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델의 헤라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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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1,492회 작성일 12-02-22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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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가장 씩씩한 남자가 있다면, 그는 헤라클레스일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신화시대 그리스의 영웅이다. 바람둥이 신 제우스가 암피트리온의 아내 알크메네의 침실에 몰래 숨어들어 잉태시킨 헤라클레스는 태어나자마자 요람에서 헤라가 보낸 독뱀과 싸워야 했다. 그의 거친 삶은 조형미술에서도 자주 다루어진 ‘열두 가지 노역’이라는 무한 미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불가능한 역경을 극복하고, 사나운 괴물과 흉폭한 도적들을 때려잡은 그의 호쾌한 일생은 그러나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헤라클레스가 헬라를 위해 바친 노역에 대한 마지막 보상은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이었다. 신화작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 맹독이 묻은 옷을 걸친 헤라클레스가 생살을 태우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번제할 장작더미를 쌓는 장면은 언제 다시 읽어도 전율이 스친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기원전 2세기 중반 로마에게 정복되어 지중해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지만, 헤라클레스의 기억은 시인과 예술가의 상상력 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지 않았다. 불굴의 용기와 올바른 의지, 인간에 대한 헌신과 소명은 행동하는 영웅 헤라클레스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미술의 역사에서 헤라클레스를 가장 설득력 있게 표현한 조각가를 꼽으라면 부르델이 떠오른다. 부르델의 ‘헤라클레스’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미켈란젤로의 ‘다윗’만큼 조형적 표현의 가장 깊은 심연에 도달해 있다.


‘활 쏘는 헤라클레스-거장 부르델展’이 2월 29일부터 6월 8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부르델이 로댕의 조수로 조각에 입문한 초기부터 사망 2년 전 제작한 최후의 작품들까지 총 75점의 조각이 전시될 예정. 그 중 그리스 신화 이미지를 차용한 역동적인 조각상으로 부르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활 쏘는 헤라클레스’를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부르델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_ 노성두(서양미술사학자)
부르델의 예술적 감성은 열정과 격정 그 자체
‘헤라클레스’의 원제목은 ‘활 쏘는 헤라클레스’이다. 널찍하게 벌린 헤라클레스의 두 다리는 발 아래 벼랑에 단단히 버티고 있다. 대지를 움켜쥔 그의 발가락은 거대한 올리브 나무의 뿌리를 연상케 한다. 벼랑을 움켜쥔 발가락의 모티프를 부르델은 로댕으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대지의 끝에서 지옥의 심연을 응시하면서 턱을 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부르델의 ‘헤라클레스’와 똑같은 발가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부르델은 ‘지옥문’의 작가 로댕의 작업실에서 15년 동안 일했던 제자였기 때문이다. 로댕은 자신의 조형을 가장 충실하게 이해했던 제자로 부르델을 꼽곤 했다. 1909년 프라하에서 부르델의 ‘헤라클레스’가 처음 전시되었을 때 로댕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부르델은 우리 시대가 반드시 주목하고 언급해야 할 중요한 예술가이다.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판단하기에, 예술에 대한 부르델의 감성은 열정과 격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실에서 ‘헤라클레스’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일찍이 내 머릿속에 구상했으나 미처 실현하지 못했던 것의 실체를 확인하고는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조각가 로댕을 가르친 스승은 카르포였다. 카르포는 파리의 오페라 건축 정면부의 장식부조 ‘춤’을 완성한 프랑스 조각의 거장이었다. 카르포는 조화롭고 우아한 인체 조형으로 19세기 후반을 풍미했지만, 로댕은 자신의 스승을 뛰어넘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칼레의 시민’은 그의 스승 카르포가 추구했던 순수한 쾌락과 발랄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로댕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무거웠다. 점토를 만지는 그의 손은 고통과 인내, 절망과 극복, 고뇌와 구원 등의 보편적인 비극의 개념에 익숙했다. 스승 카르포가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의 천상의 아름다움을 계승했다면, 로댕은 ‘육체의 감옥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후계였다. 카르포가 황금의 시대를 노래했다면, 로댕은 납의 시대를 살았다. 한편, 로댕의 제자 부르델은 미켈란젤로와 로댕으로부터 조각가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의 몫은 철의 시대였다.
