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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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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2,069회 작성일 12-02-2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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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이 독일의 수도가 된 것은 상대적으로 그리 오래지 않다. 1709년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이를 수도로 삼았던 것이 단초로서, 1871년에 독일제국이 성립되면서 그대로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베를린에는 역사적으로 두 개의 요소가 작용해왔다고 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군사적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다민족적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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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을 포함하고 있는 브란덴부르크 지방이 독일화해온 것은 13세기 때부터이다. 슬라브계의 벤드족의 집락지였던 곳에 알브레히트 곰(Bear) 백작이 군사거점을 설치하여 이를 식민지화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를린은 처음부터 군사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베를린이라는 이름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도시법이 시행된 1244년이라는데, 식민전선이 슈프레강에서 좀더 동쪽으로 옮겨지면서 베를린은 군사도시만이 아니라 상업도시로서도 발전을 거듭했다. 일찍이 한자도시동맹에도 가입했으나, 1410년에 뉴른베르크의 성주 호엔촐레른가(家)가 브란덴부르크 백작에 봉해지면서 1442년에는 도시자치권이 박탈되었다. 이는 한자동맹으로부터의 탈퇴로 연결된다. 다시 1482년에 호엔촐레른가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베를린은 궁정도시이자 관청도시로서 호엔촐레른가와 운명을 함께 했다.
 종교분쟁시대에 선제후는 개신교로 개종하여 가톨릭의 억압을 받던 프랑스의 위그노, 서부독일의 개신교도 및 유대인 등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정책은 곧 우수인력의 도입을 뜻하면서 베를린은 동부독일의 지도적인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프로이센왕으로 승격되자, 1709년에 베를린은 앞서 말한 대로 그 수도가 되어 발전을 거듭한다. 1810년에는 훔볼트 남작 등의 노력으로 드디어 대학이 창설되면서 베를린은 학술 쪾 예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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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군사도시적인 요소는 여전히 잔존하여 베를린은 7년전쟁 동안인 1757년에는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1760년에는 러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나폴레옹전쟁 때인 1806년∼1810년에는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러나 해방전쟁으로 회복된 이후 1848년에 베를린과 포츠담 사이에 철도가 개설되는 것을 효시로 베를린은 단기간 내에 철도망의 중심이 되면서 인구가 급속히 늘어 1861년에 이르러서는 약55만 명이 되었다. 반 세기만에 약 3배가 늘어난 것이다.
 인구증가에 따라 근대적인 도시개조가 불가피해져서 17세기 말에 구축된 성벽이 1861년에 철거되고, 교외지역이 시역에 흡수되었다. 1920년에는 샤를로텐부르크, 노이쾰른, 슈판다우, 그리고 빌머스도르프 등 주변도시들과의 대합동이 이루어져 오늘날 인구 338만 7404명(2004년 8월 현재)을 헤아리는 대(大)베를린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폭격을 불러들여 시가지는 철저히 파괴되고, 패전과 더불어 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의 공동점령지구가 되어 서반부와 중북부를 프랑스가, 중앙부를 영국이, 남부를 미국이, 그리고 동반부를 소련이 분할점거하게 되었다. 게다가 1948년에 이르러 소련과 서방3국의 행정상의 의견차이가 극심해져 드디어 그해 3월, 소련이 공동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하고, 6월에 서베를린 봉쇄가 시작되자, 서방3국은 대공수 작전으로 맞섰다. 1949년 5월에 봉쇄는 해제되었으나, 베를린은 동서로 분할되었다가 1961년 8월에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구축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낳게 된다. 1989년 1월에 동유럽에 불어 닥친 개방 쪾 개혁바람에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1990년 12월 3일 서독은 동독을 흡수통일하기에 이르면서 1991년 7월 베를린은 통일독일의 수도로 다시 태어났다.
 
