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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박물관의 도시, 프랑크푸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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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2,138회 작성일 12-02-23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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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박물관의 도시, 프랑크푸르트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에서 분당쯤 되는 노이이젠부르크 시에서 살고 있었지만, 근 7년의 세월을 드나들던 도시 프랑크푸르트에 대한 글을 막상 쓰자 보니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막연해진다. 남들은 하루 이틀 정도 다녀온 경험으로도 장문의 기행을 잘도 쓰던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 고장의 세세한 부분들이 새삼스럽게 깊은 인상을 남겨 오히려 쓸 것이 더 막연해지는가 보다. 그러나 금년에는 특히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때문에 이 도시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만큼 그와 관계된 이야기로 실마리를 풀어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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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저작권 거래 도서견본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1949년부터 개최되었는데, 독일출판인서적상협회가 주최한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사실상 도서전이라는 번역은 적합하지 않다. 문자 그대로 견본시(Messe)로서, 말하자면 이는 세계 최대의 저작권 거래 도서견본시이다. 매년 100여 개 이상의 나라들이 참가하여 전 세계 도서저작권의 25퍼센트가 거래된다는 식의 통계가 이 견본시장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2004년도에는 110개국에서 6,691명의 출품자가 참가했는데, 여기에 430명의 에이전트와 27만 명의 여행객이 몰려들었다. 게다가 12,000여 명의 기자들이 참여하여 최근의 출판동향과 추세를 보도했다. 세계 출판인 및 관련단체들의 국제회의(IPA 연례회의, 유통전문가, 저작권 전문가 회의 등)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시로서는 1년에 15회 정도 악기, 자동차, 모피 등등을 다루는 견본시장을 같은 장소에서 개최하여 만만찮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견본시 조직위가 각국 출판 꿈나무를 초대하여 전문세미나에 참석시키는 ‘프랑크푸르트 펠로우’, 젊은 서적상인들과 출판영업인들을 위한 독-불 실습생교류, 독-불간의 젊은 번역가들을 위한 프로그램, 아시아·아프리카·남미 문예물의 번역진흥 프로그램, 국제 서적상 세미나, 중·동부 유럽의 출판사와 서적상을 위한 전문 워크숍, 독일 도서의 판매촉진 프로그램 그리고 국내외 기구들과의 파트너십 정착 등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최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도서출판산업의 진흥에 그 초점이 놓여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단순히 상업적인 성격만을 지녔다고 보기에는, 책 또는 도서가 지니는 내용이 그렇듯이, 이른바 문화적 성격이 뚜렷하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박해받는 작가의 보호를 위한 ‘ 피난의 도시 ’ 프로그램, 평화상의 시상과 중심주제제도, 그리고 주빈국 프로그램의 운영 등이 그 대표격이다.

중심주제제도(1976~1986)는 2년마다 한 번씩 열렸는데, 주로 사회문화적 쟁점을 다루었다. 1996년에는 ‘신화·역사·현실·라틴 아메리카 문화’가 주제였고, 억압받는 소수집단이라는 관점에서 설계된 ‘어린이와 책’(1978) ‘아프리카 흑인 문학’(1980) ‘ 과거종교가 현대에서 갖는 의미’(1982), 조지 오웰을 조명한 ‘오웰 2000’(1984), 그리고 ‘인도문학’(1986) 등이 이어졌다.

주빈국 행사는 중심주제가 없던 1987년에 베스트셀러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가 개막식에 참가해 많은 관심을 끈 것에 착안해, 이탈리아가 1988년에 대통령과 외무부 장관이 개막식에 참가하는 등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 자국을 책의 나라로 알리는 데 성공한 것을 효시로 삼는다. 이후 해마다 프랑스, 일본, 스페인, 멕시코, 네덜란드, 브라질,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위스, 헝가리, 폴란드, 그리스, 리투아니아, 러시아, 아랍연합 등이 이른바 주빈국으로 초청되었다. 조직위는 ‘주빈국 자격’으로 문화적 수준이 높아야 함은 물론, 정치적으로 민주적이고 성숙해야 하며, 상당한 경제·사회적 발전을 이룬 나라라고 내세움으로써 초청되는 국가의 자존심을 세워준다.

