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속 유럽 마을 남인도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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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ale 댓글 0건 조회 1,516회 작성일 11-01-18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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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도’ 하면 시끄러운 경적, 불결한 거리, 달려드는 걸인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분 맞는 얘기지만 인도가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인도는 인종도, 종교도, 삶도, 풍경도 다양한 나라다. 인도 남부에는 유럽풍 도시도 있다. 아라비아 해안을 따라 인도 남부를 다녀왔다.
향신료를 찾아온 유럽인들의 무역항
인도를 다녀왔다는 사람들에게 인도 얘기를 꺼내면 반응이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뭔가 영혼을 자극하는 게 있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거긴 여행할 데가 못 된다는 것이다. 남인도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 이유를 먼저 짚고 가자. 이유는 간단하다. 인도는 다른 행성이다. 그들만의 독특한 사고와 생활방식이 존재한다. 여기에 힌두교의 뿌리도 깊다. 마르크스도 인도에 대해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뚜렷한 카스트가 존재하는 곳인데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다니…. 뭐 이런 한탄이었을 것이다. 힌두 신앙도 무시할 수 없다. 세계에서 채식이 가장 발달한 나라가 인도다. 어느 식당이나 채식 메뉴가 따로 있을 정도니까. 이유는 자이나교 같은 꽤 많은 종교가 육식을 철저하게 금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더럽고 불결하며 시끄러운 것이 싫다는 사람들도 좋아할 만한 인도다. 지역은 남인도의 코치다(코친이라고도 한다). 코치는 역사가 꽤 깊다. 코치는 오래전부터 무역항으로 유명했다. 유럽인들이 왜 인도를 찾으려고 그리 애를 썼는지 기억하는가? 이유는 향신료 때문이었다. 식품을 저장할 냉장 기술이 좋지 않았던 시기, 유럽에서 향신료와 소금은 돈이었다. 거의 썩어가는 고기에도 향신료를 뿌려 먹었다. 향신료가 금보다 비쌌다는 것이다.
그러한 향신료의 고장이 바로 코치다. BC 3세기부터 이집트, 페니키아, 바빌로니아 등과 향신료를 사고팔았던 고도다. 세계 최초의 문명의 발상지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다. 페니키아, 바빌로니아 같은 도시들이 그곳에서 발전했다. 초승달 지대의 문명은 이집트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 당시 어떻게 상인들이 인도까지 찾아갔을까? 일단 서양인들이 인도를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다.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코치 북부 캘리컷에 상륙했다. 이후 그는 1502년부터 1524년까지 세 차례 인도를 방문했다. 세 번째 그가 인도에 왔을 때 포르투갈 정부는 그를 인도 총독으로 임명했다. 유럽인들은 중세시대에 자기들 맘대로 인도 땅을 식민지처럼 여겼으며 이곳에 성을 쌓았다. 그래서 코치의 구도심을 포트리스 코치라고 한다. 다 가마는 코치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코치 입구에는 1510년에 세워진 성 프란치스코 교회가 있는데 내부에는 바스코 다 가마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까지 표시돼 있다.
작고 사랑스러운 유럽풍 마을 풍경
교회 옆길을 따라가면 마을을 훑어볼 수 있다. 호텔도 대부분 2, 3층 정도의 유럽 스타일이다. 바스코 다 가마란 호텔도 있다. 가이드는 “여기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머물 때 살던 집인데 기록은 없다”고 말했다. 그냥 이름을 갖다붙인 것인지, 아니면 진짜 그가 묵은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옆에는 다 가마의 이름을 딴 카페와 서점도 붙어 있다. 책방에 전시된 책 중에는 때 묻은 중고 서적도 많았다. 여행지에서 이런 서점을 만나면 부럽다. 때 묻은 책에서는 선배 여행자들의 정취가 배어난다.
