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땅굴’이 있는 중국 제일의 옛 군사보루 장비(張壁)
페이지 정보
작성자 레몬 댓글 0건 조회 1,816회 작성일 11-08-23 16:24
본문
‘지상명보 지하암도(地上明堡 地下暗道)’
성벽만 잘 쌓아올린 보통의 군사 도시 같지만 속까지 드려다 보면 ‘천년의 땅굴’을 지닌 독특한 복합 역사문화 마을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금융의 발상지인 핑야오(平遙) 고성의 서남쪽 제시우(介休)시 관할 구역에 있는 ‘장비고보(張壁古堡)’는 중국 제일의 옛 군사보루(中國第一軍事古堡)다.
몐산(綿山) 아래, 용과 봉황이 휘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벌판에 산재한 촌락 속에서 진주처럼 고색창연한 빛을 낸다. 옛 보루와 땅굴, 궁전묘우(宮殿廟宇), 물고기 모양의 골목(魚型巷), 용 모양의 출입구(龍型口), 공작 유리 등 다양한 건축의 보물 창고다.

하(夏)나라와 상(商)나라의 고문화 유적지가 있고, 수나라와 당나라 때 만들어진 옛 지하도가 발견됐고, 금나라의 묘지와 원나라의 공연장이 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서민 가옥은 반풍수(反風水)적 풍격으로 건설했다.
제시우 동남쪽 약 10km 지점의 황토 구릉, 왜 해발 1040m의 험준한 땅에 군사 가능이 강한 요새를 만든 것일까.
지세는 평탄하지만 경관이 기이하다.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형에다 풍수에 맞지도 않게 성을 쌓고, 땅을 파고, 집을 지었다. 결국 주변보다 약 8m나 높아 멀리 바라보면서 방어하기 유리하다. 앞은 광활하지만 뒤는 몐산이 버티고 있어 적의 침입을 막고, 식량을 자급자족하면서, 전통 종교에 안주하며 살아가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수나라 장수 유무주가 당나라 이세민과 마지막 결전을 위해 만든 군사 마을
1300여년 전, 수양제는 세 차례나 고구려를 침략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국가 재정이 엉망이 된 것은 물론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졌다. 수년 동안의 기근까지 겹쳤다. 민심이 흉흉했지만 양제의 폭정은 끊이지 않았다. 지방에 세력을 갖고 있던 장수들은 ‘농심’을 업고 봉기하기 시작했다.
대업(大業) 11년(서기 615년), 수양제(隋煬帝)에게 발탁돼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을 지낸 뒤 태원도(太原道) 안무대사(安撫大使)를 거쳐 태원유수(太原留守)에 올라 장안성의 동쪽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이연(李淵)도 군사를 일으켰다.
이연은 617년 3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장안성을 함락한 뒤 당(唐)을 세우고 고조로 즉위한다. 그러나 수나라의 장수와 유민들은 당나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한다.
이 때 북방의 유목민 돌궐족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장수 유무주(劉武周)가 장비를 거점으로 반격을 꾀한다. 당나라 무덕(武德) 2년(619년) 유무주와 위지공(尉遲恭)이 장비에 제대로 된 성벽을 쌓고,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새로운 정권을 만드는데 앞장선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과의 일전을 위한 근거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장비의 옛 보문(堡門)은 견고하다. 성벽은 높고, 문은 두텁다. 커다란 문은 1명의 필부(匹夫)가 편하게 닫을 수 있지만 만부(萬夫)로도 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장비에선 남문과 북문을 일직선상에 배치하지 않았다.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 풍수설도 따르지 않았다. 북문 옹성의 성문에서 800m 정도 떨어진 작은 구릉을 향해 있는 조벽과 남문 조벽은 북두칠성의 일곱 번째 별자리를 상징하고 있다.
용의 몸처럼 S자로 이어진 중앙로, 남문과 북문을 마주 보지 못해
현재는 출입이 편리한 남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남문으로 들어서면 약 300m의 돌길을 만난다. 용의 몸을 상징하는 거리로써 S자 모양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길 양쪽으로 못이 있었는데 훗날 학교가 들어서면서 평지로 변했다고 한다. S자형 거리는 도교의 음양태극도에서 모양을 따온 것이다.
