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역사에 담긴 영욕의 세월, 일본의 대학살 현장 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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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몬 댓글 0건 조회 2,029회 작성일 11-08-2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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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몰려오던 날, 난징은 쑥대밭이 됐다. 공포에 떨었다.
초(楚)나라와 진(秦)나라의 왕기가 서려 있고, 육조고도(六朝古都)로서 문화를 꽃 피웠고, 명(明)나라의 도읍으로 중원을 호령하던 곳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점령 6주 동안 30만 명의 중국인이 목숨을 빼앗겼고, 2만여 명의 부녀자들이 강간당하는 사상 유례 없는 ‘대참극’을 당했다. 일본군에 의한 ‘난징대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청나라를 무너뜨린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 쑨원(孫文)이 1912년 수도로 삼았던 ‘역사의 땅’은 25년 뒤 다시 붉은 피로 물들었다.
대륙 침탈에 나서 먼저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 20여 만명은 1937년 12월10일 난징을 향해 맹렬한 공세를 시작한다. 10만의 중국군이 필사적으로 방어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12일 오후 2시쯤 일본군은 난징의 상징인 ‘중화문(中華門)’를 포격하고 13일 중국의 수도를 모두 장악했다.

당시 일본군 소위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츠요시는 ‘100명 목베기 경쟁’까지 벌였다. 특파원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기사의 제목이 ‘100명 목베기 경쟁, 신기록 수립’, ‘106 대 105, 연장전 돌입’이라 쓰였을 정도다.
백주 대낮에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고, 어린 소녀부터 할머니까지 집단 강간한 뒤 목이나 팔 다리를 잘라 길가에 버리기 일쑤였다. 참혹한 당시의 현장 사진은 어느 한 장,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어쩌면 저렇게 잔혹할 수 있을까, 꾹 눈을 감을 수 밖에 없다.

난징은 지금 60여년 전의 끔찍한 역사를 기념관에 남겨두고 장쑤(江蘇)성의 성도로서 역사와 문화를 복원한 것은 물론 경제 중심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폐허나 다름없던 중화문도 깔끔하게 복원돼 명나라의 영화를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중화문은 명나라 때 ‘취보문(聚寶門)’이라 불렸다. 난징고성의 정남에 자리 잡고 있으며, 13개 성문 중 가장 크다. 명나라 홍무 2년부터 8년(1369~1375년)까지 축성됐고, 1931년 중화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중일전쟁 때 무너진 성벽을 복원하면서 명나라 군사들을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 성루로 오르는 계단 옆에 초병으로 세워 놓았다.

중화문은 4개의 아치형 문과 3개의 옹성으로 구성됐다. 또 각 문에는 커다란 여닫이 목재문과 위 아래로 움직이는 ‘천근갑(千斤閘)’을 만들었다. 천근갑 안으로 총 27개 동굴이 있어 병사들은 물론 각종 군수물자와 식량을 비축할 수 있었다.
성문은 3층 구조로써 맨 위에 있던 ‘적루(鏑樓)’는 1937년 일본의 침략 때 무너진 것을 1995년 복원했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의 ‘중화문’이란 세 글자는 장제쓰(蔣介石) 총통이 쓴 것이다.
난징에는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朱元璋)과 황후 묘로 알려진 명효릉과 국부 쑨원을 모신 중산릉이 종산(鍾山)풍경구에 이웃하고 있다.
자금산(紫金山) 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명효릉은 정남쪽으로 매화산을 바라보고 있다. 동으로 자하호(紫霞湖)와 정기정(正氣亭), 정림산장(定林山庄)이 있고, 서남쪽으로 중산 식물원이 있다.

명효릉엔 둥근 능이 없다. 석축을 쌓아놓은 벽에 ‘차산명태조지묘(此山明太祖之墓)’라 쓰여있는 일곱자만이 초라하게 남아 있다. 그 위로 누각을 만들어 놓았지만 붉은 벽에는 여기저기 낙서만 무성하다.
중국의 국부 쑨원의 안식처 중산릉, 신해혁명의 정신을 이어간다
중산릉은 명효릉보다 많은 중국인들이 즐겨 찾는 성지다. 손중산은 중국 근대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혁명가로서 ‘국부’라 추앙받고 있기 때문이다.
쑨원은 1925년 3월12일 베이핑(北平)에서 서거했는데 왜 남쪽 땅 난징에서 영면에 들어간 것일까.
쑨원은 죽기 전 “내가 죽거든 자금산 자락에 묻어주시오. 난징은 임시정부가 있던 곳이고, 신해혁명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요”라고 측근들에게 당부했다. 그래서 타계 후 베이핑 향산(香山)의 벽운사(碧雲寺)에 잠시 영구를 모셨다가 난징의 종산(鍾山)에 능묘를 만든 뒤 이장한 것이다.
중산릉은 유명한 건축가 류앤쯔(呂彦直)의 역작으로 1926년 1월 공사를 시작해 1929년 완공했다. 하늘에서 본 전체 능원의 모양은 산 아래 중산의 동산을 종의 꼭지로, 반원형 광장을 종의 아래쪽 넓은 입으로, 능묘 정상의 묘실을 추로 삼았다. 전체 형상을 ‘자유의 종’ 처럼 디자인했다. 종은 경시(警示)의 뜻으로, 쑨원의 혁명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고전 양식과 서구 건축법을 융합한 설계자 류앤쯔는 36세였던 1929년 3월18일 중산릉의 완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중산릉은 ‘박애(博愛)’란 현판이 걸린 패방, 돌길, ‘천하위공(天下爲公)’을 써넣은 능문, 돌계단, ‘중국국민당장(中國國民黨葬~)’으로 시작되는 비석이 있는 비정(碑亭), 쑨원의 좌상을 모셔 놓은 제당(祭堂)과 묘실 등으로 꾸며졌다.
특히 쑨원의 ‘삼민정신’을 그래도 보여주는 ‘민족, 민권, 민생’이 3개의 아치형 문 위에 쓰여 있고, 정중앙에 하나 더 ‘천지정기(天地正氣)’란 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쓴 제당은 중산릉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이다.
제당 앞에 서면 끊임없이 쑨원의 묘를 참배하는 중국인들의 발걸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난징은 2천여 년 동안 영욕으로 점철된 땅이다. 근대에 들어서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공내전으로 어수선했다.
그러나 쑨원을 향한 중국인들의 존경과 숭배에는 이념을 떠나 언제나 한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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