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수향' 우전이 낳은 위대한 작가 마오둔, 신문학운동과 공산주의 운동 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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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몬 댓글 0건 조회 1,756회 작성일 11-08-2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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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년은 즈예넨(子夜年)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1933년 6월 평론가 취추이바이(瞿秋白)는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오둔(茅盾)의 신작 ‘한밤 중(子夜)’을 읽고 난 뒤 “이 소설은 중국 최고의 사실주의 장편소설”이며 “이 소설의 출판은 중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고 평했다.
마오둔은 중국 근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921년 1월 정전저(鄭振澤), 왕퉁자오(王統照) 예샤오쥔(葉紹鈞) 등과 함께 근대 중국 최초의 순문학 단체인 ‘문학 연구회’를 조직해 5ㆍ4 신문학 운동을 펼치는 동시에 상하이 공산주의자 모임을 이끄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궈머뤄(郭沫若)가 이끈 창조사나 루신(魯迅)의 미명사와는 또 다른 색깔을 지닌 좌파 단체를 만들어 과거 속에 잠들어 있던 백성들을 일깨우는데 앞장 섰다.
마오둔은 1949년 신중국이 들어선 이후 초대 문화부장과 전국작가협회 주석을 역임하는 등 예술과 행정에서 모두 인정받은 혁명 작가였다. 중국 현대문학사에는 위대한 작가로서, 공산당에는 최초 당원 중 한명이자 고위 관료로서 이름을 날렸다.

마오둔이 태어난 곳이 바로 강남수향(江南水鄕) 우전(烏鎭)이다. 옛집은 남대가로의 끝, 위엔언스(圓恩寺) 후퉁(胡同)에 있다.
마오둔 고택은 1988년 1월 보호 문화재로 지정됐다. 마오둔이 세상을 떠난 뒤 이 집은 기념관이 됐다. 지금은 작가의 초판본 작품, 편지, 어린 시절의 작문 원고 등을 전시하고 있다.
총 800㎡의 대지에 건평 500㎡ 규모로 전원과 후원으로 나뉜 작은 사합원 구조의 전통 가옥이다. 단정하게 정리된 마당 가운데에는 백옥으로 만든, 높이 83cm 정도의 마오둔 흉상이 자리 잡고 있다.
마오둔 고택의 전원(前院)엔 모두 15개의 방이 있다. 서쪽의 회의실과 장서실은 원형대로 잘 보존돼 있다. 창문 곁에는 마오둔의 소설 ‘한밤 중’과 ‘임씨네 가게(林家鋪子)’의 내용을 새겨놓은 목조(木雕)가 붙어 있다.
이층 구조인 후원(後院)의 중청에 들어서면 ‘유지경성(有志竟成)’이란 편액과 ‘문학거장 마오둔’이란 글 앞에 젊은 날의 마오둔 흉상이 놓여 있다. 한 때 이 자리에는 전통 의상 차림의 입상이 있었다. 이 곳에는 주로 마오둔의 아내 공더잔(孔德霑)의 유품들을 모아 놓았다.

본명이 선더홍(沈德鴻)인 마오둔은 1896년 7월4일 이 곳에서 태어나 1910년 봄까지 13년 동안 살았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훗날 “내 삶의 가장 큰 스승은 어머니였다”고 말할 만큼 과부 어머니는 마오둔이 작가로, 혁명가로 살아가는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안빙(雁冰)’이란 자(字)로도 널리 알려진 마오둔은 필명이 아주 많다. 마오둔 뿐 아니라 랑순(郞損), 솬주(玄珠), 팡비(方璧), 즈징(止敬), 푸라오(蒲牢),, 싱티엔(形天), 싱펑(刑風) 등을 사용했다. 그 중 마오둔과 푸라오를 가장 즐겨 썼다.

‘선안빙’은 본명을 드러낼 수 없어 필명을 썼다. 국민당은 난창(南昌) 봉기가 일어나자 가담자 뿐 아니라 좌파를 분류된 문화 지식인에 대한 극심한 박해와 대규모 검거에 나섰다.
1927년 우한(武漢)에서 좌익 활동을 하던 마오둔도 그해 7월 난창 봉기에 참여한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마오둔은 우여곡절 끝에 상하이로 돌아온다. 이 때 국민당 반동파에 대한 지명 수배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본명 대신 ‘마오둔’이란 필명으로 창작과 다른 문학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루신과 예샤오쥔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안빙은 바깥 출입도 자유롭지 못했고, 마음껏 일하기도 어려웠지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문사와 출판사들이 그의 글을 받아주지 않았다. 마오둔의 마음 속에선 ‘마오둔(矛盾)’ 이란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원고지 한 켠에 본명 대신 필명으로 ‘모순’을 썼다.
좌익 수배령에 '선안빙' 이란 본명 쓰지 못하자 '마오둔' 필명으로 소설 창작
어느 날, 마오둔은 작가이자 교육가이며 출판인으로 마당발이었던 예샤오쥔에게 원고를 보냈다. 예샤오쥔은 마오둔의 소설을 읽고 난 뒤 너무 기분이 좋아 곧바로 ‘소설월보(小說月報)’에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름이 걸렸다. ‘마오둔’은 철학 명사일 뿐 사람이 쓰는 이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오(矛)’는 사람의 성이 될 수 없으니 ‘마오’ 위에 ‘풀 초(草)’를 올려 발음이 똑같은 ‘띠 모(茅)’를 만들어 ‘마오둔(茅盾)’이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선안빙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오둔’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첫 작품이 바로 ‘환멸(幻滅)’이었다.