2005년도 주빈국이 한국이라는 것은, 우리 나라가 이와 같은 기준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느냐는 자평이 정부로 하여금 ‘문화올림픽’에서 마치 금메달을 따낸 듯이 국고 120억 원을 비롯하여 180억 원을 투입해 한국이 문화국가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도록 만든 것 같다. 그리하여 한국 출판역사와 책, 작가, 문화·예술 소개라는 5개 존(zone)을 포함한 주빈국관과 함께 1961년부터 참가해오면서 1998년부터 유지해온 국가관을 올해에는 5배 가량 늘려 (총 1,103㎡) 약 6,000종, 총 10,000부의 출품도서를 전시하는 한편, 파주출판단지의 모형 전시와 카페 리브리와 포럼 리브리 등을 통한 상담과 각종 행사의 개최를 가능케 했다.

전체 예산의 5분의 1이 투여되었다는 주빈국관 중앙에는 한국의 책 100권이 거대한 선돌 모양의 조형물 24개에 부착된 첨단 디지털 매체를 통해 다양한 인터페이스로 구현되면서 그 내용은 행사장 안과 밖에서 각종 단말기로 내려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설치물에 압도되어서인지 사람들이 소프트웨어에 접근하는 확률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집중과 선택’을 하나의 전략 개념으로 채택한 조직위는 위원장과 총감독이 문학평론가이고 시인이어서인지 문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이에 공연과 전시를 곁들였다. 문화를 예술로 좁혀 생각한다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책이라는 매체의 내용적 폭을 생각한다면, 다른 분야들은 소외되었다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옴직도 하다. 그러나 한국 문인들 중에 고은, 황석영, 김지하, 오정희가 주목받았고, 독문학에 바탕을 둔 김광규, 젊은 세대의 김영하, 배수아, 조경란, 한강 등도 관심을 끌었다는 평판이다. 고은, 황석영, 김지하 등의 작가들에 대한 조명이 정치적인 경력에 비중을 두는 듯하다는 후문도 없지 않다.

도서전시와 함께 행사의 중심을 이룬 작가 낭독회 중에서도 ‘ 프랑크푸르트 작가의 집’에서 이루어진 대산문화재단 주최 행사가 연일 좌석이 모자랄 정도로 성황을 이룬 것은 독일문인의 사회와 전문 성우에 의한 낭독에 힘입은 바 크지만, 아주 기분 좋은 성과이다. 이밖에도 개막공연을 비롯하여 연극공연과 음악행사들이 있었는가 하면 분단극복을 주제로 한 학술회의와 문화중심도시를 주제로 세미나 등이 있었는데, 본인은 ‘ 문화수도의 기본조건 ’이라는 세미나에서 발표할 기회를 가졌다.

역사와 예술을 자랑하는 문화도시

도서견본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이제 시내로 발걸음을 옮기도록 하자. 필자가 철학 공부를 위해 프랑크푸르트대학에 등록한 것은 1977년 3월이었다. 주택난으로 인해 결국 외곽 도시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지만, 바로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은 독일의 울창한 숲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살던 지역은 노이이젠부르크 시의 제2지역인 그라펜부르크로서 프랑크푸르트 시와는 숲을 경계로 구분되어 있었고,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바로 그 경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숲은 산책로와 자전거 길로 두 지역을 연결시켜 놓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지역 쪽은 프랑크푸르트 시의 남부 묘지로 이어진다. 유럽 전역이 그렇듯이 이곳의 묘지도 꽃과 개성 있는 묘비들로 마치 공원같이 꾸며져 있어 방문객들의 마음을 한결 부드럽게 해주고 있다. 그 앞으로는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놓여 있다. 물론 공항으로 나가는 길은 여러 군데 있지만, 남쪽에서는 이 길이 가장 가깝다. 프랑크푸르트 시는 마인 강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리적으로 보아 프랑크푸르트 시는 유럽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로 내려오면 그 도시는 국제적인 은행 도시로 성장하게 되고 독일경제 생활의 거울로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 ‘항구적인 러시아워의 도시’라고 자조한다. 이 도시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철저하게 파괴된 것도 그러한 경제적 지위 때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 도시가 얼핏 미국의 대도시들이나 서울과 별로 차이가 없을 듯한 외관을 지니게 된 것 역시 기능주의 탓이리라.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프랑크푸르트 시 행정당국은 프랑크푸르트 시의 다른 면모들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역사와 예술을 포함한 문화도시로서의 프랑크푸르트 시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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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지나온 남부 묘지를 벗어나 시내 쪽으로 좀더 가면 마인 강을 만나게 되는데,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처에서 한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서쪽 강둑에는 미술관들이 늘어서 있고 동쪽 강둑에는 이 지역을 설립했던 작센 족의 체취를 맡아 볼 수 있는 구도시가 전개된다. 체취라고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과 술냄새라고 해야 할 듯싶다. 사과를 뜻하는 독일어 아펠(Apfel)이 있고, 술을 뜻하는 독일어 바인(Wein)이 있지만, 이 지역에서는 사과술을 결코 아펠바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에벨바이(Ebbelwei)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향수 때문이다. 꼭 사과술집만은 아니라 갖가지 형태의 유흥업소들이 개성을 뽐내지만, 역시 그 중심에는 최초로 사과술을 만들었다는 할머니 동상이 서 있듯이 ‘에벨바이’와 아코디언으로 연주되는 독일의 전통 민요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한국 사람이 들어서면 한국 노래를 연주해 주는 곳도 있다.

