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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상하이의 문화 키워드 '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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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몬 댓글 0건 조회 1,536회 작성일 11-08-2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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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나루, 전차, 한성순보⋯
조선 600년의 영욕이 서린 옛 서울이 남겨놓은 ‘문화유산’들이다. 비운의 대한제국을 지나 일제 강점기를 맞아야 했고, 봉건제도가 무너지면서 근대화가 이루어진다.
100년 전 서울에 개화의 물결이 밀려왔듯 대륙의 포구 상하이(上海)에도 변화의 거센 물결이 일렁거렸다.
서양식 건축물이 속속 들어서더니 고급 사교 클럽이 생기고, 영화관과 사진관까지 등장해 삶의 행태를 바꿔놓았다. 상업이 발전하면서 돈의 흐름이 커지자 신흥 자본가가 생기고, 금권을 지키기 위한 ‘주먹 세계’도 형성된다.
중국인들은 ‘올드 상하이’를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 상하이 엑스포를 맞아 ‘올드 상하이’를 떠오르게 하는 ‘열 개의 문화 키워드’를 환치우요우빠오(環球游報)가 소개했다. 

1927년 상하이탄 모습
 1927년의 상하이탄

상하이 사람, 그들만의 사투리  ‘농하오(侬好)’
“농 하오(侬好)”
상하이 사람들은 그들만의 인사말이 있다. 상하이 사투리 중 가장 상하이적인 말은 ‘농하오’다. 오래 전부터 상하이 사람들은 홍콩인들이 광둥어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투에는 상하이 특유의 맛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스타 루안링위(阮玲玉)는 표준어를 쓰지 않았고, 학교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교과서를 상하이 사투리로 강의했다.
지금도 상하이 사투리는 외지인과의 거리를 두는 배타적인 언어로 사용된다.

개항의 영욕이 깃든 나루터 둘러보기(拜码头)
상하이는 항구다. 먼 옛날 작은 포구였지만 개화기를 맞아 활력 넘치는 나루터로 변한다. 서양의 화물선까지 드나드는 국제적인 교역항으로 발전한다. 황푸(黃浦)강을 따라 황해로 나가면 망망대해.
물산이 풍부하고, 돈 흐름이 커지면 조직이 생기는 법. 상하이탄은 다양한 형태의 사조직들이 세력을 분점하게 된다.
상하이 푸서 지구인 와이탄이 바로 옛 나루터다. 황푸강을 따라 커다란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고, 은행이나 호텔들이 자리 잡았다.
상하이 사람들은 ‘빠이마터우(拜码头)’란 세 글자 속에서 올드 상하이를 생생하게 추억한다.  상하이의 호방함이 있고, 유럽풍 십리 길을 따라 생존을 위한 냉혹함과 세상사의 영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탓이다.

화보집 량요우
 화보 잡지 ‘량요우’

사진으로 상하이를 담아낸 화보집 ‘량요우(良友)'
꽃을 들고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소녀의 불그스레한 볼에 작은 우물이 파였다.  
1926년 2월 창간한 ‘량요우’는 1면 사진으로 꽃을 든 채 보조개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소녀를 선택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일제가 물러간 뒤 은막의 스타로 떠오른 후지에(胡蝶)였다. 후지에는 ‘량요우’와 더불어 당당하게 상하이를 대표하는 스타로 성장했다.
량요우는 1926년부터 1945년 10월까지 20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면서 통권 172호까지 발간했다.
량요우는 총 3만2000장의 사진 중에서 400여장의 컬러 사진을 게재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등 발전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상하이 여인의 한을 그린 소설 ‘장한가(長恨歌)’
여류작가 왕안이(王安忆)의 소설 ‘장한가(長恨歌)’는 상하이탄의 골목 골목을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형적인 상하이 여인으로 미인대회에서 3위에 입상한 왕치야오(王琦瑶)의 비애와 환희가 교차하고, 애증이 녹아 있다. 또 배금주의와 퇴폐주의적 분위기를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싼마오 유랑기의 표지
 싼마오 유랑기의 표지

