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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협곡 막다른 곳에 소수 민족 묘족 마을 덕항(德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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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몬 댓글 0건 조회 1,535회 작성일 11-08-23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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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대협곡의 아름다운 사람들 
별천지가 따로 없다. 어떻게 이런 곳을 정착지로 삼았을까.
협곡은 웅장하다. 종일 가랑비가 흩뿌리는 탓인지 산 속은 골골이 연무가 가득하다. 희뿌연 골안개에 휘감긴 봉우리는 한 폭의 수묵화다. 
장가계시에서 2시간 거리인 길수시(吉首市)에서 다시 30분을 달려 산길로 들어서자 크고 작은 봉우리가 앞을 가로 막는다. 그 사이로 길이 통한다. 묘족 마을 덕항(德夯)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덕항은 아름다운 대협곡이란 뜻이다.
 깊은 협곡 막다른 곳에 소수 민족 묘족은 삶의 터전을 잡았다.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곳, 어떤 외부의 위협에도 안전한 곳. 하지만 산수가 수려한 골짜기를 찾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묘족(苗族) - 치우(蚩尤)의 후손
  묘족은 치우의 후손으로서 중국의 가장 오랜 소수 민족의 하나다.
 주로 귀주, 호남, 운남, 광서, 호북, 중경, 해남도 등 8개의 성과 시에 분포한다. 이밖에 일부 묘족은 동남아와 유럽으로도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기준으로 중국 전체에 894만명이 살고 있으며, 2006년 현재 호남성에 33%가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상시의 묘족들은 스스로 ‘꿔슝((果雄)’이라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홍묘(紅苗)’라 부른다. 치우는 중국의 고대 부족은 황(黃), 염(炎), 치(蚩) 등 3대 부족의 하나로서 모두 황하의 유역에 살다가 전쟁에 패해 장강 중하류의 남쪽으로 이동했고, 그 후 여러 차례 이주를 거듭하다 현재의 상서와 중국 남쪽의 성에 정착한 것으로 중국 역사서들은 기술하고 있다.
 치우는 중국에서도 ‘전쟁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치우천왕에 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해 40여종의 중국 사서에 실려 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정사에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사기’등 중국의 사서에는 치우천왕을 구리 피부에 4개의 눈, 뿔 달린 머리를 가진 폭군, 또는 침략자로 묘사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를 연 주인공임은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에선 ‘환단고기(桓檀古記)’와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에 치우가 배달국, 구려(句麗)의 14대 왕으로 기록돼 있지만 두 서적이 모두 위서(僞書)라고 판단,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50여 채의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사연 많은 연봉들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뒤로는 슬픈 사랑 이야기를 지닌 세자매봉, 동에는 4마리 말 머리 모양의 사마봉(駟馬峰), 북동쪽에는 화병봉(畵屛峰), 서쪽에는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인 반고봉(盤古峰), 남쪽에는 위쪽이 넓고 아래쪽이 좁은 옥찬봉(玉鑽峰)이 둘러서 있다.
치우 선조들의 이동 수단이었던 낙타가 자신들의 고향이었던 북방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닮았다는 낙타봉(駱駝峰) 등도 천년 마을의 수호신처럼 우뚝 솟아 있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엔 아름다운 폭포와 못이 숨어있다. 200m 높이에서 떨어지며 옥처럼 하얀 물방울 날리는 옥대폭포(玉帶瀑布), 구룡 계곡 깊은 곳의 216m의 낙차를 보이며 흘러내리는 유사폭포(流紗瀑布)와 그 물길이 만든 구룡담이 기기묘묘한 풍광을 만든다.
  가슴 시린 사랑의 전설
  첫 번째 이야기, 하늘의 시샘 - 세 자매봉
  먼 옛날, 묘족 세 자매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산 위에 올라 연가를 불렀다. 절절한 마음으로 삼일 밤낮 동안 묘족 민가를 노래했다. 그 후 하늘에 7개의 태양이 나타났다. 젊은 연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시샘한 것 일까.
