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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난성의 서쪽 끝, '신비로운 상시(湘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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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몬 댓글 0건 조회 1,563회 작성일 11-08-23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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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물과 노래와 사람이 아름다운 옛 마을
후난성의 서쪽 끝, '신비로운 상시(湘西)'가 있다. 뉴질랜드의 시인 루이 앨리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옛 마을'이라 칭송한 곳이다.
그 곳에 가면, '봉황고성(鳳凰古城)'을 거닐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초나라의 땅이요, 당나라 때는 웨이양(渭陽)현으로 불리다 청나라에 이르러 '봉황'이란 지명을 얻었다.
무려 4000여년의 흔적이 배어 있다. 사람이 있다. 어제와 오늘을 아우르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삶의 흔적을 남겼고, 인재를 배출했다.
연간 50여만명의 한국인이 찾는 세계문화유산 장자제(張家界)의 텐즈(天子)산 관광을 위해 대형 주자창에 내리면 길 건너편, 상가 위쪽으로 커다란 광고판이 죽 내걸려 있다. 중심부를 차지해 가장 눈에 띠는 것이 ‘봉황고성 안내판’이다. 타강(沱江)의 밤 풍경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창사에서 장자제까지 5시간, 다시 장자제에서 서남쪽으로 2시간여를 달려야 봉황고성에 도착한다. 이 곳에 타강이 흐른다. 타강을 따라 긴 성곽이 있고, 마을을 만들었다.
서문에서 동문으로 - 천년 돌길 따라 걷는 길
 유서 깊은 옛 마을엔 사람이 많다. 동남아에서 찾아온 화교들로 북적인다. 아직 한국 관광객은 드물다. 봉황성의 서문인 ‘부성문(阜城門)’ 앞, 오른쪽에 '희다희(喜多喜)'란 한글 간판을 내건 패스트푸드점이 눈길을 끈다.
부성문으로 들어서면 작은 광장을 가득 메운 커다란 봉황 조형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광장을 따라 돌다 오른쪽으로 틀면 쭉 뻗은 옛 길이 나온다.
바닥은 돌이요, 좌우엔 전통 상점이 줄지어 있다. ‘석판가(石板街)’다. 묘족과 토가족의 특산품을 파는 거리다. 역사가 깊은지라 꽤 규모가 크고, 활력이 넘친다.
 그 가운데 '봉황성'이란 휘호가 새겨진 기념탑이 보인다. 2001년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가 힘차게 휘갈긴 글씨다.
토가족의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관광객을 유인하는 노인, 크고 작은 술통을 진열해 놓은 양조장, 근대화의 물결이 중국 대륙을 휘몰아치던 시절에 ‘변성(邊城)’이란 현대소설로 필명을 떨친 문호(文豪) 선총원(沈從文)의 고택이 옛 정취를 더해 준다.
‘변성’은 1984년 링즈펑(凌子風)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영화로 만들었다.
루쉰의 ‘아Q정전(1982년 천판 감독)’, 장텐이의 풍자소설 ‘바오씨 부자(1983년 셰테리 감독)’와 함께 5.4문학을 소재로 만든 영화들은 중국이 폐쇄적이던 마오저뚱 시대에서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시대로 변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선총원(沈從文, 1902년 12월28일~1988년 5월10일)
  중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학자이다. 원명은 선위에환(沈岳煥). 어머니가 이 고장의 소수 민족인 묘족(苗族) 혈통이다.
 봉황고성의 중영가(中營街) 10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섯 살 때 사숙에서 글을 배웠고, 상시 지방의 대자연 속에서 많은 영감을 받으며 성장했다. 1924년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무한대(武漢大), 서남연대(西南聯大), 북경대(北京大)에서 후학을 지도했고 '대공보(大公報)' '익세보(益世報)' '평명일보(平明日報)' 등의 편집 책임자를 역임했다.
 대표작인 '변성(邊城)'과 '상서산기(湘西散記)' '장하(長河)' 등 70여권의 소설과 산문집을 출간했고, 중국역사박물관과 고궁박물관에서 고대 복식과 문명사를 연구해 '중국고대복식연구'를 출판했다.
  선총원의 옛집은 상시 지방의 전형적인 사합원 구조로써 책상과 전축 등 작가가 쓰던 유품들이 그대로 전시돼 있다.
 상자 포장용 붉은색 노끈으로 접근 금지 선을 만들어 놓는 등 보존 상태가 엉성하지만 생전의 삶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성벽 따라 가는 길, 천년의 길
골목은 길로, 길은 다시 골목으로 이어지다 동문인 승항문(升恒門)에 다다른다.
동문 옆은 복잡하다. 한 패의 전통 수공예품과 과일을 파는 노점상이 이 곳을 차지하고 있다.
