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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동서양이 공존하는 마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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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1,254회 작성일 12-02-2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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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치는 항구도시

마카오는 원래 중국 광둥성 샹산현에 속해 있던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마카오의 한자인 澳門(오문)은 ‘선착장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1553 년 먼 바다를 건너 온 포르투갈인들이 물 에 젖은 화물을 말린다는 구실로 이곳에 정착한 후 마카오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당시 명나라는 외국인이 거주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로 마카오를 정했으며, 쇄 국을 했던 명ㆍ청 시기에 유일한 대외개방 창구의 역할을 했다. 당시 마카오가 어느 정도로 번창하던 항구였는지 무역거래 물목을 보자. 마카오에서 유럽으로 가는 물목에는 비단ㆍ도자기ㆍ차ㆍ황금ㆍ사향 등 이 있었고, 말라카를 통해 들어오는 물목에는 후추ㆍ상아ㆍ단향목 등 이 있었다.
이 물건들은 다시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했고 돌아오는 배 에는 백은이 실렸다.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설탕이 들어왔다. 당시로 보자면 최고급의 물건들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해외물산이 집결했던 마카오의 전경을 보기 위해서 몬 테 요새에 올랐다.
마카오는 중국 남방의 대표도시 광저우에서 단지 100km 떨어져 있으며 홍콩은 지척이다. 남방의 도시답게 마카오의 낮 은 덥다. 그리 높지 않은 요새로 올라가는 등산로에 땀이 번진다. 우거 진 숲에서 풍겨오는 진한 피톤치드 때문일까? 정신은 오히려 더 맑아지는 느낌이다. 어느새 육중하게 돌을 깎아 만든 요새 입구에 도착했다.
나는 오랜 해외취재 중 포르투갈인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나라의 성들 을 봤다. 인도의 코친과 스리랑카의 골, 그 리고 말레이시아 말라카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돌성들은 거의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모두 해안에서 가깝고 바다를 향 해 거대한 대포들이 놓여 있다. 수성을 위 한 보루의 형태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 중 마카오만이 최근까지 포르투갈인의 지배 에 있었다.
후발주자이던 네덜란드와 영국 이 전세계에 건설됐던 포르투갈의 성채들 을 여지없이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 몬테 요새도 그럴 뻔한 시기가 있었다. 1622년, 네덜란드 함대가 마카오로 진격하던 때 몬테
요새는 겨 우 절반 정도만이 건축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요새의 대포에서 발사된 한 발의 포탄이 네덜란드군의 화약고에 명중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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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을 품고 꿈꾸는 도시