도시 구경을 채 시작도 하기 전에 술타령부터 쏟아 놓은 셈이 되어 민망하지만, 술이 아니라 문화를 설명하려는 의도였음을 이해해 주기 바랄 뿐이다. 프랑크푸르트 시의 문화행정을 담당하는 부서 건물과 유스호스텔 등이 있는 동쪽을 벗어나 서쪽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풍경이 전개된다. 특히 토요일 아침이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곳에서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골동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비롯해서 값싼 일용 잡화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을 아무나 들고 나와 거래한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사슴 조각의 담배 빨부리도 이곳에서 구입한 것인데, 여간 정교하지 않다. 차츰 싸구려 물건들로 가득 차고, 게다가 소매치기 등의 범죄가 잦아 흥미가 덜해져 가지만 프랑크푸르트의 명물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평일에는 더없이 조용하다. ‘ 미술관(또는 박물관) 강둑 ’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대로 시립미술관 (Stadel)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즐비하다. 우편박물관이 있는가 하면, 인류학박물관이 있고, 응용미술박물관이 있는가 하면 조각박물관이 있다. 초등학생들의 미술사 교육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나, 프랑크푸르트 조형예술대학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모두 극히 자연스럽다.

세계에서 규모가 잘 갖춰진 괴테도서관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구경을 해도 모자랄 이 지역을 아쉬운 대로 떠나서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건너도 우리는 여전히 문화와 역사의 도시로서의 프랑크푸르트를 벗어나지 못한다. 바로 그곳이 로마 광장으로서, 우리는 그곳에서 프랑크푸르트 시가 단순히 상업도시만이 아님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시가 독일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즉위와 대관식이 행해지던 장소임을 이들은 몹시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 로마 광장에는 그러한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이 병풍을 치고 있는데, 로마 시대의 유적을 발굴해 놓은 역사 정원 외에도 1308년에 세워져서 15세기에 현재 규모로 확장된 리프프라우엔교회, 13세기 초에 세워진 니콜라이교회와 성바톨로메우스교회(대성당), 그리고 길 건너에 있는 성바울교회 등이다. 시 예배당이던 니콜라이교회는 현재 교회일치운동에 적극적이어서 혹시 교회 갱신이나 예배 갱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의 예배에 참석해 볼 만하다. 대성당에서도 가끔 기타 반주로 미사를 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도 그 영향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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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들 중에서 성 바울 교회가 독일의 최근세사와 직결되면서 독일 통일과 민주주의의 상징들 중 하나로 꼽힌다. 1787년으로부터 1833년 사이에 고전적 양식으로 세워진 이 교회는 1848년에서 1849년에 이르는 제1차 독일의회가 개최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구 시청을 비롯해 아직 역사적인 유적들이 더 있지만, 이 구역에 역사박물관이 세워져 있다는 것만 말해 두고 이곳을 떠나기로 한다. 단, 그 역사박물관에는 영화 필름 창고가 부속되어 있어 매년 청소년을 위한 영화제가 개최된다든지, 광장에는 때로 분노한 시민들의 정치 집회가 개최되기도 하지만, 마인 축제나 성탄 축제 때에는 장이 서서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는 이야기만 덧붙여 놓기로 한다. 1543년부터 광장 복판의 ‘정의의 샘물’에 서 있는 정의의 여신이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1985년에 다시 가 보았더니 이미 복원이랍시고 그 광장의 상당 부분에 고풍의 가옥들이 들어차 있어 여유로운 분위기가 다소 가신 것이 아쉬웠다.