로댕이 ‘헤라클레스’의 프라하 전시에 앞서 부르델의 작업실에서 보았던 작품은 청동이 아니라 점토 모델이었다. 19세기의 조각가들은 점토 성형이야말로 진정한 예술행위라고 보았다. 점토 모델에 밀랍을 덮고 암틀을 제작한 뒤 청동을 부어서 작품으로 주조하는 일은 순전히 조수와 일꾼들의 몫이었다. 조각가의 작업은 점토 성형까지였다. 젖은 흙덩이에 생명을 불어넣는 조각가가 최초의 인간을 빚어낼 때의 창조주의 행동과 닮았다는 확신은 르네상스 조각가 미켈란젤로에서 비롯되었다. 부르델의 ‘헤라클레스’는 상체를 잔뜩 낮추고 힘껏 시위를 당긴다. 여기서 화살과 활줄은 보이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가들도 이런 것들을 생략하곤 했다. 실제로 작품을 전시할 때에는 청동이 아닌 다른 재료로 화살과 활줄을 만들어 붙이곤 했다. 그러나 부르델의 ‘헤라클레스’는 그런 보조 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넓게 펼친 그의 사지에서 꿈틀대는 모든 근육들이 곧 활줄이기 때문이다. 또 그의 두 어깨와 팔 그리고 시선으로 연장되는 종축은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을 대신한다.
‘헤라클레스’가 활을 쏘는 자세를 취한 것은 신화에 기록된 그의 임무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스팀팔로스의 식인 새를 쏘아 죽이는 임무였다. ‘헤라클레스’는 여기서 보이지 않는 화살을 통해서 조형적 공간을 확장한다. 목표물의 환영은 화살의 유령에 의해 실체적 존재로 환원된다. 조형의 신체적 장치가 서사를 폭로하는 것이다. 지옥문 상인방에 올라앉은 ‘생각하는 사람’의 소용돌이치는 이마에서 지옥의 망령들이 내뱉는 탄식과 후회의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헤라클레스’의 망설임 없는 자세는 신화적 공간을 현재화하는 서사의 비가역적 진행을 드러낸다. 명료한 윤곽선이 만들어내는 조형의 실물감은 그야말로 위협적일 정도이다. 부르델은 로댕과 미켈란젤로에게서 배운 방식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감상자들을 시선의 포로로 붙들어낸다.

헤라클레스, 마침내 조각가에게 정복당하다
부르델의 ‘헤라클레스’는 프라하 전시를 마친 이듬해인 1910년 파리의 그랑 팔레 살롱전에도 전시되었다. 풍만하고 완곡한 마이욜 식의 조형에 익숙해 있던 파리 시민들에게 뼈대와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듯한 알몸 그대로의 아케익 조형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미술계에서는 비판과 조롱이 잇달았다. 그러나 부르델의 진가를 알아본 비평가도 있었다. 가령 에티엔 샤를은 그 해 4월 28일 일간지 <리베르테>에 기고한 기사에서 부르델에게 찬사를 선물한다. “‘헤라클레스’의 대담하고 독창적인 자세는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스라도 따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상상력에 허용된 가장 형용무쌍한 영웅의 모습이다. 작품의 크기, 자세, 실행, 직접성은 우리를 가위눌리게 한다. 조각가 부르델은 그가 말하려는 것을 가장 명료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실현했다. 헤라클레스는 마침내 조각가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헤라클레스가 조각가에게 정복당했다”는 에티엔 샤를의 수사적 표현은 피에트로 벰보 추기경이 화가 라파엘로의 묘비에 새긴 시구에서 “이제 라파엘로가 죽고 나니, 자연이 그를 따라서 죽을까 두렵다”고 했던 헌사에 필적한다. 피에트로 벰보가 라파엘로의 예술의 불멸성을 탄생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운명과 비교했다면, 에티엔 샤를은 신화의 주인공 헤라클레스의 조형적 부활을 역설적 반어법으로 선포한다.