포트리스 코치는 작고, 사랑스러운 마을이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여기 인도 맞아?”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거리에서 악기나 인형을 파는 인도인만 없다면 유럽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관광객의 대부분도 유럽인이다. 그곳에서 한국인 여행자 두 명을 만났는데 그들은 “여행 중 한국인을 처음 만난다”며 놀라워했다.
거리는 깨끗하다. 벽은 하얗거나 노랗다. 낙서 한 자 없고, 벽보가 너절하게 붙어 있지도 않았다. 집집마다 화분을 내놓았다. 화원의 세련된 장미가 아니라 거리의 덩굴에서 막 딸 수 있는 ‘길거리 장미’같이 흔한 꽃이었다. 그래도 예뻤다. 카페 창문 아래서 소들이 화분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풀을 뜯었다. 게스트하우스의 노란 벽엔 자전거가 두어 대 세워져 있고, 건너편 호텔 앞엔 흰색 클래식 카가 주차돼 있었다. 관광용으로 제작한 앰배서더란 모델인데 1960년대풍의 고풍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차였다. 이 호텔 앞에서 중년의 백인이 눈인사를 해왔고, 배낭을 멘 백인 연인들이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소음과 경적, 판잣집과 빌딩 숲 사이에서 헤매던 뭄바이와는 딴판이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여행자들은 모두 바닷가로 슬슬 걸어 나간다. 포트리스 코치의 명물인 중국식 어망을 이용한 고기잡이를 보기 위해서다. 가로 세로 4~5m 정도의 거대한 사각형 뜰채를 물속에 담가놓았다가 건져내 물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우리로 치면 족대나 반두인데 1인용이 아니라 기중기같이 크다. 해안가에는 이런 어망이 10여 개 설치돼 있는데 정작 그물질을 하는 곳은 딱 하나다. ‘고’라는 어부는 손바닥만 한 바다 메기를 보여주며 “쓰나미 이후 물고기들이 사라졌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인도식이 아닌 중국식이란 이름이 왜 붙었을까? 중국에는 이런 그물이 없다. 「1492년 콜럼버스」란 책에서 해답을 찾아냈다. 당시 명나라는 세계 최대의 해양 국가였다. 영락제가 황제에 오른 뒤 환관 출신의 정화는 세계 최고의 함대를 거느리고 대항해를 떠났다. 길이 135m, 폭 55m의 대형 선박 62척 등 모두 317척의 대함대였다. 200년 뒤에 유럽 최강이라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고작 130대 정도였고, 80여 년 뒤 콜럼버스의 배도 크기로 치면 중국 선박의 절반 수준이었다. 개빈 멘지스는 「1492년 콜럼버스」에서 “콜럼버스보다 71년 앞서 정화가 미 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1409년 그가 포르투갈인보다 먼저 인도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유추해보면 정화의 함대가 들여온 중국식 어망 기술을 아직도 인도인들이 쓴다는 얘기다. 포트리스 코치는 중국, 포르투갈, 인도가 버무려진 퓨전 도시다.
향신료 역사의 현장, 마타나체리
향신료의 역사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포트리스 코치 대신에 코치시의 남부 마타나체리란 마을이 낫다. 이 마을 역시 고풍스럽다. 마을 끝자락에는 향신료 창고와 함께 향신료를 거래하는 상가가 많다. 지금도 창고에는 향신료 부대가 가득 쌓여 있다. 이 마을에서 향신료 거래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포르투갈인도 아니고, 바로 유태인이다. 어떻게 유태인들이 여기까지 왔을까?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자. 세계 최강의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BC 63년 유대 땅을 정벌,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속국이 됐다. 문제는 칼리굴라 황제(AD 37~41년)가 자신을 신이라 칭하고 동상을 세우게 한 다음부터다.