 베를린의 다민족적 요소
 서두에서 베를린의 다민족적 요소를 그 특징 중 하나로 손꼽았는데, 그 기초는 17세기 후반에 이미 이루어졌다.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의 부인이 네덜란드 출신이었던 관계로, 그곳의 신교도가 많이 베를린으로 건너왔고, 아울러 종교분쟁에 휘말렸던 서구 각지의 신교도의 이주도 적지 않았다. 특히 루이 14세의 구교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진 프랑스의 위그노 파교도들이 적극적으로 이주해왔던 바, 17세기의 베를린의 추정인구 2만 5천 명 중, 위그노 교도가 7∼8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치스 독일의 등장도 다민족주의에 대한 저항과 무관하지 않거니와, 베를린 장벽에 접해 있던 서베를린 동부의 크로이츠베르크라는 지역은 10만 명 이상이나 되는 터키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전쟁 피해로 노후화된 이 지역에 살던 독일인들이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진 1960년대를 즈음하여 외부로 빠져 나가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는 동독을 비롯한 동구 여러 나라로부터의 노동력 유입의 급감과 더불어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이 지역은 도시 전체의 중심지가 되고, 재개발 대상지로서 우선순위가 높아졌다. 따라서 이곳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터키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90년 5월에 신외국인법이 성립되었는데, 그 배후에는 외국인 노동자의 귀국을 촉진하기 위해 외국인의 체재 허가조건을 까다롭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없지 않다. 예컨대 거주허가의 필요조건 중에 거주면적이 충분한 집의 확보가 들어있는데, 종래는 3인 가족 30㎡이던 거주면적 규정이 75㎡ 전후로 늘어났는데, 이 규정의 위반은 국외퇴거의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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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베를린이 특히 유대민족을 향해 저질렀던 죄과를 참회하는 여러 조치들을 취하고 있는 것은 다민족도시로서의 전망을 아주 어둡게만 하지 않는다. 파괴되었던 유대교회당의 복구는 물론 새로운 회당의 건립과 유대인 학살을 참회하는 묘지와 박물관 건립 등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그와 같은 노력들을 보여준다. 현재로서는 지나치게 도심중심의 복구 내지 재개발에 치중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모아 재활용하는 방안을 실용화해가는 노력에서 보이는 친환경적 태도는 다른 문화요소들에 대해서도 관용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도 해준다. 지금도 포화상태인 것처럼 보이는 이 도시의 미래 대응방안에 자못 관심이 쏠리는 것은 그것들이 수도 서울의 근미래와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숨가쁘게 도시의 외관과 관계된 부분들을 살피느라 정작 문화의 내용을 이루는 내부를 들여다볼 기회를 놓친 것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브레히트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베를리너 앙상블을 비롯한 수많은 연극무대, 베를린 필하모닉, 베를린영화제, 바우하우스미술관 등의 현대미술 전시공간은 히틀러로 인해 위축되고만 문화도시 베를린을 두고두고 기억에 남게 할 필수요소들이다. 물론 분단 시대에도 서베를린은 서방문화의 쇼윈도로서 기능해왔지만, 생활에 뿌리내린 문화를 위한 예술도시로서의 베를린은 아직 미래를 향해 행진 중에 있을 뿐이다.
 
 글|김문환 (서울대 교수, 미학)
 
