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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중에도 '장서루를 지켜라'는 저우언라이(周恩來) 특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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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몬 댓글 0건 조회 1,660회 작성일 11-08-2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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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조우와 상하이 사이에 있는 난순(南潯)이란 작은 마을에 가면 오래된 장서루(藏書樓)가 있을 것이다. 반드시 보호하라.”
1949년 공산당 지도자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승기를 잡고 남쪽으로 진군하는 인민해방군들에게 특명을 내렸다.
국공내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이 장제쓰의 국민당군을 몰아붙였다. 항조우를 점령한 뒤 난순을 거쳐 상하이로 진격했다. 당시 제3야전사령관이었던 첸이가 직접 장서루를 방문하고 군인들을 주둔시켰다.
그해 10월1일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다.
 
가업장서루의 입구
 
 가업당 장서루의 입구
 
저우언라이와 첸이가 지켜낸 장서루가 바로 ‘강남 4대 장서루’ 중 하나이자 저장(浙江)성 도서관 고서적 서고인 ‘가업당(嘉業堂) 장서루’다. 지금도 10여만 권의 책과 조판(雕版) 3만여 개 등이 보관돼 있다.
이런 까닭에 저장성 후조우(湖州) 동쪽에 있는 난순은 ‘시서의 고향(詩書之鄕)’이자 ‘문화 마을(文化之邦)’로 명성을 날리며 긴긴 세월을 흘러오고 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이가 하사한 금빛 편액 '흠약가업(欽若嘉業)'에서 따온 이름 가업당
 
왜 ‘가업당’일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부이(溥義)가 이 집의 주인인 류청간(劉承幹)에게 하사한 ‘흠약가업(欽若嘉業) ’이란 네 글자에서 두 자를 취해 건물의 이름을 붙였다.
편액을 하사할 때 황제의 나이는 세 살. 너무 어려 글을 쓰지 못하자 황제의 스승이 대필한  네 글자는 아홉 마리의 용 문양에 둘러싸인 금편 액자에 남아 가업청에 걸려 있다.
 
흠약가업과 가업장서루 편액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이가 하사한 금빛 편액과 가업당
 
가업당 장서루는 민국 9년인 1920년 착공해 1924년 완공한 중서합벽 회랑식의 ‘口’자형 2층 건축물이다. 모두 52칸으로 나뉘며 정청인 ‘가업당’을 중심으로 대칭 구조다.
동쪽에는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誌)’의 송나라 때 판본이 보관돼 있어 ‘송사사재(宋四史齋)’라 불린다. 서쪽에는 집주인인 류청간과 아버지 류안란(劉安瀾)이 수집 소장하고 있던 ‘청조정속시췌(淸朝正續詩萃)’ 등 고본시사(古本詩詞)가 많아 ‘시췌실(詩萃室)’이라 부른다.
2층은 옛 경서를 모아둔 ‘희고루(希古樓)’, 진장본 ‘사고전서(四庫全書)’ 1954권을 보관 중인 ‘여광각(黎光閣)’, 옛 사서를 보존해 둔 ‘구서재(求恕齋)’로 이뤄졌다.
가업당장서루 옆에는 류청간의 할아버지이며 난순의 거부를 일컫는 ‘사상(四象)’의 으뜸이었던 류융(劉鏞) 소유의 소연장(小蓮庄)이 있다. 소연장은 ‘류원(劉園)’ 이라고도 불리는 난순 5대 정원 중 하나다.
 
소연장 동승각과 하화지
 
 소연장의 등승각(왼쪽)과 하화지(荷花池)
 
동서합벽의 건축물과 연꽃 연못이 어우러진 강남의 원림 소연장(小蓮庄)
 
원나라 초 후저우에 온 화가 자오즈앙(趙子昻)이 ‘연화장(蓮花庄)’을 짓고 ‘소연장’이라 부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연장의 정원은 외원과 내원으로 나뉜다. 외원에는 연꽃 연못과 석교 등이 류씨 집안의 휴양 피서지인 동승각(東昇閣)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일명 ‘소저루(小姐樓)’로 불리는 동승각은 소연장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식 건축 양식과 중국의 탑 건설법을 결합한 건축물이다. 안에는 화려한 꽃 장식 기둥이 있고, 백엽창(百葉窓)은 이국적 풍취를 물씬 낸다.
난순은 거상의 고장이다. 잠사 농업을 기반으로 활발한 비단 거래가 이뤄졌다. 특히 남송부터 번성하기 시작했고, 명나라 중엽 난순 교외의 칠리촌에서 생산한 칠리사는 최상품으로 인정받아 ‘호사유칠리우가(湖絲唯七里尤佳)’라는 칭송을 들었다. 청나라 중엽부터 난순의 경제는 크게 번성하면서 청말민초까지 전국 비단 무역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부자가 많았다. 민간에선 ‘사상(四象) 팔우(八牛) 칠십이금구(七十二金狗)’란 말로 부호들을 표현했다. 거부 중에 거부인 사상 중 하나인 유씨 집안은 이들은 많은 이야기와 동서합벽의 문화 유적을 남겼다.
 
