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형도시,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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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2,036회 작성일 12-02-2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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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한ㆍ프랑스 수교 120주년의 해’를 잘 활용해 한ㆍ프랑스 양국간의 상호이해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전반에 걸쳐 공동협력의 가능성을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할 것 이다. 그런 점에서 오랫동안 프랑스 문화의 중심지 파리는 지속적인 관심 대상이 될 만하다.
2006년은 한·불수교 120주년을 맞는 해 이다. 여러 가지 행사가 기획되고 있는데, 주철기 주불대사는 한국을 주빈국으로 초청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견본시를 의식해서인지 파리국제도서견본시도 그 못지않음에도 한국 쪽에서의 관심이 너무 저조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 문화외교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강화 소재의 규장각 도서의 반환 문제나 고속철도 문제 등 현안이 있을 때에만 관심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행히도 2006년 1년 동안 문화행사와 경제·통상·과학 기술행사, 학술행사 등 약 100여 개의 크고 작은 다양한 행사들을 개최할 예정이다. 정부 주도의 행사뿐만 아니라, 우리 교포사회의 잠재력과 역량을 활용한 다채로운 행사도 준비 중이라는데, 프랑스 교포사회에는 미술·음악·건축·패션 등 여러 분야에 재능 있는 우리 예술가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으며, 많은 젊은 유망주들이 양성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지역보다 수준 있는 행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주철기 대사는 한국인과 프랑스인은 긴 역사를 통해 형성된 국가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 문화전통과 예술의 사랑, 문화 다양성의 존중, 쾌활한 성품 등으로 공통점이 크고 상호이해와 소통의 여지가 높다고 평가하면서, 21세기 세계화와 고도경쟁의 시대에 한·프랑스 두 나라는 상호 보완적인 협력으로 호혜적인 파트너십을 발전시킬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간 양성된 양국의 유능한 젊은 인재들은 한·프랑스 간 이해의 증진과 협력강화에 기여할 귀중한 자산이 되고 있는 바, 2006년 ‘한·프랑스 수교 120주년의 해’를 잘 활용해 한·프랑스 양국 간의 상호이해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걸쳐 공동협력의 가능성을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로 되도록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랫동안 프랑스 문화의 중심지 파리는 지속적인 관심 대상이 될 만하다.

2005년 10월에 있었던 유네스코 총회가 문화다양성협약을 최대의 쟁점으로 개최된 바 있어 유네스코 한국의 문화분과위원장 자격으로 참가했던 김에 파리 시내를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이미 너덧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파리는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비록 문화도시로서의 면모에 주목한다고 해도 이 도시를 작은 지면에 만족스러울 만큼 소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파리 오페라극장 뒤쪽에 있는 크지 않은 상영관에서 대형스크린의 멀티미디어 쇼를 통해 파리의 이모저모를 비쳐볼 기회가 있었는데, 파리를 “프랑스라고 하는 시골에서 태어난 절세의 미인”이라고 한 빅토르 위고를 등장시켜 파리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방식이다. 1시간 반 정도의 길이로 편집된 이 자료 외에 파리시의 미니어처와 인터넷을 통해 파리와 관련된 5개의 비디오를 검색할 수도 있도록 만들어졌다.
재개발형 도시 유럽 문화사를 통해서도 유례없는 지위를 확립하고 있는 두 개의 도시, 즉 로마와 파리는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된다. 로마는 긴 역사를 과시하는 반면, 도시로서의 파리의 역사는 로마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일천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파리의 도시개발의 기본은 역사적 유물의 보존이 아니라, 현대성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 파리 시내에는 대체로 폐허라고 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 시내의 제반 시설은 현재에도 전부 사용되고 있는 바, 구시가와 신시가가 병존하면서 균형을 잘 갖출 수 있도록 개발이 이루어진다. 새로운 거리 만들기도 서쪽의 개발(예컨대 데팡스)과 동시에 동쪽의 개발(예컨대 베르시)이 균형을 이룬다. 이에는 정부의 강한 주도 아래 강력한 재정투자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한다. 아울러 단순히 동결형의 도시개발과는 대조적으로 현재에도 현대인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할만한 흡입력 있는 시설을 계속해서 시내에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리는 동결형이 아니다. 물론 동결되어 있는 부분도 없지 않으나, 해동이 잘 이루어지면서 도시개발이 계속된다.
인구규모로 보면 파리의 경우 50㎞권내에 1,500만 명이 모여 사는데, 파리 23구의 인구밀도는 세계 제1위를 차지한다(250만 명/100㎢). 가위 포화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대도시로서 극한 상태에 달했으면서도, 지하철역이 파리 시내에 320개나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의 하부구조가 잘 정비되어 있어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아니, 견딜만한 정도가 아니라,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고 있어도 오히려 파리는 프랑스혁명에 의해 근대정신 발상지로서 명성을 날릴 뿐 아니라, 예술·문화의 도시라는 정평이 확립되어 있다. 나아가 오늘날에는 패션의 발신원이기도 하면서, ‘무엇을 만들어도 잘 나간다’는 말이 통한다. 이는 식문화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고급 레스토랑뿐이 아니라, 서민도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말하자면,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가위 수도라고 불릴 만하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세계의 연인’이라면서 계속 찾고, 파리시민은 ‘파리는 파리다’라는 자부심을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으리라.