가난해도 밝은 소년 ‘싼마오’의 유랑기(三毛流浪記)
장루오핑(張樂平) 원작의 만화 ‘싼마오 유랑기’는 상하이의 어두운 구석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빈곤한 서민들의 이야기다.
부자들에게 상하이탄은 최고급 사교장 파라마운틴(百樂門)과 따꽝밍 영화관(大光明影院), 화리엔 상점(華聯商場)과 화위엔양팡(花園洋房)으로 기억된다. 이들의 눈에는 가진 것 없는 ‘싼마오’의 생활은 곧 지옥이다.
만화의 주인공 싼마오는 비록 옷이 없어 춥고, 먹지 못해 배고프고, 잠잘 곳도 마땅치 않지만 밝게 살아간다. 거리에서 신문을 팔아도 주린 배는 충분히 채워지지 않고, 수레를 밀어도 돈을 벌 수 없다. 그래서 거리를 배회한다.
그러나 도둑질을 배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나쁜 짓은 꿈도 꾸지 않는다. 낙관적이고 유머가 있는 원만한 성격으로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 어린이의 꿈을 키워준 상하이 미술영화 제작소
만화는 꿈이다.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도 하고, 내가 체험하기 어려운 세상살이를 대신 보여준다.
상하이 미술영화 제작소가 만들어낸 만화 영화들은 수많은 상하이 사람들이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한다.
‘저팔계가 수박을 먹다(猪八戒吃西瓜)’나 ‘3명의 화상(三个和尚)', ’싼마오 유랑기(三毛流浪記)‘  등이다. 요즘도 ‘빠오리엔덩(宝莲灯)', ’마란화(马兰花) 등 우수한 애니메이션을 계속 만들고 있다.
상하이 미술영화 제작소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문화의 산실이다.

상하이의 전통극 후쥐
 전통극 후쥐의 한 장면

서민들이 좋아하는 상하이의 전통극 ‘후쥐(沪剧)'
 ‘후쥐(沪剧)'는 상하이 지방의 전통극이다. 원래 태호(太湖) 유역에서 불리던 ’소산가(小山歌)‘에서 유래됐다. 청나라 말 상하이 ’탄황(灘簧)‘으로 발전했고, 그 후 근대적인 연출 기법을 접목했다. 소극장에서도 공연되며, ’신곡(申曲)‘이라고도 불린다.
현대적인 후쥐는 일상 생활의 표현이 풍부하다. 음악은 비교적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 곡들이 많아 많은 서민들이 좋아한다.

선빠오
 최초로 백화문을 사용한 신문 선빠오

근대 중국의 최대 신문 ‘선빠오(申报)'
선빠오는 근대 중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발행된 신문이자 최초로 백화문(白話文)을 사용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다.
‘불편부당(不偏不黨)’ 의 균형 잡힌 정신을 바탕으로 자긍심이 강한 신문을 만들었다. 최초로 호외를 냈고, 무선 설비를 이용해 신문을 제작했다. 처음으로 화보도 실었던 신문이다.
선빠오는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를 나열하지 않고, 사회 발전의 큰 흐름을 추적하고 있다.

원후이빠오
 원후이빠오의 창간 50주년을 축하하는 서명들

문화혁명의 도화선이 된 ‘원후이빠오(文匯報)’
1965년 11월10일 상하이 ‘원후이빠오’는 장칭(江靑), 장춘챠오(張春橋) 등이 공동 기획하고, 야오원위안(姚文元)이 대표 집필한 비판문 ‘신편 역사극 해단파관을 평한다(評新編歷史劇海端罷官)’를 게재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을 제공한다.
문화혁명이 끝난 뒤에도 원후이빠오는 발행부수가 170여만부에 달할 만큼 여전히 영향력 있는 신문의 위치를 지켜 나갔다.
그리고 ‘상흔(傷痕)문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줬다. 많은 ‘상흔 문학’ 작품들이 이 신문을 통해 소개됐다. 

상하이탄 DVD
 주윤발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상하이탄’의 DVD

▶ TV 드라마 ‘상하이탄(上海灘)’
조우윈파(周潤發)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상하이탄’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거리에 인적이 뜸할 정도였다.
드라마의 곳곳에 진융(金庸)식의 무협 정신이 배어 있었다. 상하이가 곧 무협의 강호였고, 상하이 깡패들의 두목은 무림맹주 격이었다.
하얀 목도리를 한 슈원장(許文强)이 영웅 협객이었다.
당시 상하이탄은 ‘아메리카 드림’에 들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상하이의 도처에는 돈이 깔려 있었다. 누구든 싸움에서 이기면 보스가 될 수 있었다.
조우윈파는 극 중에서 “상하이는 깡패들의 도시”라고 말한다. 누구나 두위에셩(杜月笙)이나 황진잉(黃金榮)처럼 손을 뒤집어 구름을 만들고, 다시 뒤집어 비를 만들 수 있다면 조직의 보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눈 한번 움찔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고, 무표정하게 돌아서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올드 상하이는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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