은 일반 도시근린공원 같은 곳에서는 ‘아니 공장건물을 남겨 무엇하게요’라고 반문하는 시 관계자들과 시민들의 모습을 쉽게 눈에 그릴 수 있다. 그들만일까. 많은 전문가들도 아직 마찬가지의 견해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금 개스웍스파크는 도시의 근린공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과거 시애틀 근교 정유공장지대의 옛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완숙미가 넘치는 공원으로서 시애틀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반면에 우리의 영등포공원이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 이 공간이 맥주공장이었다는 생생한 기억을 일깨우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놓쳐버린 영등포공원의 장소성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영등포공원이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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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들의 접근을 허용한 예 정유시설들(위). 정유시설은 과거정유공장의 면모를 어느정도 짐작케한다. 어린이들이 타워를 오르다가 다친 이후로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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