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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 맨손으로 일군 태항산(太行山) 궈량동(郭亮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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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몬 댓글 0건 조회 1,603회 작성일 11-08-2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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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년 전, 대륙에선 진한(秦漢)시대가 시작됐다.
진협(晋陜) 일대에 살던 이들이 난리를 피해 이동했고, 서한 말기부터 촌락을 형성했다. 지금의 궈량춘(郭亮村)이다
왕망(王莽) 시대(서기 8~23년), 동한의 장수 궈량은 의군을 이끌고 왕을 지켰다. 수 차례 관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를 거듭하다 태항산(太行山)까지 밀렸다. 관군은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궈량을 진압하지 못하자 궈량의 부장 조우쥔(周軍)을 매수했다.
태항산의 지리에 밝은 조우쥔은 산문을 봉쇄해 궈량의 군사들을 고사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가파른 절벽 위에다 배수의 진을 친 궈량이 꾀를 냈다.
시간이 갈수록 양식이 바닥나는 등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지만 사병들에게 북을 치게 하고, 절벽 끝 나무에는 산양을 묶어 놓았다. 북 소리가 날 때마다 산양은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동작을 반복했다.
 
허난성 태항산의 절벽 터널
 
 허난성 태항산의 험준한 절벽에다 원초적인 방법으로 뚫어놓은 터널의 채광 구멍
 
조우쥔과 관병들은 궈량이 큰 싸움을 준비한다고 착각해 잠시 공격을 미뤘다. 궈량은 이 틈을 타 재빠르게 절벽에 밧줄을 걸고 병사들을 아래쪽으로 내려 보낸 뒤 산시(山西)성으로 이동시켰다.
 
궈량의 지략, 현양뢰고(懸羊擂鼓)의 고사가 생긴 벼랑
 
며칠 뒤 산양은 굶어 죽었다. 북소리도 그쳤다. 조우쥔은 그제야 궈량의 ‘현양뢰고(懸羊擂鼓)’ 지략에 속았음을 깨달았다. 하도 기가 막혀 피를 토하고 횡사했다. 절벽 아래 조우쥔이 묻힌 곳을 ‘조우쥔장(周軍場)’이라고 한다.
‘궈량춘’, ‘현양뢰고’, ‘조우쥔장’의 이야기는 모두 이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후세 사람들은 궈량의 용기와 지략을 기리기 위해 궈량이 주둔했던 절벽도 ‘궈량야(郭亮崖)’라 부른다.
 
 
태항산 궈량춘 주변의 풍광, 절벽 위에 전망대가 보인다.
 
 궈량춘의 주변의 태항산 풍광, 오른쪽으로 잘 다듬어놓은 듯한 반석 전망대가 보인다. 
 
궈량춘은 허난(河南)성 신시앙(新鄕)시 휘이(輝)현에서 서북쪽 60km 떨어진 해발 고도가 1700m나 되는 태항산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형성된 자연 부락이다. 현재 83가구에 320명정도가 살고 있다.
행정구역상 허난성 태항산에 속해 있지만 만선산(萬仙山)과 잇 닫아 있고, 산시성 진청(晋城)시 링촨(陵川)현과도 접해 있다.   
 
'세계 9대 불가사의'라 불리는 절벽길의 인공 터널  
 
지금은 ‘세계 9대 불가사의’라 일컬어지는 인공 터널 ‘궈량동(郭亮洞)’으로 더욱 유명하다.
예로부터 궈량춘에서 외부와 통하는 길은 오직 협곡과 절벽 위를 이어주는 ‘천제(天梯)’ 뿐 이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오르내리는 것도 너무 위험했다.
 
천제 안내판
 
 궈량춘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천제’ 안내판. 총 720계단으로 폭 1.2m(좁은 곳은 40cm)이고, 명나라 때부터 만들어졌고 1977년 이전에는 궈량촌에서 외부와 통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다는 설명이 보인다.
 
1971년 가을, 마을 서기였던 선밍신(申明信)의 제의로 선신푸(申新福), 왕휘이당(王懷堂), 선푸구이(申福貴) 등이 밧줄을 사용해 절벽의 높이와 거리를 측정했고 전통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상급기관의 전문가에게 터널 공사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마을 사람들도 인공 터널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자발적으로 산양, 약초 등을 내다 팔아 해머, 정 등 돌 깨는 장비를 구입했다. 전기도 없고, 기계도 없는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13명의 ‘동굴 굴착 돌격대’를 조직했다. 허리에 줄을 감고 절벽에 매달려 정으로 돌을 깨 홍암절벽 곳곳에 일렬로 발파구를 만들었다.
13명의 청년들은 궈량춘의 유일한 절벽 길인 ‘천제’ 아래 모여 반드시 절벽을 뚫어 길을 내겠다고 다짐하고 1972년 3월9일 본격적인 터널 공사에 들어갔다.
 