소설 ‘환멸’은 훗날 ‘동요(動搖)’, ‘추구(追求)’로 이어지는 ‘식(蝕) 3부작’이 됐고, ‘한밤 중(子夜)’, ‘무지개(虹)’, ‘농촌삼부곡 - 춘잠(春蠶) 추수(秋收) 잔동(殘冬)’, '부식(腐蝕)‘ ’2월 꽃처럼 붉은 낙엽(霜葉紅似二月花)‘과 함께 마오둔의 대표작으로 명성을 얻었다.
마오둔은 고향 우전에서 비교적 빨리 계몽 교육을 받았다. 8세 때 우전 리즈(立志) 서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한가할 때는 부모의 허락 아래 ‘서유기’, ‘삼국연의’, ‘수호전’, ‘요재지이(聊齋志異)’, ‘유림외사’ 등 고전을 탐독하면서 전통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을 키웠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소학교 시절의 작문 중에 우국우민의 마음까지 드러낼 정도였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마오둔은 78세였던 1974년 다시 고향집에 내려와 1981년초까지 머물다 3월27일 베이징에서 85년 동안의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마오둔은 말년에 장편소설의 창작을 장려하고, 사회주의 문학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사재 25만위안을 출현해 ‘마오둔 문학상’을 제정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작가의 이름을 붙인 문학상을 주관하는 중국작가협회는 1981년 바진(巴金, 2005년 10월17일 작고)을 위원장으로 추대한 뒤 1982년부터 ‘마오둔 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저장(浙江)성 퉁샹(桐鄕)시 북쪽으로 17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천년고진은 ‘우전패루’와 이어지는 흥화로(興華路)를 중심으로 동과 서, 경항(京杭) 대운하에서 들어오는 서쪽 물길(西市河)부터 동대가의 재신만까지 흐르는 물길(東市河)을 따라 남북으로 나뉜다.
동쪽 물길을 따라가면 인수교(仁壽橋)부터 재신만(財神灣)까지 동대가(東大街)가 계속된다. 옛 마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전통 가옥과 이야기가 있는 명소들이 늘어서 있다.
우전패루를 거쳐 다리를 건넌 뒤 흥화로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이 마오둔의 옛집이고, 그 옆으로 리즈 서원이 있다. 인수교와 남북으로 이어지는 횡가(橫街)의 좌우에는 전폐관(錢幣館)과 목조관(木雕館)이 있다.

우전의 특산품, 쪽빛 천에 꽃무늬 새긴 '남인화포'와 왕실 진상품이던 '삼백주'
동대가는 여러 갈래의 골목로 이어진다. 염점롱(染店弄)에는 송나라 때부터 전해지는 남색 꽃 문양이 유명한 홍위엔타이(宏源泰) 염방이 있고, 잇달아 ‘천년고진에서 백년의 술을 빚는다’는 술도가 ‘고공생조방(高公生糟坊)’도 전통의 향을 풍기고 있다.
그리고 다음 골목인 주가롱(周家弄)과 공가롱(孔家弄) 사이에는 민속 의상과 세시풍속 등을 보여주는 민속청과 화려한 침대를 전시하고 있는 강남백상관(江南百床館)이 자리 잡고 있다.
홍위엔타이 염방의 남인화포(藍印花布)와 고공생조방의 삼백주(三白酒)는 이곳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우전의 남책(南柵)에서 창업해 청나라 광서 연간에 동책으로 옮긴 염색집의 크고 넓은 마당엔 건조를 위해 긴 장대 위에 널어놓은 천들이 장관이다. 이 천들은 옷 뿐 아니라 머플러, 가방, 우산 등 각종 수공예품으로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삼백주는 ‘흰 쌀(白米)와 하얀 누룩(白麵), 맑은 물(白水)’로 빗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명나라 때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수공 생산법을 고집하고 있는 고공생조방에서 만드는 술은 알코올 도수가 55도인 삼백주, 12도인 백나미주(白糯米酒), 4도인 첨백주(甛白酒) 등 세 가지 상품이 있다.
명나라 때는 20여 곳이었던 술도가도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줄어들기 시작해 고공생조, 순흥(順興), 영성(永盛) 등이 유명했지만 지금은 ‘고공생조방’만이 전통술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명 태조에게 진상했던 삼백주는 향이 짙고, 맛이 부드럽고, 입안에서 거침이 없고, 잔잔한 뒷맛이 가시지 않는 명주로 멀리까지 이름을 떨쳤다.

동쪽 끝 재신만은 ‘十’ 모양의 지형 탓에 원래 배를 돌리는 곳이었다. ‘전선만(轉船灣)이라 불리다가 근처에 있는 재신당(財神堂)의 이름을 따 ’재신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술과 차를 마실 수 있는 휴식 공간이 있고, 지붕이 있는 회랑 모양의 ’봉원쌍교(逢源雙橋)‘가 남북을 잇고 있다.
우전 사람들에게 뱃길은 삶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었다. 물길을 따라, 대대로 전통 문화와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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