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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쓸쓸하고 아름다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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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1,282회 작성일 12-02-22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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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jpg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한국에 온다. 전세계인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위대한 예술가 반 고흐의 작품전이 11월24일부터
2008년3월16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된다. 유화45점과
드로잉20여점 등 주옥같은 명작들을 선보일 이번작품전의 관람
은 미술 애호가들뿐 아니라 문외한들에게도 일생을 두고 두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다. 한국 최초, 최대 규모의 반 고
흐전에 앞서 불멸의 화가 고흐와 그의 걸작들을 미리 만나본다.
글_ 노성두(서양미술사학자)

고흐는 미술시장 최고의 블루칩이다. 피카소나 마티스와 같은 거장들도 고흐옆에서는 빛을 잃는다. 당장 서점의 출간목록을 훑어보아도 고흐는 어떤 다른 화가보다 압도적이다. 왜 우리는 고흐에 열광하는걸까?
고흐에게는 여러 가지 별명들이 따라다닌다. 태양의 화가, 해바라기의 화가, 광기와 열정의 화가, 자살한 미치광이 화가, 시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불행한 천재. 지상으로 유배된 예술의 영혼 등 다양한 수식이 고흐를 정의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의 상당 부분은 진실이 아니거나 왜곡되고 과장된 측면이 있다. 가령 고흐가 제 귀를 자르고 또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며 자살을 감행했으니까 당연히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미치광이 화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기행을 일삼았던 모든 화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셈이고, 서양미술의 역사는 정신병동의 병적기록에 지나지 않을테니까. 고흐의 작품 성향이 전체적으로 아카데미즘과 거리가 멀고 또 색채와 표현방식 등이 다소 거칠고 과격하다고 해서 그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현대화가 가운데 정상 판정을 받을 작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초현실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앙토냉 아르토가 1947년 <반고흐, 사회가자살시킨사람>이라는 글에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01-02.jpg “미치광이라고? 반고흐가? 그렇다면 이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을 보라. 비상한 투시력을 소유한 불한당의 얼굴은 우리를 감시하고 뜯어보고 노려보듯 탐색한다. 나는 이처럼 압도적으로 인간의 얼굴을 관찰하고 거부할 길 없는 수술대 위에서 인간의 심리를 해부할 줄 아는 정신과의사를 본 적이 없다. 반 고흐는 옳았다. 그는 무한을 위해 살고 무한을 통해서 비로소 만족했다. 이 세상에는 그리고 모든 분야에는 모든 천재들이 질릴만큼의 충분한 무한이 존재한다. 고흐가 자신의 삶을 찬란한 무한으로 비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사회가 그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고흐에 대한 몇가지 오해와 진실