하지만 행운도 여기까지였다. 영국인들은 마 카오를 탐내지 않았다. 그들은 홍콩으로 갔다. 주강 삼각지에 위치한 마카오는 더 이상 늘어나는 선박 수와 물동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도 시는 퇴락해 갔으며 도박과 마약, 범죄가 들끓는 도시로 변해 갔다. 그 래서 흔히들 마카오를 ‘아시아의 시칠리아’라고 부른다. 라틴풍의 거리 와 마피아는 너무도 잘 어울렸다. 위험해 보이는 것이 매력적이라던가. 마카오는 어느 사이 동아시아에서 독특한 캐릭터를 갖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
파도치는 항구도시 마카오는 원래 중국 광둥성 샹산현에 속해 있던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마카오의 한자인 澳門(오문)은 ‘선착장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1553 년 먼 바다를 건너 온 포르투갈인들이 물 에 젖은 화물을 말린다는 구실로 이곳에 정착한 후 마카오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당시 명나라는 외국인이 거주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로 마카오를 정했으며, 쇄 국을 했던 명ㆍ청 시기에 유일한 대외개방 창구의 역할을 했다. 당시 마카오가 어느 정도로 번창하던 항구였는지 무역거래 물목을 보자. 마카오에서 유럽으로 가는 물목에는 비단ㆍ도자기ㆍ차ㆍ황금ㆍ사향 등 이 있었고, 말라카를 통해 들어오는 물목에는 후추ㆍ상아ㆍ단향목 등 이 있었다.
이 물건들은 다시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했고 돌아오는 배 에는 백은이 실렸다.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설탕이 들어왔다. 당시로 보자면 최고급의 물건들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해외물산이 집결했던 마카오의 전경을 보기 위해서 몬 테 요새에 올랐다. 마카오는 중국 남방의 대표도시 광저우에서 단지 100km 떨어져 있으며 홍콩은 지척이다.
남방의 도시답게 마카오의 낮 은 덥다. 그리 높지 않은 요새로 올라가는 등산로에 땀이 번진다. 우거 진 숲에서 풍겨오는 진한 피톤치드 때문일까? 정신은 오히려 더 맑아지 는 느낌이다. 어느새 육중하게 돌을 깎아 만든 요새 입구에 도착했다. 나는 오랜 해외취재 중 포르투갈인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나라의 성들 을 봤다.
인도의 코친과 스리랑카의 골, 그 리고 말레이시아 말라카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돌성들은 거의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모두 해안에서 가깝고 바다를 향 해 거대한 대포들이 놓여 있다. 수성을 위 한
보루의 형태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 중 마카오만이 최근까지 포르투갈인의 지배 에 있었다. 후발주자이던 네덜란드와 영국 이 전세계에 건설됐던 포르투갈의 성채들 을 여지없이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 몬테 요새도 그럴 뻔한 시기가 있었다. 1622년, 네덜란드 함대가 마카오로 진격하던 때 몬테 요새는 겨 우 절반 정도만이 건축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요새의 대포에서 발사된 한 발의 포탄이 네덜란드군의 화약고에 명중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석양을 품고 꿈꾸는 도시 하지만 행운도 여기까지였다. 영국인들은 마카오를 탐내지 않았다. 그들은 홍콩으로 갔다.
주강 삼각지에 위치한 마카오는 더 이상 늘어나는 선박 수와 물동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도 시는 퇴락해 갔으며 도박과 마약, 범죄가 들끓는 도시로 변해 갔다. 그래서 흔히들 마카오를 ‘아시아의 시칠리아’라고 부른다. 라틴풍의 거리 와 마피아는 너무도 잘 어울렸다. 위험해 보이는 것이 매력적이라던가.
마카오는 어느 사이 동아시아에서 독특한 캐릭터를 갖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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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시칠리아가 변하고 있다.

마카오는 우리나라 가톨릭과 깊은 인 연을 갖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1837 년 마카오로 가서 파리외방전교회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과 서양학 문, 라틴어와 중국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카오는 동아시아 서 양학문의 메카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 최초의 전당이 1594년 설립된 성 바울 대학이다. 이 학교는 중국 최초의 4년제 대학일 뿐만 아니라 동아 시아 최초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저 유명한 마테오 리치가 중국어를 공 부하며 동서양문화 교류의 전범이 되었다. 청나라 강희 제는 오죽하면 “앞으로 마테오 리치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서양인은 중국에 거주할 수 없다”고까지 했겠는가? 이 같은 학문의 전통은 후대로 이어져 중국의 《사서오경》과 《본초강목》 등이 여러 유럽어로 번역되어 서구지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는 《본초강목》을 언급하는 대목이 100여 군데나 된다. 휘황한 네온사인과 라틴풍의 건물들이 빼곡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니 시야가 터지고 거대한 성바울 성당이 나타난다.
마카오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아니, 이제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인류가 함께 보존해 야 할 건물이 되었다. 화재로 인해 건물의 앞면만이 남아 있어 더 신비롭게 느껴진다. 이 건물은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들이 설계하고 박해를 피해 온 나가사키의 일본인 가톨릭 교도들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그야 말로 다국적인 문화가 함께 녹아 있는 마카오의 상징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마카오는 중국의 땅이다. 오랜 식민의 역사를 거쳐 원주인 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마카오는 홍콩과 함께 중국 남방이 세계로 나아가는 교두보가 된 것이다.
베이징대학의 후자오량 교수는 “마카오 는 중국이 가진 라틴문화의 첨병”이라고 말했다. 홍콩이 영어문화권을 향하고 있다면 마카오는 라틴문화권을 향하는 것이다.
경제로서는 홍콩을 당할 수 없지만 마카오에는 열정과 화려한 라틴문화가 존재한다. 땅거미가지고 성바울 성당에 화려한 조명이 물들면 어디선가 맹렬한 기타 반주에 맞춰 플라멩코춤을 추고 있다. 중국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마카오만의 특색이다. 동 서양의 문화가 뒤섞인 이 흥미롭고 미래의 변화가 궁금한 작은 도시, 마카오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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