우상숭배를 철칙으로 삼는 유태인들은 분노했다. 설상가상으로 세리들이 폭리를 취해 민심은 흉흉해졌다. 결국 AD 66년에 유태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젤로트라 불리는 열심당원들은 로마인 정착촌을 잇달아 공격했다. 발끈한 로마가 유태인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AD 70년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됐다. 신전만은 그대로 남겨두는 로마의 관례도 이번엔 예외였다. 젤로트 당원들은 이스라엘 남부 요새인 마사다로 숨어들어 결사 항전을 벌였다. 해발은 44m밖에 되지 않지만 해수면이 낮아 절벽의 높이는 440m나 되는 요새였다. 이 요새는 BC 37~BC 31년에 악정으로 유명했던 헤롯왕이 만든 것이다. 로마군은 노예를 동원해 절벽에다 침투로를 만들고 공격을 시작하려 하자 패배를 예감한 이스라엘 저항군은 자신들의 가족을 모두 죽인 뒤 자살했다. 로마군이 입성했을 때는 963구의 시신과 여자 2명, 아이 5명뿐이었다. 어쨌든 로마-유대전쟁의 사망자는 110만 명, 9만7천 명은 노예로 팔려갔다. 2천5백 명은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우다 사자 밥이 됐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유태인들은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된 AD 70년 이후 많은 유태인들이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다. 솔로몬왕의 사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었다. BC 772년 아시리아의 침공에 북이스라엘이 무너지면서 디아스포라가 시작됐다. 이어 BC 586년에는 느부갓네살왕이 신바빌로니아군을 이끌고 침략, 남유다도 멸망했다. 이때도 유태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로마와의 항전에 실패하고 예루살렘 멸망 후에는 비교적 로마의 통치가 약한 스페인으로 건너간 유태인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코치의 유태인들은 여기서 인도까지 흘러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인도의 뭄바이에 정착한 유태인을 베네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코치에 정착한 유태인을 코치(혹은 코친) 유태인이라고 부른다.
AD 72년 조국의 멸망을 보고 스페인에서 건너온 유태인들은 향신료 사업에 뛰어들었다. 가게에는 다윗의 별로 불리는 육각형의 별을 붙여놓고 장사를 했다. 중세에 그들의 상대는 아라비아 상인이었고, 아라비아 상인들은 실크로드를 건너가 인도의 향신료를 유럽에 전했다. 마을 끝에는 유태인 회당도 있는데 바닥에는 150년 가까이 된 중국식 타일을 깔았고, 100년이 넘는 유리 등이 걸려 있다. 유태인의 역사를 그려놓은 그림에는 기원전을 BC 대신 BCE로 써놓았다.
유태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Before Christ를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BCE는 ‘Before Common Era’로 그리스도란 이름을 쏙 빼놓은 것이다. 중국 타일은 인도인 통치자가 상인들에게 수입한 것이다. 유태인들이 이 타일에 소 피가 묻어 있었다고 얘기했고, 소를 신성시했던 인도인 통치자는 이 타일을 버렸다. 그걸 유태인들이 가져다 쓴 것이라고 한다. 유태인들의 ‘잔머리’도 놀랍다. 허나, 유태인 마을은 옛날처럼 북적거리지 않았다. 향신료 시장의 영화도 옛날이야기다. 유태인들도 대부분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다. 2차 대전 후 유태인의 숙원 사업인 이스라엘이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되자 2000년을 살아온 이들도 팔레스타인으로 떠났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 유태인은 11명뿐이다.