절벽 길
 
 절벽의 허리 부분을 횡으로 뚫어서 만든 궈량 터널
 
궈량춘은 해발 고도가 높고, 경작지가 적고, 농사가 가능한 서리 없는 날도 짧았다. 1년에 단 한번 농작물을 파종해 살아가는 가난한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13인의 돌격대’도 0.12위안의 식비로 모두가 버텨야 했다. 강냉이로 만든 죽, 떡, 찜이 하루 세끼의 전부였다. 매일 한 사람에게 배당한 옥수수가 두근 밖에 되지 않았다.
 
산간 마을 '13인 돌격대'가 목숨을 걸고 5년만에 완공
 
1975년 말, 공사는 가장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에겐 더 이상 내다 팔 산양도, 나무도 없었다. 식량도 떨어졌다. 어느 곳을 찾아봐도 동전 한 닢 나올 곳이 없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하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팔을 걷고 나섰다. 새벽 5시에 일어나 5km의 산길을 올라가 두더지처럼 구멍을 파고 또 팠다. 마을 서기에겐 도화선과 폭약 등 굴착 장비를 빨리 구해오라고 다그쳤다.
궈량춘 절벽의 평균 높이는 약 105m. 절벽 중간에서 발파 작업을 하려면 밧줄이 필요했지만 이를 살 돈이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자 집집마다 소의 고삐를 풀어와 하나 하나 이어서 밧줄을 만들었다.
공사 인부로 나선 청년들은 목숨을 건 열정으로 절벽의 도랑을 길로 바꿔 놓았다.
 
절벽 길과 터널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궈량의 길과 터널
 
궈량춘 사람들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5년 동안 거대한 절벽에서 2만6000㎥의 돌덩어리를 캐냈고, 정 12톤을 마모시켰고, 8파운드짜리 쇠추 4000개를 소모했다.
70세의 노인부터 10대의 소녀까지 공사에 참여해 하다못해 돌가루를 실어 나를 정도였다. 커다란 돌덩어리는 손으로 들어서 옮기고, 작은 것은 광주리나 바구니에 담아 어깨나 머리에 걸쳐 운반했다. 손가락마다 피가 터지기 일쑤였다.
가장 힘든 공정 때는 현 교육국의 전문가 100여명이 위엔융(原永) 국장과 함께 공사 현장에 합류, 빠른 진행에 힘이 돼 주었다.
 
60년대 태항산에 만든 '人工天河' 紅旗渠와 함께 1977년 일궈낸 또 하나의 기적
 
마침내 1977년 5월1일 ‘절벽장랑(絶壁長廊)’이라 불리는 궈량 터널은 왕후이당 등 희생자들을 남기고 공식 개통됐다.
궈량동은 절벽을 횡으로 1.25km나 뚫어나가면서 높이 5m, 폭 4m로 만든 터널이다. 태항산 동쪽에 만든 ‘인공천하(人工天河)’ 홍치쥐(紅旗渠)와 함께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실례이자 가난한 민초들이 일궈낸 ‘기적’으로 자리매김 했다.
궈량 터널에는 절벽 쪽으로 크고 작은 구멍 35개가 나있다. ‘천창(天窓)’이라 불리는 통풍구이고 채광창이자 전망대다. 공사 중에는 굴에서 캐낸 돌을 밖으로 내놓는 배출구 역할까지 했다.
 
궈량동의 천창
 
 인공 터널을 만들기 위해 깎아지른 절벽에 파놓은 천창들 
 
궈량춘에는 곽씨와 더불어 신씨들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원말명초, 신씨 일가는 난징에서 관직을 맡고 있는 권세가였다. 그러나 주원장이 권력을 잡자 도읍의 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인적 청산’을 단행했다. 신씨 가문은 서역의 칭하이(靑海)로 쫓겨 갈 상황이 되자 산시로 도주했다. 수백여명의 일가 친척의 식사를 한꺼번에 만들 수 있는 커다란 가마솥을 쪼개 집집이 나눠줬다. 동서로 흩어졌다 훗날 다시 만나면 원래대로 붙일 심산이었다. 그래서 ‘큰 가마솥 신(大鍋申)씨’라 불린다.
당시 궈량춘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신씨들은 지금도 이 곳에 살고 있고, 그  후손들이 바로 궈량동을 만드는데 앞장 선 사람들이다.
궈량춘에는 항일 전쟁 중에 팔로군 사령부가 있었고, 산 아래는 리샹양(李向陽)이 이끄는 ‘평원유격대’의 근거지였다.
 
궈량춘 안내판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진 궈량춘 안내판
 
 
'중국의 그랜드캐년' 태항산 대협곡을 끼고 있는 최고의 드라마 촬영지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태항산의 협곡을 끼고 온갖 풍파를 이겨낸 궈량춘은 ‘중국 제일의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 받고 있다. 셰전(謝晉)이 연출한 ‘청량사의 종소리(淸凉寺的鐘聲)’ 등 40여편의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태항산 일대에는 인간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 궈량 터널 외에도 5곳의 인공 터널이 더 있다. 쿤산(昆山) 터널, 시야(錫崖) 터널, 후이롱(回龍) 터널, 징디(井底) 터널, 전쟈위안(陳家園) 터널 등이다.
벼랑 위의 궈량춘과 벼랑 허리에 뚫어놓은 궈량동은 변함없이 옛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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