승항문을 지나면 타강의 옛 다리 홍교(虹橋)를 만난다. 그러나 여행자들은 한결같이 왼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긴 성벽이 나타나고, 성곽을 따라 아래 위로 두 갈래 길이 나란히 연이어 간다. 멀리 북문인 벽휘문(璧輝門)이 보인다.
어린 딸과 함께 화관(花冠)을 만드는 여인, 성을 벽 삼아 좌판을 펼치고 수 놓는 아줌마. 아래 길가 노점상은 때 늦은 점심을 먹는다. 고양이를 안고 있다. 묘족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주먹만한 돌덩어리 하나를 꼬질꼬질한 천 조각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고 하염없이 ‘살 자(者)’를 기다리는 남루한 행색의 아저씨가 있다. 긴 글을 앞에 놓고 머리를 조아린 걸인도 있다.
그 곳에 어제와 오늘의 삶이 있다.
벽휘문을 지나면 '봉황'이 배출한 또 다른 인재로서 중화민국 초대 내각 총리를 지낸 정치인 슝시링(熊希齡)의 옛 집이 있다.
  슝시링(熊希齡, 1869년 6월25일~1937년 12월5일)
  어릴 때부터 '호남신동(湖南神童)'이란 불린 정치가이자 교육자였다. 다섯 살 때 '삼자경(三字經)'과 '백가성(百家姓)'을 암송할 정도였다. 스물한 살 때 과거에 급제했고, 스물네 살 때는 진사가 됐다.
유신변법을 주장했다. '상보(湘報)'를 창간했고 시무(時務)학당과 상덕서로(常德西路)사범학교에서 후학을 길렀다.
민국 3년(1913년) 중화민국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지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독재에 항거했다. 항일투쟁에도 적극 가담했다.
  천리 밖 스촨(四川)에서 흘러온 강 - 타강 유람
 벽휘문을 내려서면 푸른 듯 희뿌연 타강이 흐른다. 타강은 봉황의 젖줄이다.
성루에서 내려서면 타강의 남쪽이다. 짙은 청색의 묘족 전통 의상으로 단장한 총각 뱃사공은 손님을 기다리고, 주황색 지붕을 한 조각배는 줄지어 강물에 출렁인다.
저 앞에 홍교(虹橋)가 있고, 강안에는 세월의 풍상이 그대로 배어나는 수상 가옥인 조각루(弔脚樓)가 어깨를 맞대고 서있다. 지금은 강변 여인숙이나 강변 카페로 바뀐 곳이다.
강가에도 사람은 있었다.
어린 아들을 얹고 빨래하는 아낙네, 물 위에 떠있는 의자에 마주 앉아 강물에 발을 당군 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타강 변의 풍광을 하얀 도화지에 담아내는 예비 화가, 뱃놀이를 즐기는 손님을 위해 끊어질 듯 이어지는 민요를 부르는 묘족 아가씨까지.
타강에선 해마다 단오절 때면 용주(龍舟) 경기가 펼쳐진다. 고성 사람들이 모두 나와 흥겨운 축제를 벌인다. 북 치고, 노래하며 전통을 이어간다.
타강 뱃놀이를 끝내고, 동관문을 끼고 돌면 홍교에 오른다. 명 나라 홍무 년간에 축조된 홍교는 청나라 강희 9년(1670년) 보수한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타강의 남북을 이어주는 홍교 위에는 전망대와 전시실, 상점 등이 있다.
홍교 전망대의 왼쪽에는 동관문(東關門)과 기봉사(奇峰寺)가 있고, 오른쪽의 조각루 사이에는 '봉황'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 황용유(黃永玉)의 화실 '탈취루(奪翠樓)'가 보인다.
  황용유(黃永玉, 1924년~현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졸업한 뒤 안휘성과 복건성 등을 유랑하며 작은 작업장에서 어린 노동자로 일했다.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열네살에 첫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 독특한 풍격의 판화로 국내외에 이름을 알렸다.
1952년 부인 장시메이(張溪梅)와 함께 홍콩에서 베이징으로 이주해 중앙미술학교 교수가 됐고, 중국미술가협회 부주석을 역임했다.
황용유의 그림은 민족적 색채가 농후하고, 사군자는 물론 산수와 인물까지 제재가 광범위하다. 대표작은 '풍우하화(風雨荷花)', '가향홍매(家鄕紅梅), '춘조(春潮)' 등이다.
 강은 그렇게 세월 속으로 흘러간다.
 상시(湘西) 사람들은 '봉황고성'에는 네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한다.
 "산이 아름답고, 물이 아름답고, 노래가 아름답고, 그리고 사람이 아름답다.(山美, 水美, 歌美, 人更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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