고흐가 사회와 격리된 고독한 늑대였다는 것도 일정 부분은 후대의 오해이다. 열여섯 살에 헤이그 구필 화랑에서 일을 하면서부터 늘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작품에 둘러싸여서 살았고, 예술 애호가와 수집가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몇 해 뒤 런던 구필 화랑으로 전근가기 전 파리에서 루브르와 뤽상부르 미술관 등을 발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책에서만 보던 거장들의 세계에 탐닉했다. 이 시기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화가의 이름을 무려 56명이나 거명하고 있다. 1886년 파리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하던 때에는 물감가게면서 가난한 화가들의 전시정소로도 사용되었던 클로젤 거리의 탕기 영감의 상점에서 에밀 베르나르, 툴루즈 로트레크와 어울리면서 아지트를 삼았다. 훗날 아를에 이주해서 고갱과 함께 일구었던 예술가 공동체의 꿈은 바로 이때 처음 잉태했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고흐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초상은 주머니 가난한 예술가의 부탁을 들어주고 모델을 설 만큼 그에게 힘이 되었던 이웃들이었다. 물론 고흐는 여러 차례 혹독한 실연을 겪었고 삶의 고된 고비를 넘어야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흐 스스로 재능이 모자라고 못생긴데다 성격이 사교적이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예술작품과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지글과 일기를 읽어보면 적어도 고흐는 우리가 추측하듯이 세상과 등지고 정신병원에 은둔했던 황야의 늑대는 아니었다.
고흐가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재능을 타고난 불운한 천재로서 동시대와 불화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조금 다르다. 고흐는 실제로 브뤼셀 아카데미에서 고대 조각의 데생과 해부학 그리고 원근법을 공부했고, 시대를 이끌었던 신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새로운 미술이론을 제 것으로 만들었다. 고흐가 쇠라와 시냐크로부터 순수한 색채의 점묘주의 또는 분할주의 기법을 배운 뒤에 그의 짧고 힘찬 고유의 채색기법을 창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흐가 아카데미를 떠났던 것은 순전히 ‘예술의 진정한 연인인 자연과의 보다 격렬하고 열정적인 사랑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초기 보리나주 시절의 축축하고 눅눅한 갈색조의 그림들이 파리 시절 이후 완전히 밝은 색채로 변화하고 또 분명하고 짧은 선으로 환원된 인상주의적 경향을 추구한다. 또 남부 프랑스 아를로 이주한 다음에는 파리에서 유행했던 인상주의를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간다. 색채 사용이나 붓의 터치는 비슷하지만 이전의 그림들이 단순히 빛과 색채의 실험으로서 투명한 시각의 창문에 비치는 자연의 풍경을 담아냈다면 아를 시대의 그림들에서는 내면의 들끓는 열정이 녹아나온다. 자연과의 새로운 만남에 대해서 고흐 자신도 변화의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01-03.jpg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인상주의나 다른 것에 대해서는 하나도 생각을 하지 않았어. 오직 자연을 좇아서 작업을 했을 뿐이야. 자연은 추상보다 훨씬 내 마음에 들어. 내가 파리에서 배웠던 것이 사라지면서 인상주의와 만나기 전 시골에서 살면서 느꼈던 생각으로 돌아가고 있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정확히 재현하기보다 나 자신을 강하게 표출하기 위해서 색채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지.”
고흐는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책을 통해서 고흐는 위안과 교훈을 얻었다. 독서는 가난한 외톨이 화가에게 이웃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가장 고마운 수단이었다. 구필 화랑에서 일할 때부터 고흐는 위고, 엘리엇, 디킨스, 키츠를 읽었고 셰익스피어와 아이스킬로스를 탐독했다. 성서도 손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고흐는 특히 발자크의 주인공들을 좋아했고 플로베르, 모파상, 위스망스에 대해서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열정적인 독서습관은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문학에 대한 고흐의 사랑은 미술에 대한 사랑만큼 신성한 것이었다. 그에게 책은 또 하나의 붓이었고 설교였다. 보리나주 광산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고흐의 깊은 연민과 사랑은 사실주의 문학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았다. 고흐는 1878년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썼다.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광부들이 하얀 눈을 배경으로 뚜렷이 드러나 보이지. 사람들이 지상으로 나올 때면 어찌나 새카만지 꼭 굴뚝 청소부처럼 보인단다. 그네들이 사는 집은 숲이나 언덕에 흩어져 있고 오두막이 대부분이야. 광부와 직조공들이 나는 불쌍해서 견딜 수 없어. 나중에 때가 되면 세상에 알려진 적이 한 번도 없는, 아니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런 사람들을 그림으로 보여줄 작정이야.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참 행복할 거야.”
그러나 고흐가 사회와 이웃 그리고 동시대의 예술가 공동체와 단절된 고독한 예술가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고흐의 천재성이 광기나 무지 어느 쪽과도 결정적인 연관이 없다면 도대체 고흐의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강렬하고 거역할 수 없이 끌어들이는 것일까? 그것은 다만 비극에 대한 연민 때문일까? 일찍이 니체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닿을 수 없는 어떤 목표를 향해서 죽을힘을 다해 매진하다가 결국 사위어들고야 마는 운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비극의 도식에 가장 적합한 사례를 고흐의 존재와 일치시키며 만족하는 것일까?

자화상은 가장 낯설고도 성실한 자연관찰

고흐는 자화상을 무척 많이 그렸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이 무려 40여 점이나 된다. 렘브란트를 빼고는 19세기까지 이처럼 예술의 영토에서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화가는 없었다. 회화에서 자화상이란 오랫동안 초상화 수집가들의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한 돈벌이 방편이거나, 회화예술의 알레고리에 등장하는 우의의 주인공으로 변신한 모습이기 일쑤였다. 일반적 관례에서 가장 명백하게 벗어난 예외가 있다면 그건 렘브란트와 고흐일 것이다. 두 화가 모두 네덜란드의 핏줄을 계승했다는 사실에서 닮은 점이 적지 않다. 고흐의 자화상들은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탐색과 성찰 그리고 내면의 고백이라는 화두를 던져준다. 고흐는 자화상 작업을 통해서 가장 낯설고도 성실한 자연관찰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거울 또는 사진을 사용해서 자신을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자화상은 한 존재의 가장 내밀한 풍경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귀가 잘린 자화상을 비롯해서 배경의 붓질이 불꽃처럼 이글대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고흐는 대상에 대한 탐구를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미술을 행한 첫 걸음이었다. 고흐는 자신의 시선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읽었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01-04.jpg “다른 사람들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아마 볼품없고 기이하고 가깝게 지내기 싫은 사람일거야.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별 볼 일 없을 사람. 한 마디로 저질 중의 저질일 테지. 그렇지만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기이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의 가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내 작품들이 대신 말해주기를 바래.”
고흐는 자화상에서 미학과 도덕의 시선을 걸러냈다. 자화상을 통해서 자신을 치유하고 해소한 것이다. br> “내가 내 얼굴을 제대로 그릴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제대로 그릴 수 있게 되겠지.”
고흐는 자유로운 미술을 상상했다. 화가는 상상의 눈을 통해서 미술의 열광에 이르고 자연을 창조하며 더 큰 위안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화가는 자연을 표현하고, 돋보이게 하고, 밝히고, 자유롭게 하고, 해석하는 존재라고 확신했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예술의 신성한 임무라고 믿었다. 무한과 창조의 위대함을 예술의 거울을 통해 실현하려는 그의 노력은 무엇보다 밤하늘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서 잘 드러난다.