파리의 역사

파리는 추정컨대 골족에 의해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하는데, 그들은 세느 강 왼쪽 기슭에 작은 정착지를 마련했다. 줄리어스 시저가 이곳에 온 것은 기원전 53년인데, 그때에는 루테시아(Lutetia)라고 불리었다. 이때만 해도 이 지역은 세느 강에서 가장 큰 섬에 정착한 파리지족의 어부들이 몰려 사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당분간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서면서 이 시테 섬은 종교적으로는 사원이, 정치적으로는 궁전이 세워졌다. 이 최초의 정착지는 계속되는 이민족의 침공으로 이리저리 옮겨지면서 확장되어 메로빙가(家)와 카롤링가(家)를 거쳐 카페왕조(987~1328)에 이르는 동안 수도가 되고, 시테 섬의 루테시아는 파리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전성시대를 기록한 것은 1180~1223년으로서, 이때 루브르의 건축이 시작되었고, 대학이 창건되었으며, 노트르담 성당 건축이 이어졌다.
17세기 초 파리 인구는 3만 명을 웃돌았고, 새로운 부르봉 왕조 치하에 인구는 날로 늘어나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에는 이미 50만 명을 넘어섰다. 그는 베르사이유로 정부를 옮겼으나, 루브르의 개축 등 파리를 장려하게 만드는 작업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이어 루이 15세는 콩코드 광장, 사관학교, 조폐국, 재판소 등을 정비하고, 루이 16세는 새로 놓는 도로의 폭을 9.75m로 결정하는 한편, 세느 강을 오늘의 모습대로 정비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1789년에 프랑스혁명으로 근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이후 이어진 공포정치로 인해 많은 생명들이 사라지고 예술작품들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으나, 1804년에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이 이룩한 제국의 광채와 빛나는 궁정은 그 세월들을 잊게 만들었다. 그는 파리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다리, 강안, 시장, 도살장, 에투알 개선문, 기간도로, 교회, 수도망의 정비를 단행했다. 샤를르 10세와 루이-필립 부르봉-오를레앙가가 실각하자(1848), 제2공화정이 탄생했다가 다시금 나폴레옹 3세가 왕좌에 오르는 등 상황이 기복을 이루었다. 그는 파리를 다시 설계하는 과제를 오스망 남작에게 위임했다. 오페라극장이 건립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비판사상가는 오스만의 도시계획이 프롤레타리아트를 교외로 내쫓고 계급투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사업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파리가 이 도시구획으로 인해 그 고유한 모습을 잃게 되었은즉, 바리케이트를 영구히 치지 못하도록 대로를 넓힌 이 ‘전략적 미화 작업’은 다른 한편 병영과 노동자 구역 사이에 지름길을 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71년의 파리 코뮌 (3월 18일 ~ 5월 28일)이 다시 한번 파리를 흔들어 놓았다. 결국 파리 코뮌은 실패로 돌아갔고, 벤야민은 이에 도시가 부르주아 판타스마고리아(환각) 속성도 지니고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확인할 수밖에 없게 된다. 20세기 들어서서 파리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동안 1940년부터 4년간 독일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PARIS의 재개발프로젝트사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파리는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재개발을 계속했던 바, 그 대표적인 사례들을 예시해보도록 한다.
루브르 박물관 재개발
이 구상은 미테랑 대통령에 의한 그랑 프로젝트로 실현되었다. 그 일환으로 미술관 안에 있던 재경부를 이전시켜, 3만 5천㎡의 작품전시 및 수납공간이 새로 생겨났다. 제1기 공사 완성의 핵심은 루브르궁의 중정(中庭)에 생겨난 유리 피라미드가 상징한다. 2001년까지 재개발작업이 이어지긴 했어도, 1993년 11월에 공사 전체가 완성되면서 궁전으로부터 미술관으로의 변형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 루브르가 일반에게 공개된 지 2백년만의 일이다. 중국계 미국건축가(Ieoh Ming Pe)가 설계한 이 유리 피라미드는 사실상 건축적으로는 그리 놀랄만한 대상이 되지 못하고, 그 밑에 있는 것도 단순한 지하로이다. 그러면서도 고색이 창연한 건물들 사이에 돌출된 가장 오래되고 또한 첨단적인 이 피라미드가 주는 신선감은 실로 놀랄 만하다.

퐁피두 센터
‘조르주 퐁피두 국립예술문화센터’는 1969년 퐁피두 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구상되어 1977년에 완성되었다. 에펠탑 건립에 사용된 7천 톤보다 두 배가 넘는 1만 5천 톤의 철근이 사용된 지상 6층, 지하 2층의 이 건물의 내부에서는 미술, 음악, 영상, 디자인, 현대예술의 여러 분야의 자료가 수집공개된다. 그 디자인의 특징은 배관류를 건물 외부로 드러낸 것인데, 오늘날까지 건축상 유례가 없다. 각 배관은 기능에 따라 채색되어 있는 바, 청색은 온도조정 플란트, 황색은 전기설치, 적색은 공기순환, 녹색은 수도 같은 식이다.