‘용의 거리(龍街)’라 불리는 중심로의 길가 성벽은 다른 쪽보다 높다. 주방이나 새롭게 문을 연 구멍가게 뿐 아니라 어느 집도 큰 길 쪽으로 문을 내지 않았다. 골목 입구의 문도 닫혀 있다. 골목은 골목마다 전란을 대비하고, 서로 긴밀하게 호응할 수 있어 두터운 옹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장비촌의 대가집은 마을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골목은 이리저리, 꼬불꼬불 이어지지만 교묘하게 막힌 듯 열려 있다. 입구가 있어 들어가면 출구를 좀체 찾을 수 없고, 다시 입구를 되돌아가려 해도 여의치 않다.
이런 탓에 상서롭고 조용한 느낌 속에서도 묘하게 스산함이 배어난다.
풍수와 반대로 건축했기 때문에 사당의 제단에 서면 마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누대에선 낮이면 알록달록한 깃발을 올리고, 밤이 오면 홍등을 밝힌다. 예로부터 ‘장비에서 불을 밝히면, 제시우에서도 그 빛을 본다(張壁点燈 介休看明)’란 말이 나올 정도다.

상중하 3층 구조의 3000m 땅굴, 상하좌우 사통팔달의 요새
땅굴은 입체적인 상중하 3층 구조로 이뤄졌다. 최상층은 지면에서 1m 안팎, 중간은 4~8m, 최하층은 17~24m의 깊이로써 폭 약 1.5m와 높이 약 2m의 지하 통로를 만들었다. 초소가 있고, 여물통이 있고, 식량 창고가 있고, 매복용 굴이 있고, 통기구, 배수구가 있다.
각층은 상하좌우로 이어져 공격, 방어, 후퇴, 저장, 탈출 등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출구는 모두 마을로 나있다. 민가나, 우물 속이나, 벼랑으로 이어져 땅 위에 있는 성곽, 거리, 대가집, 여염집과 함께 어우러진다. 출구는 규모가 크고, 개수도 많지만 체계적으로 만들어 고대 중국의 군사문화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장비촌의 건축은 특이하다. 보(堡) 위에 묘(廟)을 짓고, 당(堂) 위로 루(樓)를 세웠다. 방(房) 위에 각(閣)을 올리고, 성벽 사이에 숨겨진 문을 냈다. 이렇다보니 보중보(堡中堡), 항중항(巷中巷), 택중택(宅中宅), 문중문(門中門)의 체계가 만들어진데다 땅속으론 총 3000여m에 이르는 수당 시대의 지하통로까지 있어 사통팔달, 어느 한 곳으로 통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장비는 유교와 불교와 도교가 공존하고, 인간과 신과 자연이 서로 돕는 곳이다. 남북으로 이어진 촌락 주변에는 서로 다른 22개의 신묘(神廟)가 있다. 관제묘(關帝廟), 여조묘(呂祖廟), 용왕묘(龍王廟) 뿐 아니라 이 곳 사람들이 아직도 함께 떠받들고 있는 불조(佛祖)를 모신 공왕불(空王佛)까지 있다. 아담한 크기의 공왕불은 세 칸으로 나눠 있고, 공왕전의 역사와 문물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공왕전 지붕은 산시 지방 유리공예의 대표작으로 장식돼 있다.
이밖에 장비촌에서 가장 오래된 사당으로 유주무를 공양하는 가한묘(可罕廟, 가한은 돌골족이 유주무에게 봉한 벼슬 이름)를 비롯해 신비로운 철제 불상, 괴이한 쌍안이랑신(雙眼二郞神), 중국에서 유일한 공작람유리비(孔雀藍琉璃碑), 정교한 용학복영벽(龍鶴福影壁) 등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장비에선 순간이 천년이 된다. 전망할 필요가 없고, 돌아볼 필요가 없고, 신을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황토고원의 소리를 듣는 순간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이전글영화 ‘취권Ⅱ’의 촬영지, 10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화교들의 고향(僑鄕)' 츠칸 11.08.23
- 다음글‘동양의 작은 베니스’ 통리, 이름부터 풍요로운 '富土' 였다 11.08.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