류씨제호
 
 중국식과 로마식 건축 양식을 융합한 류씨제호
 
류씨와 장씨 등 난신의 거부 '사상(四象)'들이 남긴 서양식 건축물
 
로마식 건축물인 ‘류씨제호(劉氏梯號)’도 눈길을 끈다. 이 건물은 류융의 셋째 아들 류안생(劉安泩)의 집이다. 류안생은 자가 연숙(淵叔), 호가 제청(梯靑)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생사 기계 492대나 수입하고 일본에서 선진 잠사 기술을 받아들이는 등 개방적인 사고와 경영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뒤 문물 수집가로 취미 생활을 즐겼다.
남, 중, 북 세 구역으로 나뉜 류씨제호는 중앙에 배치한 전통 방식의 청(廳), 당(堂), 루(樓), 상(廂)을 주체로 남쪽과 북쪽은 중국식 건축과 로마식 건축을 융합했다.
류씨제호의 별칭은 ‘숭덕당(崇德堂)’이지만 민간에서는 붉은 집이란 뜻의 ‘홍방자(紅房子)’라 부른다.
류씨 집안과 더불어 사상 중 하나였던 장씨 가문도 동서가 융합된 건축 유산을 남겼다. 장스민(張石銘) 고택이 바로 그것이다.
 
소양루
 
 장스민 고택의 바로코풍 건축인 소양루
 
장스민은 난순 거부 장슝쉔(張頌賢)의 손자로 자가 스민(石銘)이었다. 평생 돌을 좋아해 ‘스민’이란 자를 얻었고 서화, 비각, 서적의 애호가였다. 10만여 권의 책을 소장한 ‘난순의 4대 장서가’ 중 하나였다. 청말민초의 문인 등 명사들과의 교류가 잦았고, 항저우에서 ‘스링인스(四泠印社)’라는 출판사를 차릴 때 발기인이자 후견인으로 참여했다.
비단 장사와 소금 장사 뿐 아니라 상하이에서 금융업, 부동산업까지 크게 벌여 재력을 쌓았다.
청나라 광서 25년(1889년)부터 30년(1906년)까지 6137㎡의 넓은 땅에 건설한 저택은 강남의 전통적인 건축 구조와 프랑스 르네상스 시기의 건축 흐름을 반영한 예술품이다. 석조, 목조, 전조 등 전통적인 기법으로 곳곳을 장식했다. ‘여청(女廳)’이라 불리는 당루에는 꽃 문양의 창과 채색 유리, 파초청(芭蕉廳)의 회랑 바닥에는 프랑스제 타일 등을 마감재로 사용해 동서문화예술의 조화를 꾀했다. 프랑스식 무도장을 꾸며놓은 소양루(小洋樓)는 바로크풍의 2층으로 건축했다.
전조가 아름다운 고택의 요문(腰門)에는 청말의 명필 우간(吳淦)이 쓴 ‘죽포송무(竹苞松茂)’가 새겨져 있고, 주문(主門)에는 서예가 우창시(吳昌碩)이 쓴 ‘세덕작구(世德作求)’란 글귀가 선명하다.
 
의 덕당
 
 장스민 고택의 의덕당
 
장스민 고택의 대청은 ‘의덕당(懿德堂)’. 옛날 부녀자들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던 ‘의’자를 붙인 것은 일찍 남편을 잃고 자신을 뒷바라지한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의덕당의 대들보는 존귀함을 상징하기 위해 금박을 둘러놓았다.
난순에서 장왕묘(張王廟)로 알려진 광혜궁(廣惠宮) 앞에 광혜교(廣惠橋), 신교(新橋)라 불리는 동쪽의 홍제교(洪濟橋), 원래 이름이 심계교(潯溪橋)인 동대가 서쪽의 통진교(通津橋) 등 옛 다리 3개도 명물이다.
 
 
물길 따라 뱃길 따라 백간루(百間樓)의 천년 세월 두둥실
 
홍제교와 통진교 사이의 400여m 물길을 따라 양쪽으로 펼쳐진 100여채의 민가 ‘백간루(百間樓)’ 주변은 서민들의 삶이 그대로 묻어난다.
옛날 명나라 때 예부상서를 지냈던 둥펀(董汾)의 5대 손자와 백화루(白華樓)의 주인인 마오쿤(茅坤)의 손녀가 혼례를 치렀다. 둥씨 집안에 방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마오 가문은 산파를 보내 “신부와 함께 100명의 시녀를 보내려 하는데 방이 부족하니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랑 집에선 “바로 100채의 집을 지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이렇게 둥씨 가문에서 만든 100채의 집을 주변 사람들이 ‘백간루’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백간루
 
 난신의 백간루와 물길
 
백간루는 지금 물길 양편의 옛 가옥을 일컫는 말이지만 명나라 건축의 풍격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청나라 건축의 흔적도 남아 있다.
난순은 ‘비단(絲綢之府)’으로 부를 쌓고, 문화와 학문을 일으킨 수향(水鄕)이다.
4,000~5,000년 전 선사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고, 남송 이후 수륙의 요충지였다. 순시허(潯溪河)가 흘러 ‘순시’라 불렸고, 순시 남쪽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상점과 집들이 들어서자 ‘난린(南林)’이라고도 했다.
그러다 남송 순유(淳裕) 21년(1252년) 이곳에 진(鎭)을 만들면서 두 이름의 앞 글자를 모아 ‘난순’이란 새 이름을 얻은 동서합벽(東西合璧)의 부자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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