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회화적으로, 절충주의적 영국정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1,552회 작성일 12-02-22 21:02
본문

영국식 정원의 전형을 완성했다고 할 란스럿 브라운의 정신을 이어받은 험프리 레프턴은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고안된 『레드 북스』 외에 4권의 책을 남겼는데, 그 안에는 브라운의 작품 목록도 들어 있다. 빚에 쪼들린 불운한 사업가였던 그는 작은 시골집에 몸을 숨긴 채 농업에 종사하면서 식물학과 정원에 대해 학습한 그는 조원가가 되어 브라운이 죽은 후 공백을 메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레프턴은 ‘토지의 영’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재능을 가졌던 바, 저택과 토지, 발주자의 욕구를 제대로 고려한 최초의 조원가이기도 했다. 그는 산업혁명의 덕택으로 일어선 새로운 사회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주문을 받아들였는데, 이로써 레프턴의 작품은 18세기의 이상적인 스타일과 19세기의 새로운 유행을 예감시키는 부분을 함께 지게 되면서 이른바 절충주의로부터 근대주의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말하자면 레프턴은 풍경정원의 기본원칙을 대체로 지키면서도 고객의 희망에 유연하게 대응했던 것인데, 인공적인 것의 상징으로 배제되었던 분수를 부활시킨 것이 그 한 예가 된다. 저택의 주위를 풀밭으로 둘러 풍경을 연장시키는 것이 종래의 스타일이었으나, 레프턴은 여기에 테라스와 계단, 그리고 화단을 설계하면서, 인공적이고 규칙적으로 꽃을 심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다는 기록마저 남겨놓기까지 했다. 중산계층의 성장
레프턴이 타계한 후, 가장 유력한 조원가가 된 이는 존 라우던이다. 풍부한 지식과 무진장한 정력을 지닌 라우던은 원예, 조원사(造園史), 건축, 농업에 관해 6000만자에 이르는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1822년에 출판된 역사상 최초의 『정원사전』도 그의 손에 의한 것이다.
젊은 시절에 라우던은 불규칙한 풍경정원을 지지했지만, 유럽을 여행하고 역사적인 정원을 견학한 후에는 규칙적으로 ‘고풍한’ 정원에도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의 영향으로 프랑스식 정원의 부활이 가속화되었다. 라우던은 1862년에 창간한 『가드너스 매거진』에서 이러한 스스로의 양식을 변호했다. 이는 ‘정원만들기’라기보다는 ‘식재’에 관한 이론이라 할 만큼 여러 가지 식물의 가치를 최대로 끌어내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할 정도인데, 그는 한마디로 ‘질서 있는 다양성’을 장려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즈음 이국취미가 지배적인 현상이 됨에 따라 화초묘목 생산이 과잉상태에 이를 지경이었다. 이는 신종 식물의 수입이 불일 듯 했던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18세기 말에는 목적지를 포함해 세세한 지시를 받아든 노련한 식물학자가 식물의 신종연구를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 거기에다 아마추어 수집가가 더해진데다가 많은 선교사와 탐험가들이 수집전쟁에 가세했다. 묘목 생산가는 대약진을 거듭하면서, 전 세계로 수집가를 파송했다. 1804년에 창립된 원예협회와 1959년에 창립된 왕립큐식물원도 수집가를 급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식물운반용의 나무상자의 발명에 의해 수입식물의 생존율은 90%까지 끌어올려졌다. 통신판매회사들이 활력을 띠고 온갖 종류의 화초를 공급하는 동시에 식물과 식물재배에 관한 안내서를 제공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불을 보듯 했다. 말하자면,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식물학적 발견에 의해 신종 식물이 범람하자 ‘심미안’을 결여한 정원은 색과 형의 혼란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게다가 1845년의 유리세 폐지는 작은 영지를 가진 소귀족들로 하여금 온실을 이용하여 실내식물의 재배와 외국산 식물의 순화, 묘목의 증산을 촉진하는 한편, 영국의 신흥 중산계급으로 하여금 손쉽게 온실에 손을 뻗치도록 만들었다.