포럼 드 알 1973년, 중앙시장의 이전과 함께 그것이 차지했던 26.7ha의 대지가 재개발되었다. 지상으로부터 지하 5층까지 파내려가면서도 지하 3층까지는 자연광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한 설계가 화제가 된다. 4개 층은 수많은 부티크 외에 영화에 관련된 시설이 들어섰는데, 전체적인 모양은 역 피라미드 형이라고 할 수 있다. 1979년 9월에 개장된 이곳 시설 중 하나인 쿠스트 수족관은 쿠스트의 철학에 의해 생물은 일체 전시하지 않고 영상과 로봇에 의한 수족관으로 꾸며졌다. 그의 철학에 따르자면, 생물이란 그 환경 속에서만 보임직한 바, 환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생물을 본다는 것은 참아내기 어려운 일이다.
데팡스
1958년에 데팡스 지역 재개발공사가 재개발계획을 작성, 용지의 취득, 기반정비를 진행시켰는데, 이에는 민간기업의 진출도 포함되어 있었다. 총면적 700ha 위에 세워진 6천의 진출기업에서 11만의 사람들이 일하는데, 상주인구는 3만 명 정도이다.
18세기에 루이 15세는 르 노트르가 설계된 ‘왕도’(王道)를 루브르궁과 베르사이유를 연장ㆍ연결시키고자 했는데, 실제로 이는 어느 정도 성취된 바 있다. 그 끝자락에 있는 로타리에 나폴레옹의 조각상이 배치되었다가(1870년), 그해 겨울부터 다음 해에 걸친 프러시아에 의한 점령에 대한 저항을 기념하여 그것이 1883년에 군상 ‘ 파리의 방위 ’(라 데팡스)로 바뀌었던 역사와 연관하여 이 지역이 데팡스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국제회의장, 쇼핑센터, 오피스 등이 이제까지의 파리와는 다른 감각으로 정비되어 있어 이채를 띤다.
라 빌레트
이 개발계획은 1979년 12월에 시작되었다. 대개의 프랑스 재개발계획이 초에는 공원정비계획이었다가, 1982년에는 55ha의 대규모 개발이 되었다. 우르크 운하의 북쪽, 빌레트 공원 안에 있는 입방체의 건물로서, 과학ㆍ기술을 보급ㆍ소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과학ㆍ산업도시(Geode)는 면적 10만㎡의 유럽 최대의 시설이다. 도살장 건물을 개조하여 세운 건물의 메인 파빌리온은 공모양의 지붕을 갖춘 과학산업박물관이다. 1980년에 개관된 이래 이는 과학박물관의 새로운 개념의 단서를 마련했다 할 수 있겠는데, 과학ㆍ산업도시가 제공하는 활동을 통해 방문객들은 지식과 발견의 기쁨의 세계로 옮겨간다. 엑스프롤러 박물관의 상설ㆍ특별전시와 플라네타리움(천문관측시설), 3세부터 12세를 대상으로 한 아동박물관(시테 드 장팡), 컴퓨터 네트워크, 정보통신기술의 입문자와 상급자를 위한 공간인 사이버베스, 서적ㆍ잡지ㆍ교육소프트ㆍCD 등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미디어테크, 시테 드 메테이에(직업도시), 시테 드 상테(건강도시), 제오데라는 경이적인 영상, 시낙쿠스이라는 시뮬레이션 캐빈, 잠수함 아르고노트호 등 다양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오르세 미술관
오를레앙 철도회사는 파리 중심부에 발착역을 만든다는 계획을 가지고, 1871년의 파리 콤뮌으로 파괴된 오르세 궁전의 부지를 구입하여, 1900년 7월에 역과 호텔을 완성했다. 1939년에 이르러 역으로서는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되어 버려져 있다가, 퐁피두 대통령 주재 하에 19세기 후반 전문 미술관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하고, 1986년에 개축을 완성하도록 했다. 관내에는 1848년부터 큐비즘이 시작된 1914년까지의 회화, 조각, 건축, 도시계획이 수장ㆍ전시되고 있다. 루브르와 퐁피두센터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이 미술관의 면적은 4만 5천㎡에 달하고, 수장품은 4천 점을 헤아린다.
이 밖에도 국립도서관의 보여주는 네 권의 책을 세워놓은 듯한 경관과 그 중앙에 있는 자연녹지를 그대로 떠온 정원이라든지, 몽마르트르의 그 유명한 물랭루즈를 비롯한 밤의 환락가라든지, 파리는 아직도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특히 샤를르 드 골 대통령 이래로 역대 대통령이 이룩한 업적들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있거니와, 파리의 많은 현대건축작품들을 자극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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