부르델은 고대 그리스에 탐닉했다. 특히 그리스 신화는 그의 삶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였다. 로댕처럼 부르델도 거의 독학으로 교양을 일구었지만, 꾸준한 독서와 왕성한 지적 호기심 그리고 당대의 문인과 예술가들과 폭넓은 교류를 통해서 신화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무엇보다 마담 미슐레의 살롱에 드나들면서 사귄 그리스 출신의 예술가 모레아스로부터 고대 문헌과 예술에 대한 소양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의 아내가 그리스인이었다는 사실도 고대 신화에 대한 친연성을 두텁게 했을 것이다. 부르델은 살롱에 출입하던 때부터 알고 지내던 문인 아나톨 프랑스와 앙드레 쉬아레의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부르델이 신화의 인물들을 주제로 삼기 시작한 것은 1900년부터였다. 그는 신과 인간, 영웅과 괴물을 가리지 않았다. 부르델의 작업실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싱싱한 자궁처럼 ‘팔라스 아테나’ ‘페날로페’‘아폴론’‘켄타우로스’‘헤라클레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부르델은 ‘활 쏘는 헤라클레스’를 완성하기 위해서 수십 점의 습작모델들을 실험했다. 습작모델의 본보기는 뮌헨의 고전조각관에 있는 ‘헤라클레스’였다. 뮌헨의 ‘헤라클레스’는 원래 그리스 에기나 섬의 아파이아 신전 박공부를 장식하던 부조였는데, 1811년 영국인 고고학자 코커렐과 독일인 할러슈타인이 함께 발굴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곧 뮌헨으로 옮겨지는데, 이것은 뮌헨을 두 번째 아테네로 만들려고 했던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왕자가 작품의 가치를 바로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상실한 황금시대의 재현‘고고학의 세기’로 불리는 19세기의 발굴 열풍은 유럽 문화의 발원지로서 고대 그리스의 가치를 한껏 올려놓았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디오니소스 극장의 발굴,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의 발굴, 헬레니즘 유적지 페르가몬의 도성 발굴, 고 하인리히 슐리만의 트로이와 미케네 발굴은 잃어버린 유토피아, 회복할 수 없는 아르카디아에 대한 역사적 향수의 보편적 지향점을 분명히 하였다. 고대 그리스에 대한 맹목적 취미는 걷잡을 수 없이 파급되어서, 심지어 아마추어 영국인 고고학자 엘긴에 의한 파르테논 약탈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시기에 조각가 부르델이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적 이상향의 그림자를 읽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부르델이 ‘뮌헨의 헤라클레스’에 이끌렸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부르델은 때묻지 않은 순수와 가식 없는 자유가 예술적 이상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했다. 파르테논 조각이 보여주는 고전적 세련미보다는 그보다 앞서 아케익 시대에 만들어진 ‘뮌헨의 헤라클레스’가 풍기는 원시의 땀 냄새가 그에게는 그리스의 정형에 더 어울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헤라클레스의 억센 근육과 뜨거운 숨소리가 태곳적부터 우리의 몸속에서 순환을 멈추지 않았던 원초적 생명의 조형적 변환이었다.
실제로 ‘뮌헨의 헤라클레스’와 부르델의 ‘헤라클레스’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주인공의 찢어진 눈과 우람하게 뻗은 콧대, 짧게 깎은 곱슬머리, 조형의 건축적 구성과 공간을 점유하는 움직임의 모티프와 더불어 몸을 낮추고 활을 쏘는 자세에서 부르델은 고대 아케익의 정신과 닿아 있다.
아케익(아르하익)의 말뿌리인 ‘아르케’는 그리스어로 ‘처음’, 또는 ‘시작’이라는 뜻이다.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의 딸 뒤페 부르델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의 아버지는 고딕 대성당의 조각들을 사랑했다. 또 고대 그리스로부터 창작의 영감을 길어 올렸다. 그리스의 신화를 사랑했고, 고대의 신화적 상상력에서 태어난 괴물, 괴수뿐 아니라 신과 영웅, 요정들에 대한 낯설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사랑했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그리스 아케익 양식의 모든 조형에 매료되었다.”
조각가 부르델 역시 아케익의 조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적이 있었다.
“나의 작품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은 내가 아케익 양식에 지나치게 기울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아케익은 신화의 시대, 우리가 아주 오래전에 상실한 황금시대를 재현한다. 아케익은 눈속임이 없는 진실의 세계, 거짓된 동어반복을 거부하는 세계이다. 나는 아케익을 순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럼으로써 나의 영혼이 치유된다.”
모든 예술은 자신의 문제를 대상화함으로써 치유의 수단이 된다. 치유는 타락에 대한 순결의 회복, 구속에 대한 자유의 환원, 타성에 대한 의지의 복원, 그리고 조각가에게는 물질적 카오스에 대한 형태적 질서의 획득을 의미한다. 부르델의 발언을 보면, 그는 로댕으로부터 흙을 빚고 청동을 굽는 기술뿐 아니라 겸손의 미덕까지 배웠던 모양이다.
조각가 부르델의 연표
1861년 10월 30일 몽토방에서 출생 에밀 앙투안 부르델이 목수의 아들로 출생.
1876년 툴루즈의 보자르 미술학교에 입학.
1884년 파리의 보자르 미술학교에 입학.
1886년 파리 보자르에서 자퇴.
학교의 틀에 박힌 수업 대신에 자신의 길을 스스로 모색하겠다고 스승 팔기에르에게 밝힘.
1893년 로댕과 만남. 로댕의 작업실 도제로 들어가서 15년 동안 배움.
1900년 로댕, 데부아와 함께 조각 학교 설립.
1908년 로댕 아틀리에에서 나옴.
1909년 프라하 전시.
1910년 그랑 팔레 살롱전 전시. 프랑스 정부는‘헤라클레스’의 구입을 꺼림.
1929년 르 베시네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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