1830년의 잔디 깎기 기계의 발명과 원예잡지의 영향도 작은 정원의 발달을 촉진했다. 대정원은 의연하게 존재했지만, 대정원의 소유자에 필적하는 부를 손에 넣기 시작한 영국 중산계급사람들도 정원에 대한 취미를 높여갔고, 이렇게 해서 정원만들기는 최고로 인기 있는 취미가 된 것이다.
프랑스의 영국식 정원
영국식 정원은 물론 영국을 모태로 해서 발전해나간 것이지만, 그렇다고 영국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장 자크 루소가 순수한 자연을 극찬하는 한편, 사회의 타락을 지적했고, 독일에서는 쉴러와 괴테가 신낭만주의 운동을 제창하면서, 영국에서 생겨난 풍경정원의 양식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토양을 만들어냈다.
고전문화와 함께 근대사상에도 정통했던 지라르당 후작은 군인으로서 많은 시간을 여행에 바친 후, 파리 근교의 에름논빌 지역을 정비하면서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정원을 만들었다. 그 정원의 구성은 영국에서 지라르당을 열광케 한 리소즈와 비슷한데, 원을 그린 산책로와 많은 기념비와 비문, 계산된 적정수준의 다양성이 눈에 띠는 이 정원은 시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그 역시 풍경정원을 지지했던 사람으로서, 그가 만든 버밍검 근처의 리소즈에 있는 정원은 작지만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풍경정원은 숭고, 미, 그리고 멜랑콜릭 또는 명상적이라는 세 가지 성질을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일러져 왔는데, 이러한 이론이 리소즈의 정원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그 정원을 ‘장식정원’이라고 불렀는데, 원을 그린 산책로에는 조각상과 벤치, 고딕 양식의 표현, 비문 등이 배치되었다. 이것들은 관상을 위해 발을 멈출만한 장소를 가리키는 힌트이기도 했다. 그의 에세이 「정원만들기 잡고」는 그의 정원이론을 여실하게 드러내면서, 유용한 참고사항을 많이 담고 있다.
에름논빌의 정원에는 화가 유베르 로베르가 디자인한 장 자크 루소의 묘가 중요한 포인트 로 이용되고 있다. 루소는 인생의 최후 6주간을 여기에서 보냈기에, 그에 대한 경의표시로 그의 묘가 여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묘와 묘 모양의 기념비를 장식으로 자주 사용한 당시의 풍조를 드러내는데, 로베르는 프랑스 정원에 회화의 영향을 끌어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또 하나의 유명한 영국식 풍경정원인 멜빌정원의 회화적인 풍경과 건축물도 그의 구상에 기초한 것으로서, 이는 자연을 회화적으로 재편성한 역작으로 손꼽힌다.
파리 서쪽에 몽비르 남작에 의해 만들어진 레의 황야도 구부러진 정원로, 무너진 원주, 폐허처럼 만들어진 집, 피라미드 형의 얼음저장고, 영묘(靈廟) 등등을 갖춘 신비하고도 극적인 정원이다. 이는 남작의 프리메이슨단원으로서의 신념과 연관될 수도 있겠지만, 모두 19개의 건조물과 동굴이 있는 중에 등신대를 넘어선 크기의 목신(牧神)상과 중국풍의 건물까지 갖추게 한 아이디어는 영국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런던 교외에 큐가든을 디자인한 윌리엄 쳄버즈에게서 극단에 이른 이국취미는 광기라고 말할 정도로 붐을 이루면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영불해협을 넘은 풍경정원에는 나폴레옹의 제1제정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로부터 영국에 이주했던 역사적 사실도 작용한다. 제정붕괴 후에 귀국한 저들이 영국의 풍경정원 양식을 모국에 전한 것이다. 예컨대 가브리엘 토앙은 크고 작은 정로와 원형의 잔디밭, 새 모양의 식재라는 단순 모델을 기초로 영국정원을 합리적, 실용적인 프랑스식으로 체계화하여 그 보급을 촉진했다. 1860년대에는 영국의 카페트 펫팅이라는 융단모양의 식재를 모방한 새 모양의 식재가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그 모양을 남긴 공원이 남아있다. 프랑스에서는 이른바 카페트 펫팅과 플라워 펫팅을 혼합한 ‘모자이클츄르’라는 신양식이 만들어졌다. 디자인은 기하학적이지만, 그 안에는 추상적인 것과 동물을 본 딴 것이 섞여 있다.