코치에서는 세계의 종교와 전쟁, 고대인들의 이주, 그리고 토착사회에 뿌리내린 문화사를 엿볼 수 있다. 역사는 강물처럼 흘러서 세계를 돈다. 남인도의 작은 도시 코치가 세계를 호령했던 명나라와 로마의 흔적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세상은 넓고도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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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다녀왔다는 사람들에게 인도 얘기를 꺼내면 반응이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뭔가 영혼을 자극하는 게 있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거긴 여행할 데가 못 된다는 것이다. 남인도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 이유를 먼저 짚고 가자. 이유는 간단하다. 인도는 다른 행성이다. 그들만의 독특한 사고와 생활방식이 존재한다. 여기에 힌두교의 뿌리도 깊다. 마르크스도 인도에 대해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뚜렷한 카스트가 존재하는 곳인데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다니…. 뭐 이런 한탄이었을 것이다. 힌두 신앙도 무시할 수 없다. 세계에서 채식이 가장 발달한 나라가 인도다. 어느 식당이나 채식 메뉴가 따로 있을 정도니까. 이유는 자이나교 같은 꽤 많은 종교가 육식을 철저하게 금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더럽고 불결하며 시끄러운 것이 싫다는 사람들도 좋아할 만한 인도다. 지역은 남인도의 코치다(코친이라고도 한다). 코치는 역사가 꽤 깊다. 코치는 오래전부터 무역항으로 유명했다. 유럽인들이 왜 인도를 찾으려고 그리 애를 썼는지 기억하는가? 이유는 향신료 때문이었다. 식품을 저장할 냉장 기술이 좋지 않았던 시기, 유럽에서 향신료와 소금은 돈이었다. 거의 썩어가는 고기에도 향신료를 뿌려 먹었다. 향신료가 금보다 비쌌다는 것이다.
그러한 향신료의 고장이 바로 코치다. BC 3세기부터 이집트, 페니키아, 바빌로니아 등과 향신료를 사고팔았던 고도다. 세계 최초의 문명의 발상지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다. 페니키아, 바빌로니아 같은 도시들이 그곳에서 발전했다. 초승달 지대의 문명은 이집트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 당시 어떻게 상인들이 인도까지 찾아갔을까? 일단 서양인들이 인도를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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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사랑스러운 유럽풍 마을 풍경
교회 옆길을 따라가면 마을을 훑어볼 수 있다. 호텔도 대부분 2, 3층 정도의 유럽 스타일이다. 바스코 다 가마란 호텔도 있다. 가이드는 “여기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머물 때 살던 집인데 기록은 없다”고 말했다. 그냥 이름을 갖다붙인 것인지, 아니면 진짜 그가 묵은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옆에는 다 가마의 이름을 딴 카페와 서점도 붙어 있다. 책방에 전시된 책 중에는 때 묻은 중고 서적도 많았다. 여행지에서 이런 서점을 만나면 부럽다. 때 묻은 책에서는 선배 여행자들의 정취가 배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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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깨끗하다. 벽은 하얗거나 노랗다. 낙서 한 자 없고, 벽보가 너절하게 붙어 있지도 않았다. 집집마다 화분을 내놓았다. 화원의 세련된 장미가 아니라 거리의 덩굴에서 막 딸 수 있는 ‘길거리 장미’같이 흔한 꽃이었다. 그래도 예뻤다. 카페 창문 아래서 소들이 화분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풀을 뜯었다. 게스트하우스의 노란 벽엔 자전거가 두어 대 세워져 있고, 건너편 호텔 앞엔 흰색 클래식 카가 주차돼 있었다. 관광용으로 제작한 앰배서더란 모델인데 1960년대풍의 고풍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차였다. 이 호텔 앞에서 중년의 백인이 눈인사를 해왔고, 배낭을 멘 백인 연인들이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소음과 경적, 판잣집과 빌딩 숲 사이에서 헤매던 뭄바이와는 딴판이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여행자들은 모두 바닷가로 슬슬 걸어 나간다. 포트리스 코치의 명물인 중국식 어망을 이용한 고기잡이를 보기 위해서다. 가로 세로 4~5m 정도의 거대한 사각형 뜰채를 물속에 담가놓았다가 건져내 물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우리로 치면 족대나 반두인데 1인용이 아니라 기중기같이 크다. 해안가에는 이런 어망이 10여 개 설치돼 있는데 정작 그물질을 하는 곳은 딱 하나다. ‘고’라는 어부는 손바닥만 한 바다 메기를 보여주며 “쓰나미 이후 물고기들이 사라졌다”고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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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년 그가 포르투갈인보다 먼저 인도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유추해보면 정화의 함대가 들여온 중국식 어망 기술을 아직도 인도인들이 쓴다는 얘기다. 포트리스 코치는 중국, 포르투갈, 인도가 버무려진 퓨전 도시다.
