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퍼진 베르사이유 정원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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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1,428회 작성일 12-02-22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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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이 13세가 베르사이유에 세운 사냥 저택을 대대적으로 개조한 루이 14세는 세계에서 으뜸 가는 예의작법이 지배하는, 장려한 왕도(王都), 절대 권력의 전당을 만들고 정부를 이곳으로 이전했다. 이는 루이 14세가 어린 시절에 겪은 프론드의 난과 폭동의 기억으로부터, 그리고 파리의 부르주아와 민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관심과 아울러 귀족들을 통제하고 싶다는 이중적인 관심에서였다. 군사광장인 성 입구는 왕의 무기를 모티프로 한 철책으로 둘러싸인 채 굳게 닫혀 있다. 돌이 깔린 중정(中庭)으로부터 루이 14세의 기마상을 가로지르면 대신들의 중정과 대리석 중정이 이어진다. 대리석 중정 주위에 루이 13세의 작은 저택이 있는데, 태양왕은 그 뒤쪽에 발코니 3면이 있는 창 안쪽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이 구관을 연장하여 르 보, 프랑수아 도르베이, 쥬르 아르드왕 만사르 등이 장대한 건물들을 완성시켰다. 루이 14세는 정원 조성에 대단한 정열을 기울였던바, 자연의 풍성한 은혜로 가득 찬 낙원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베르사이유는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원사 르 노트르에 의한 정원은 건물의 장대한 성격을 충분히 의식하여 조성되어 있다. 예컨대 ‘아폴론의 샘’의 분수가 빛나는 모습을 뽐내는 녹색의 융단이 건물 정면에 펼쳐져 있는가 하면, 남쪽의 화단으로부터 큰 계단을 내려서면 그 앞에 만사르가 만든 또 하나의 걸작 오랑쥬리가 있다. 르 노트르는 방위를 이용해가면서 급경사면 위에 수목들을 섬세하게 모아 놓았는데, 만사르는 거기에다 단순함과 고대풍의 힘참을 갖춘 창고를 건립했다. ![]() 식탁에는 항상 양질의 과일과 야채를 갖추어야 한다는 태양왕의 주문에 따라 1670년, 법률가이자 식물학자이기도 한 장 바티스트 드 라 칸티니가 왕의 농원을 건립하는 설립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678년부터 1683년에 걸쳐 설계로부터 식재에 이르기까지 모두 책임지면서 군주의 식욕에 어울리는 농원을 만들어내었다. ‘스위스인의 못’ 가까이에 있는 ‘악취 나는 못’의 구획이 왕의 산보와 만족감을 채워주기에 편리한 입지조건을 갖추었던바, 약 9헥타르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이 농원은 날로 발전했으면서도 오늘날까지 별로 변화되지 않고 있다. 그랑 케레는 중앙의 연못 주위에 야채가 심겨져 있는 16개의 정방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29개의 과수원이 그 주위를 감싸고 있다. 전체를 조망하는 테라스가 있고, 그로부터 루이 14세는 40여 명의 정원사들이 식물들을 가꾸는 극적인 광경과 여러 가지 식물들의 모습을 즐겼다. 그는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야채와 과일의 재배가 궁전의 여러 가지 기술직과 동일한 수준의 완성도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아울러 루이 14세는 식물과 수목의 수집에도 힘을 기울여 신대륙과 극동의 식물을 파리에 도입하기 위해 탐검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왕이 만든 산책 안내지침 이렇게 해서 완성된 베르사이유 정원의 산책을 위해 루이 14세는 지침서를 쓰기도 했는데, 국왕 스스로가 쓴 것으로 보이는 이 지침서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여기에는 모두 25항목 이상으로 베르사이유를 즐기는 최적의 방법이 안내되어 있다.