신비로운 밤하늘에 대한 열정

밤하늘은 미술의 오랜 역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소재였다. 여명과 석양은 회화적 소재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흔히 다루어졌지만, 밤의 풍경은 드물었다. 기껏해야 종교 주제 가운데 ‘목자들의 경배’나 ‘이집트로 피신하는 성가족의 휴식’에서 밤하늘의 배경이 등장하지만, 그것도 부수적인 무대 연출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대지에 이젤을 세우고 빛의 작용을 관찰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빛의 부재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고흐는 밤하늘의 별에 매료되었다. 별은 그에게 지상의 삶이 닿을 수 없는 곳, 잃어버린 낙원, 영원한 이상향 아르카디아와 유토피아의 다른 이름, 곧 무한의 통로였다.
01-05.jpg “별을 보면 꿈을 꾸게 되지. 지도 위에서 도시나 마을을 나타내는 까만 점들을 보면서 꿈을 꾸는 것처럼. 그럴 때면 난 이렇게 묻곤 해. 왜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점에 가는 것처럼 창공에 반짝이는 저 별에는 갈 수 없는 걸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기 위해서 기차를 타는 것처럼 별에 가려면 죽음을 맞아야 해. 그렇지만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지. 그것과 마찬가지로 살아서는 별에 갈 수 없어.”
‘밤의 카페테라스’는 고흐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작품 가운데 한 점이다. 지글대며 끓어오르는 노랑과 침착한 군청색이 보색으로 대비되면서 신비로운 밤의 풍경을 연출한다. 노란 가스등이 밤의 카페를 밝히고, 깊은 밤이 신비로운 속옷을 펼치자 눈송이처럼 탐스러운 별들이 솟아난다. 밤 풍경이지만 검정색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고흐는 카페 풍경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사흘 동안 잠도 자지 않고 그림에 몰두한 끝에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고흐의 별들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춤추고 소용돌이치고 우리를 별들의 무도회에 초대한다. 별들의 춤은 해골들이 손을 맞잡고 추는 중세 미술의 죽음의 무도와 닮았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죽음의 무도가 올바른 삶의 가치를 설교하고 경고한다면, 별들의 춤은 초월적인 가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고흐는 밤에 야외작업을 하기 위해서 기발한 발상을 한다. 촛불을 켜서 모자 가장자리와 이젤에 고정해놓고 그리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명품을 고안한 것이다. 고흐의 밤하늘은 대낮의 태양에 못지않게 밝게 빛난다. 모자에 촛불을 꽂지 않았더라면 물감의 색조차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밤하늘에 대한 열정은 테오에게 쓴 편지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요즘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밤은 낮보다 훨씬 더 풍부한 색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 강한 보라색, 파란색, 초록색으로 물든 밤… 어떤 별은 레몬 빛이고 어떤 별은 붉지. 또 초록, 파랑, 물망초 색의 별들도 있어.”
고흐는 인상주의 화가이면서 표현주의 회화의 발명자로 불린다. 인상주의 미술이 화가의 눈을 투명한 렌즈로 보고 보이는 그대로의01-06.jpg 자연을 캔버스에 투영했다면, 표현주의 미술은 인간 내면의 팔레트에 시각화된 감성의 스펙트럼을 캔버스에 표출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화가의 눈이 단순히 자연을 비추는 창문이 아니라 다시 시각주체로서 지위를 회복한 것이다. 고흐는 인간이 단순히 자연을 해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삶을 유지하고 상상하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이와 함께 미술의 텃밭에 피어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다름 아닌 예술적 상상력이라는 사실도.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스스로 입원신청을 했다고 한다. 병원에서도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고흐는 1890년 7월 29일,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같은 해 2월 그는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어느 날, 봄을 착각하고 꽃을 피운 아몬드 나무를 그렸다.
“테오. 요즘 아몬드 꽃나무를 그리는 동안 몸이 좋지 않아서 무척 힘들었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다면 꽃이 피는 다른 나무들도 그렸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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