향신료 역사의 현장, 마타나체리
향신료의 역사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포트리스 코치 대신에 코치시의 남부 마타나체리란 마을이 낫다. 이 마을 역시 고풍스럽다. 마을 끝자락에는 향신료 창고와 함께 향신료를 거래하는 상가가 많다. 지금도 창고에는 향신료 부대가 가득 쌓여 있다. 이 마을에서 향신료 거래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포르투갈인도 아니고, 바로 유태인이다. 어떻게 유태인들이 여기까지 왔을까?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자. 세계 최강의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BC 63년 유대 땅을 정벌,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속국이 됐다. 문제는 칼리굴라 황제(AD 37~41년)가 자신을 신이라 칭하고 동상을 세우게 한 다음부터다.
우상숭배를 철칙으로 삼는 유태인들은 분노했다. 설상가상으로 세리들이 폭리를 취해 민심은 흉흉해졌다. 결국 AD 66년에 유태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젤로트라 불리는 열심당원들은 로마인 정착촌을 잇달아 공격했다. 발끈한 로마가 유태인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AD 70년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됐다. 신전만은 그대로 남겨두는 로마의 관례도 이번엔 예외였다. 젤로트 당원들은 이스라엘 남부 요새인 마사다로 숨어들어 결사 항전을 벌였다. 해발은 44m밖에 되지 않지만 해수면이 낮아 절벽의 높이는 440m나 되는 요새였다. 이 요새는 BC 37~BC 31년에 악정으로 유명했던 헤롯왕이 만든 것이다. 로마군은 노예를 동원해 절벽에다 침투로를 만들고 공격을 시작하려 하자 패배를 예감한 이스라엘 저항군은 자신들의 가족을 모두 죽인 뒤 자살했다. 로마군이 입성했을 때는 963구의 시신과 여자 2명, 아이 5명뿐이었다. 어쨌든 로마-유대전쟁의 사망자는 110만 명, 9만7천 명은 노예로 팔려갔다. 2천5백 명은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우다 사자 밥이 됐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유태인들은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된 AD 70년 이후 많은 유태인들이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다. 솔로몬왕의 사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었다. BC 772년 아시리아의 침공에 북이스라엘이 무너지면서 디아스포라가 시작됐다. 이어 BC 586년에는 느부갓네살왕이 신바빌로니아군을 이끌고 침략, 남유다도 멸망했다. 이때도 유태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로마와의 항전에 실패하고 예루살렘 멸망 후에는 비교적 로마의 통치가 약한 스페인으로 건너간 유태인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코치의 유태인들은 여기서 인도까지 흘러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인도의 뭄바이에 정착한 유태인을 베네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코치에 정착한 유태인을 코치(혹은 코친) 유태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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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Before Christ를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BCE는 ‘Before Common Era’로 그리스도란 이름을 쏙 빼놓은 것이다. 중국 타일은 인도인 통치자가 상인들에게 수입한 것이다. 유태인들이 이 타일에 소 피가 묻어 있었다고 얘기했고, 소를 신성시했던 인도인 통치자는 이 타일을 버렸다. 그걸 유태인들이 가져다 쓴 것이라고 한다. 유태인들의 ‘잔머리’도 놀랍다. 허나, 유태인 마을은 옛날처럼 북적거리지 않았다. 향신료 시장의 영화도 옛날이야기다. 유태인들도 대부분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다. 2차 대전 후 유태인의 숙원 사업인 이스라엘이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되자 2000년을 살아온 이들도 팔레스타인으로 떠났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 유태인은 11명뿐이다.
코치에서는 세계의 종교와 전쟁, 고대인들의 이주, 그리고 토착사회에 뿌리내린 문화사를 엿볼 수 있다. 역사는 강물처럼 흘러서 세계를 돈다. 남인도의 작은 도시 코치가 세계를 호령했던 명나라와 로마의 흔적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세상은 넓고도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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