같은 날에 트리아농의 동물원을 보고 싶은 경우에는 아폴론상 옆에서 멈춘 후, 동물원을 목표로 배에 오를 것. 원형투기장 위로 올라, 수로와 트리아농 쪽의 종착점을 바라볼 것. 도착하면 중앙의 살롱으로 갈 것. 동물이 있는 정원을 보고 되돌아와 거기로부터 트리아농으로 가기 위해 다시 배를 탄다. 도착해서 곧 계단을 올라 높은 언덕에 서서 쉬고, 거기에서 3개의 분수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것. 수로가 동물원 쪽의 종점까지 볼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이어 하부 하단의 중앙에 있는 샘으로 곧장 갈 것. 그로부터 궁전으로 들어선 후 내부를 볼 것. 주랑에 들어서서 대정원로(大庭園路)가 보일 것이다. 정원으로부터는 궁정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회랑 끝에 있는 살롱까지 집안에서는 볼 수 없던 부분을 통해 걸을 것. 회랑 끝에 있는 살롱을 통해 물이 용솟음치는 정원으로 갈 것. 그로부터 수로의 트리아농으로 가기 위해 회랑을 통해 테라스(상부하단) 위로까지 가서 거기에서 용의 눈 아래로 내려다 볼 것. 다음으로 삼림 쪽에 있는 회랑 앞쪽 끝에 있는 살롱을 나올 것. 테라스에 연해 있는 수로가 보이는 곳까지 갈 것. 거기로부터 성, 숲, 수로가 보일 것인즉, 건물의 날개 끝부분에서 꺾어 밖으로 나올 것. 그리고 건물의 배선실(配膳室) 쪽에 연해 중앙로까지 갈 것. 궁전의 중앙부로 숲 그늘을 통해 걸으면, 거기에 커다란 분수와 숲의 여신상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로부터 잔디 화단까지 곧장 아래로 내려가 엷게 그늘진 길과 맞닿게 될 때까지 가서, 거기에서 주위의 분수를 보기 위해 걸음을 멈출 것. 그리고 작은 포스케 안에 있는 분수로 가서 깊은 샘물에 도달한 후,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길을 오를 것. 다음으로 말발굽 모양의 분수에 이르는 길을 통해 하부화단을 가로지른다. 길을 내려가 아폴론상까지 되돌아가는 배에 올라 그로부터 플로라상에 이르는 길을 가서 ‘아폴론의 욕장’에 도착한다. 그 길은 위에서 말한 길이다. 세계로 퍼진 베르사이유 정원의 영향 1702년에서 1704년에 걸쳐 쓴 이 안내문을 보면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를 얼마나 구석구석 잘 알고 있고 또 사랑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그것이 얼마나 넓고, 복잡하며, 고심해서 만들어졌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식 정원 중에서도 압도적인 성공사례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유럽과 먼 나라 왕들의 누구라도 스스로의 베르사이유를 욕심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각지에 만들어진 베르사이유는 단순히 원형의 복제에 머물지 않고 여러 가지로 각색되고 규모도 변했을 뿐더러 토지의 자연조건과 국민성, 만든 사람의 솜씨와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1705년, 영국에서 건설이 시작된 프레남 팔레스에도 베르사이유의 정신이 침투되어 있다. 또한 표토르 대제는 프랑스 체제 중에 베르사이유의 트리아농에 머물면서, 거기에서 르 노트르의 설계에 사로잡혔다. 대제는 신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상임건축가로서 프랑스인 장 바티스트르 프론을 임명했고, 그는 페테르고프의 정원, 표토르의 여름궁전을 설계했다. 스페인에서도 작은 베르사이유가 있다. 페리베 5세를 위해 건설한 물과 수로와 분수의 매혹적인 정원, 라 그랑하가 바로 그것이다. 나폴리에 가까운 카제르타의 정원은 페리베 5세의 아들을 위해 건조된 것으로서, 르 노트르의 방사상(放射狀)정원의 영향은 미국에까지도 미쳤으니, 피에르 랑팡이 설계한 신수도 워싱턴에 그 영향이 각인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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