독일 역사와 문화를 한 몸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가 누구일까? 예컨대 요한 볼프강 괴테를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에서 1749년 8월 28일에 태어났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프랑크푸르트 시를 ‘괴테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로마 광장을 벗어나서 큰길 건너의 골목길로 접어들면 그곳에 바로 괴테 생가가 있다. 워싱턴 교외의 워싱턴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해 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듯이 여기에서도 우리는 “참 잘 살았구나”하는 소리를 절로 내뱉게 된다. 건물이나 가재도구들이 1944년에 불타 다시 손질한 것이기는 해도, 아직 당시의 오래된 가구들이 다수 보관되어 있다. 이곳에서 그는 소년 시절을 보냈고,『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1775년 칼 아우구스트 대공의 부름에 따라 바이마르로 떠났고, 그 후 그곳에 정착하게 되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천재의 어린 시절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 필자에게는 특히 괴테가 즐겨 했다는 인형극 상자가 인상적이었다. 시험 성적에 시달리는 오늘의 한국 청소년들에 비해 그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괴테하우스에 바로 붙여 세워진 괴테박물관도 볼 만하다. 그림을 비롯한 실물 자료들로 괴테와 괴테시대를 재현시켜 주고 있는데, 1만 2천 점이 넘는 자필 원고를 비롯한 자료들로 인해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잘 갖춰진 괴테도서관이기도 하다.

괴테와 프랑크푸르트는 참으로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필자가 6년을 조금 넘게 수학한 프랑크푸르트대학도 정식 명칭은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이 대학은 1914년에 시작되어 1932년부터 요한 볼프강 괴테대학으로 불리고 있다. 순전히 시민의 손으로 시작된 이 대학의 역사와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지금은 캠퍼스가 옮겨 훨씬 대학다워졌는데, 이 새 건물은 한때 나치스가 감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가 전후에는 미군 사령부가 머물기도 했다). 730년에 세워져 당시 수비대가 사용했다는 ‘하우프트박헤’(주경비대) 앞의 카타리넨교회(1678~1681)도 괴테가 유아 세례와 견신례를 받은 곳이라고 소개될 지경이다. 또한 도시 여기저기에서도 프랑크푸르트 시 전체를 깔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괴테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연극과 오페라가 공연되는 복합 극장 건물로부터 ‘알테 오퍼’, 즉 왕년의 오페라 하우스 사이의 녹지대에도 실러와 함께 있는 괴테의 동상이 서 있는데, 이는 여럿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연극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이야기를 좀더 해 둘 필요가 있을 듯싶다. 필자가 그곳에 머물 당시 거기에는 11개의 크고 작은 극장들이 있고, 제각기 특색 있는 양식의 연극들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고전극, 대중극, 카바레트극, 전위극 등등이 공연되는가 하면, 희극 전용극장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시립극장인데, 거기에는 소극장, 연극 전용극장, 오페라 전용극장이 한데 모여 있다. 무용은 오페라 전용극장에서 이루어진다. 극장 지하에는 카페 레스토랑이 있어 공연이 끝난 후에는 그곳에서 방금 무대 위에서 보았던 배우들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즐거움도 누린다. 이 극장은 시내 한복판에 있어 교통편이 그곳을 찾아 들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 소극장과 대극장에서는 고전극들뿐만 아니라 현대극들이 골고루 공연되고 있는데, 공연의 수준은 베를린이나 함부르크보다는 다소 떨어지지만, 적어도 제1급에는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오페라와 무용도 그러하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문화정책