 
 김문환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미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는 <문화경제론><미학의 중심><예술과 윤리의식>외 다수의 역서와 편저가 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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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의 문화명소
 샤를로텐부르크성 베를린의 약사에서 보듯이 수도로서의 베를린의 풍모는 프리드리히 1세 시대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부인이었던 샤를로텐의 여름 궁전이 지금도 남아 있어 당시의 영화를 뽐내고 있는데, 1695년에 건축이 시작되었지만, 브란덴부르크 제후국이 프로이센 왕국으로 확대되면서 규모가 확대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궁전 뒤쪽에 조성된 프랑스식 정원은 후에 영국식으로 바뀌는데, 궁전 내부는 현재 선사, 초기역사박물관, 궁전박물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훔볼트 대학 1810년에 빌헬름 폰 훔볼트에 의해 창립된 이 대학은 ‘모든 근대대학들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법학, 의학, 철학, 그리고 신학을 배우려는 256명의 학생들과 헤겔을 비롯한 52명의 교수들로 시작된 이 대학은 그동안 2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정도로 명성이 드높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처음으로 기증한 대학건물은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세자의 궁전으로서, 1748년∼1766년에 세워졌다. 베를린 대학으로 불리다가 1928년부터 1945년까지는 빌헬름 프리드리히 대학으로, 1949년부터 지금의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브란덴부르크문 1789년 파르테논 신전의 프로필리아를 본떠 세워진 문으로서, 1973년에 문 위에 이륜사두마차가 덧붙여졌다. 도시의 영광을 상징하는 승리의 표지였으나, 동쪾서독 분단시기에는 분할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전승기념탑 1864년부터 1873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탑은 프로이센의 덴마크(1865년), 오스트리아(1866), 프랑스(1870/71)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로 시작되었으나, 완공된 1873년 9월 2일에는 화해의 상징물이 되었다. 잘 다듬어진 4각의 붉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원주가 에워싸듯이 세워졌는데, 전체 높이 69m 중 맨 꼭대기 12m는 동으로 만들어진 승리의 여신상이 차지한다. 원주 안에는 285개의 나선형 계단이 있어 53m 높이의 플랫폼에 오르면, 동물원 지역을 비롯한 시내가 잘 내려다보인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 황제 빌헬름 1세를 기념하기 위해 손자인 빌헬름 2세가 1891∼1895년에 신로마네스크양식으로 건축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되었다. 전쟁의 파괴성을 후대에 경고하기 위해 파괴된 상태 그대로 보존된 탑 옆에 새로 다각형의 교회를 나란히 세워놓았다. 새 교회당 내부의 청색조 스테인드글라스가 매우 인상적이다. 이 기념교회가 있는 광장에서 서남서쪽으로 연장되는 3.5㎞의 방사도로를 가리키는 쿠어퓌르스텐담은 고급상점, 극장, 레스토랑이 즐비한 번화가이다.
 
 페르가몬 미술관 페르가몬은 지금의 터키에 자리했던 헬레니즘 왕국의 수도이름인데, 1930년에 건립된 이 미술관에는 제국주의시대였던 1878년에 터키에 파견된 유물발굴단(칼 후만 주도)이 터키에서 가져온 페르가몬 왕국의 역사적 유물들이 전시쪾보관되어 있어 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유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가 BC 180년∼159년에 에우메네스 2세가 건립한 승전기념비 겸 신전인 제우스제단인 바, 사각형의 기단 위에 이오니아식 원주기둥이 세워져 있고, 중앙에는 넓은 계단이 있어 헬레니즘 예술의 위용을 자랑한다. 띠 모양의 부조(프리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푸스신들과 거인족과의 싸움을 소재로 하고 있다.
 
 제국의회 의사당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이 건축물은 1894년에 독일제국을 이룩한 비스마르크의 정부청사로 세워졌다.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 정권을 잡은 히틀러가 1933년에 이곳에서 수상으로 취임하여, 1939년에 대폴란드전을 공포하기도 했다. 한때 1848년 이후의 독일역사를 알려주는 전시관으로도 활용된 바 있다. 이 의사당 정상을 베를린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로 활용하면서 1933년에 화재로 불타버렸던 돔을 현대식으로 되살려낸 것은 현대독일을 상징하는 좋은 아이디어이다.
 
 연방수상 집무처 국회의사당과 붙어있는 공화국 광장과 면해있는 연방 수상집무처(1997∼2001)는 국회 각종분과위원회가 사용하는 파울 뢰베 건물(1997∼2001)을 사이에 두고 국회도서관과 건축양식상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녹색을 배경으로 한 백색 벽면, 그리고 회색조의 지붕과 유리창이 신선감을 더해준다.
 
 베를린 장벽 분단시대에 동서 베를린을 남북으로 나누었던 길이 45㎞의 경계선이 통독 이후 현재로는 슈라이쉐스 로어 부근에만 잔재를 남기고 있다. 이와 함께 동서베를린 관문이었던 ‘체크포인트 찰리’가 일대의 기념품 가게들과 함께 일종의 박물관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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