공원의 탄생
이와 같은 19세기에 특권계급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위한 공원이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물론 프랑스에는 공공의 산책로가 옛날부터 존재했고, 18세기에는 북동부의 도시 낭시의 라 페피니엘과 같이 공원이 도시개발의 프로젝트에 편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혁명정부는 성직자와 귀족, 왕의 영지를 몰수하여 그들이 소유했던 정원 중 몇몇을 공공의 산책 장소로 바꾸었다. 빈에서는 1777년, 황제 프란츠 요셉2세가 프라다를 공개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놀이정원’으로 만들었다. 나아가 덴마크의 히르쉬페르트는 민족주의의 표현과 자연을 결합시킨 ‘폴크스가르텐’의 개념을 형성했다. 이 개념은 독일로 건너가 페터 요셉렘네는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의 설계에 애국적 테마의 조각상과 전몰자기념비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19세기 프랑스가 만들어낸 근대묘지의 역사도 교회부지 안에서의 매장이 금지된 1786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1804년에는 유명한 페르 라세즈 묘지가 문을 열었는데, 구부러진 오솔길과 수풀, 여기저기에 배치된 못과 호수에 의한 경관은 풍경정원 양식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18세기의 정원이 모두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비와 건축물을 배치해놓은 것을 생각해보면, 묘가 정원의 장식물을 대신했다는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묘지는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정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원의 탄생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영국에서 찾아질 수 있다. 18세기에는 관상정원에 예약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으니, 왕실 정원에는 공개의 원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원자에게 휴식을 취할 장소도, 벤치도 제공되지 않았다. 1820년에 이르기까지 하이드 파크는 영국에서 유일한 마상 산책장이었으나, 전혀 정비되지 않았다. 영국에서 최초로 공원의 개설을 주장한 이는 앞서 말한 라우던이다. 그로부터 공원 제공이 민중의 불만을 누그러뜨린다고 믿음이 생겨났던 바, 1835년에 건설된 켄트주 그레브샌드의 테라스 가든은 그러한 공원의 최초 사례가 된다.
그러나 규모의 크기를 과시하는 것은 조셉 박스턴이 손을 댄 공원으로서, 박스턴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23세에 착스우스의 테폰샤 공의 정원책임자가 되면서 혁명적인 온실디자인을 시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박스턴이 처음으로 설계를 의뢰받은 공원은 비버풀의 프린스즈 파크인데, 그는 이 공원에 새로운 회유(回遊)시스템을 받아들였다. 1844년에 건설을 시작한 바켄헷드의 공원은 그가 설계한 공원 중에서 가장 유명한데, 개인이 아니라, 공공기관에 의해 발주된 최초의 공원이다. 이와 같은 도시공원의 탄생은 도시계획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는 바, 이 점에서는 나폴레옹 3세에 의한 파리 재건이 주목받을 만하다. 가로수가 심어진 새로운 간선도로, 공원과 공공산책로, 그리고 도시에 흩어져 있는 스퀘어(소공원)가 그 당시에 건설되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어 1860년대 말에는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와 식민들도 이 모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의 주된 관심은 정원에 있는 만큼, 그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기로 한다.
이때 윌리엄 로빈손의 이름이 크나큰 의미를 갖게 된다. 아일랜드 사람인 그는 견고한 도면에 의한 융단화단을 이용한 정원에 격렬하게 혐오감을 느끼면서 개혁의 길로 돌진했다. 여기에는 1860년대의 산업혁명에 의해 대량생산된 공업제품이 홍수처럼 생산되고, 전 세기까지 인간에게 위협적이던 자연이 오히려 인간으로부터 위협을 당하게 되는 변화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로빈손은 말하자면, 자연을 존중하는 방향을 택한 것으로서, 이는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과는 연관되면서 다소간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