성난 태양은 대지를 쩍쩍 갈라지게 했고, 수목을 말라비틀어지게 했고, 계곡의 물을 몽땅 마르게 하더니 세 자매마저 불 태워 돌로 만들었다.
돌로 변한 세 자매가 지금 마을의 뒤에서 꽃무늬 옷을 차려입은 바위산으로 남아 후손들을 지키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 사랑의 승리 - 옥찬봉
  먼 옛날, 옥제(玉帝)의 셋째 공주가 덕항으로 유람을 왔다. 그리고 용감하고 근면한 묘족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공주의 어머니는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미 공주의 배필로 해룡왕(海龍王)의 아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 태자는 이들의 사랑을 용납할 수 없었다. 묘족 청년을 죽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용 태자는 덕항을 찾아와 바람과 비를 일으켰다. 홍수가 났고,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다. 마을 사람들은 산꼭대기로 대피했다. 그러나 성난 물살은 계속 거세게 범람해 모두가 익사 직전까지 내몰렸다.
이 때 하늘에서 공주가 내려왔다. 넘쳐 오르는 물살을 보자 물길을 바꾸기 위해 황급히 산에 커다란 동굴을 뚫었다. 땅에도 동으로, 서로 많은 구멍을 뚫었다. 물길이 잡히기 시작했다. 물은 땅 속으로 스며 들였다. 마침내 마을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화가 난 용 태자는 붉은 용으로 변신, 묘족 청년을 덮치려 했다. 청년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발의 화살을 날려, 붉은 용을 물리쳤다.
결국 공주는 묘족의 풍습에 따라 사랑하는 청년과 결혼했다.
지금도 산 위에는 공주가 뚫어놓은 구멍이 남아 있다. 그래서 옥찬봉이다.
묘족은 그들만의 의식을 갖고 있다.
외부인이 마을로 들어설 때는 반드시 ‘란문주(欄門酒)’를 마셔야 하고, 노래를 맞받아 부르며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를 어기면 엄한 벌을 받는다. 얼굴에 목탄가루를 달라 숯 검둥이로 만들거나, 팔다리를 모두 원주민에게 붙잡힌 채 엉덩방아를 찧어야 한다. 이런 통과 의례를 거친 뒤 전통 가옥에서 이색적인 식사를 한다.
그들은 치우의 후손인 탓일까.
우리네 입맛에 맞는 쫀득쫀득한 찹쌀떡이 있는가 하면, 각종 야채가 듬뿍 들어간 찌개도 있다. 전반적으로 음식은 시큼하고, 매콤하다.
 화려한 의상과 춤의 어울림
묘족의 의상은 화려하다. 장식 역시 마찬가지다.
빼어난 손재주와 전통 기법으로 아름다운 자수를 아로 새겼다. 묘족의 자수는 깨끗하고, 선명하다. 오죽하면 ‘문화사시(文化史詩)’라고 했겠는가.
꽃 무늬를 커다랗게 수놓은 옷을 입고, 갖가지 은 장식품으로 치장한다. 머리는 긴 뿔이 달린 용모(龍帽)를 쓰고, 다양한 문양의 목걸이와 귀걸이를 달고 있다.
그리고 북 치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공연이 시작된다.
계곡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리면 선남선녀 묘족들이 놀이마당을 모인다.
옛 이야기로 전해온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용맹스런 청년들의 모습도 춤으로 그려낸다.
벌겋게 달아오른 무쇠 칼 위를 맨발로 걷는가 하면, 입으로 도자기 그릇을 깨고는 다시 그것을 씹어 먹는 제사장 격인 ‘묘노사(苗老司)’의 공연도 곁들여진다.
이들은 공연만을 생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그 곳에서 일상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손발을 맞추고, 필요할 때 공연하는 주민들이다. 해마다 최고의 북 춤꾼을 뽑아 주인공으로 삼는다. 평소에는 농사짓고, 밥 하고, 수놓는 일이 주업인 보통 사람들이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전통을 있는 그대로 이어간다. 순수한 전통 문화 지킴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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