연극과 관계된 프랑크푸르트 시의 이름은 그러나 TAT(테아터 암 투름)로 인해 더욱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전위적인 성격의 공연들이 많이 이루어지는데, 그때의 전위적이라는 뜻은 반드시 형식만을 뜻하지 않는다. 예컨대 청소년의 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보수적인 시당국과 갈등을 빚어내기도 한다. 필자는 주로 앞에 설명한 시립극장과 이 ‘ 타트 ’를 드나든 편이다. 예컨대 아이들과 함께 ‘ 지젤 ’이라는 무용극을 이 ‘ 타트’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공연은 남성들만이 출연해서 일종의 고전무용에 대한 패러디를 시도한 것이었다. 그 후 아이들이 중학생이 된 다음 서울에서 ‘지젤 ’의 정식 공연을 보고 나서 프랑크푸르트 공연이 더 재미있었다고 했을 때 내가 한 일이 잘한 것이었는지 잠시 회의해 본 경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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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많은 연극 공연들이 하룻밤에도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는데, 연극과 관련해서 특기할 것은 아동 및 청소년 연극이다. ‘타트 ’도 이에 관심을 두지만, 어린이, 특히 미취학 어린이들을 위한 연극 공연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다. 많은 경우 유치원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 아이들의 경우에도 유치원에서 저희들끼리 하는 연극놀이가 아니라 정식 관객으로 이와 같은 공연 단체를 초청 또는 방문하는 경험을 통해 연극 예술의 세계에 입문한 셈이다. 이 모든 공연들이 물론 입장료를 받지만, 행정 당국은 보조를 통해 이들의 활동을 보장해 준다. ‘ 타트’의 경우처럼 당국이 공연 내용을 시비하는 사례란 극히 예외적이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것이 문화정책의 대강임을 그들은 잘 이해하고 있다.

최근의 명물 중 하나는 ‘알테 오퍼’이다. 이전의 오페라 하우스를 복원하면서 내부를 완전히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음악 전용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그에 소요된 경비로 인해 정치적인 분쟁이 일기도 하였다. 적어도 필자의 소견으로는 메인 홀은 물론 힌데미트 홀을 비롯한 소규모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음악들이 프랑크푸르트를 문화도시로 성장시키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저명한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특히 프랑크푸르트 공연예술대학 출신을 비롯한 신인들에게도 발표 기회를 마련하는 그 운용 방식은 우리들에게도 많은 시사를 준다.

아직도 들러볼 곳이 많다. 그러나 피곤해진 다리를 쉬기에는 ‘팔멘가르텐’(야자정원)이 적격이다. 필자도 대학에서 골치가 아파지면 그 가까이에 있는 이곳을 방문하곤 하였다. 열대식물을 모아 놓은 넓은 온실과 부속 시설들과 널찍한 정원이 신선한 공기와 조용한 안식을 제공해 준다. 유럽에서는 드문 은행열매가 열리기도 하는 이곳은 부활절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 달걀 찾기 ’ 놀이 공간이 되기도 한다. 사흘 만에 무덤을 헤치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해 이 달걀 찾기가 유행하는데, 프랑크푸르트의 경우 이곳이 그럴듯하다. 여름 저녁의 야외음악회도 잊지 못할 추억 중의 하나이다. 식물보다는 동물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학 근처의 자연사박물관이나 시 동쪽에 있는 동물원을 찾으면 된다. 이 동물원은 특히 야행동물들의 특별관이 유명할 뿐만 아니라, 야생동물의 사육, 인공반석에서 세계적으로 뛰어나다.

프랑크푸르트와 인연이 있는 철학자라면 이른바 비판이론에 속한 학자들을 떠올리겠지만, 그보다 앞선 세계적 석학으로는 쇼펜하우어를 들어야 할 것이다. 청년 시절에 괴테와도 인연이 있었던 그가 말년을 보낸 곳이 바로 이 도시다. 흔히 금욕주의 내지 염세주의로 알려져 있는 그의 시신은 프랑크푸르트 중앙묘지에 묻혀 있지만, 그의 유물들 중 상당수가 쇼펜하우어학회의 호의로 프랑크푸르트대학 도서관 3 층에 전시되어 있다. 필자는‘쇼펜하우어 서고’에 한글로 된 그의 저작 역서들을 기증하여 그 책임자인 노 철학자 아르투르 피셔 박사의 눈가에 이슬을 맺게 하기도 했지만, 그의 비판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호르크하이머를 비롯한 이른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을 소화시켜 보는 단계에 머무는 필자의 주제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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