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추상회화의 시조 파울 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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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2,112회 작성일 12-02-2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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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부터 오는 7월 2일까지 소마미술관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독일의 대표적인 화가,
파울 클레의 작품전 ‘눈으로 마음으로’가 열리고 있다.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온 어느 날 파울 클레의
기묘한 세상 속으로 여행을 시작해 본다.
세계 미술사를 빛내고 있는 천재 화가들의 면면을 보면, 미술 자체만을 위해 열정을 불살랐던 예술가들이 있는 반면, 세상 모든 것에 세심한 주위를 기울이고 이를 작품에 반영한 화가들이 있다. 마치 실험실의 과학자처럼 다양한 화법과 기법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학구적인 예술가 말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화가이며 추상회화의 시조로 일컫는 파울 클레가 바로 이런 부류가 아닐까 싶다.
파울 클레가 화가로의 앞날을 준비하던 시대는 자연의 색채와 빛에서 얻은 인상들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 소위 인상주의 화풍이 즐비하고 있었으나, 그는 결코 이런 예술적 분위기에 녹아들지 않았다. 다만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의 모습들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고도로 숙련된 드로잉 기법을 활용하고, 다양한 소재개발 및 색채실험을 통해 자신의 생각, 유머, 풍자, 환상, 심지어 괴기함까지 화폭에 담아 놓은 그의 화풍은 표현주의에 더 가까웠다.


초기작품 (1899~1910)
클레의 나이, 20살에서 31살까지를 작품인생의 초기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클레는 뮌헨아카데미와 프란츠 폰 슈트크의 아틀리에에서, 이탈리아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고향 베른으로 돌아와서 편안하고 아늑한 가운데, 작품에 대한 연구, 분석, 평가작업을 거쳐 엄격하고 냉정한 작품활동에 파묻힌다. 특히 이 시기에 인물 드로잉에 심취하고 있었는데, 이 상상의 인물들은 대부분 캐리커처의 성격을 띠었다. 여기에 190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목격한 로댕의 누드 드로잉에 깊은 영향을 받은 후, 인체 드로잉에 착수하면서 자유로운 선의 기법을 시도한다. 1905년 여름에는 유리판에 드로잉을 새겨 넣는 기법을 실험하고, 물질표면에 나타나는 특이한 반응을 감지했다. 마침내 유리표면에 드로잉 기법을 개발했으나,1908년부터는 드로잉 기법을 떨쳐버리고 검은색 물감을 활용한 음영 및 색채효과를 탐구하기에 이른다.

청기사파와 튀니지 여행(1911~1914)
클레는 19살 이후, 40살까지 매일처럼 일기를 썼다. 이런 가운데 당대 최고의 예술인들과의 교류는 물론 다방면에 걸친 독서에 심취한다. 이런 경험들은 후에 미술 이론가로, 또 미술 이론저자로서의 명성을 얻는데도 많은 영향을 준다. 1911년 32살의 클레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클레는 그간의 작품들을 총망라하는 목록집을 제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목록집에는 클레의 독특한 드로잉들, 특히 어린 시절 그렸던 40여 점의 작품들 중에서 18점을 포함시켰는데, 클레는 평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갈망했다. 또 이 시기에 클레는 화가로서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당대 새로운 미술사적 조류를 이끌고 있던, 마케, 칸딘스키, 들로네, 아르프, 마르크, 발덴과 같은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들, 소위 청기사파들과의 만남이었다. 또한 아프리카 튀니지를 방문, 새로운 풍물에서 색채적 경험을 얻는다. 검정 수채화에서 색채감이 살아있는 밝은 빛의 화풍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어둠의 시기와 조우해야만 했다.


세계대전 전후 클레의 성공 (1914~1920)
클레는 다른 예술가들과는 다르게 전쟁에 직접 가담하는 것을 피했다. 의도적으로 세상과 등지고 전쟁의 잔학함과 부도덕함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전쟁을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 1916년 징집을 당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예비공군부대에 전임되어 직접 전쟁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덕분에 근무하고 남은 시간에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고, 이 작품들은 최고의 평가와 함께 언론에 주목받기 시작, 대중적인 사랑을 받게 된다. 이 시기에 괄목할 만한 특징은 구조적인 이미지가 나타나면서, 명암과 색채의 결합으로 별, 나무, 화살표, 문자와 같은 상징적 기호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무엇보다도 1920년 10월, 40살의 클레는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위촉받음으로써 예술인생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맞는다.
바우하우스,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생활 (1921~1933)
바우하우스의 교수생활은 클레의 작품활동에 많은 변화를 준다. 오전 오후로 분리된 강의는 이론과 실기를 병행, 자신의 경험을 살려, 체계화된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주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 클레는 유화로 된 드로잉에 수채물감을 덧씌운 듯한 ‘데칼코마니 기법’을 창시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23년에 발표한 ‘줄타기 곡예사’가 있으며, 클레는 이 기법을 다양한 모습으로 꾸준히 발전시켜 나갔다. 마침내 클레는 해외에서도 독일을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되고, 예술가로서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내부의 정치적 논쟁에 직면하게 되면서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겼으나, 1933년 히틀러의 나치 정부의 등장으로 클레는 퇴폐주의 화가로 치부된다. 결국 더 이상 학교에 남을 수가 없게 되고, 부인의 권유로 스위스로 이주하여 창작에만 전념한다.

나치 통치 하의 클레와 말기작품 (1934~1940)
나치의 압박을 피해, 고향 베른에 정착하게 된 클레는 갑작스럽게 세상에서 두절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작품 활동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정을 되찾게 되고, 다시 왕성한 작품 활동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반면 계속되는 나치의 탄압과 세계 경제의 침체로 해외에서의 클레의 전시회들은 빛을 잃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클레는 진행성 피부경색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넘나들게 된다. 클레는 불굴의 정신을 무기로 병마의 고통과 싸웠는데,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1939년에는 한 해에 무려 1253점이라는 놀라운 창작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마지막 시기, 작품 성향은 주로 죽음과 사후세계를 표현하는 듯한 어둠이 강조되고 있다. 나치는 클레의 그림들을 정신병자의 그림으로 폄하하는 등, 심하게 모욕을 가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칸딘스키, 피카소 등의 방문을 받은 클레는, 새로운 영감을 얻어 작품에 반영하는 등, 줄기차게 창작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40년 6월, 급작스러운 병세의 악화로 향년 61세를 일기로 눈을 감고 만다.
파울 클레의 작품전 ‘눈으로 마음으로’가 열리고 있다.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온 어느 날 파울 클레의
기묘한 세상 속으로 여행을 시작해 본다.
세계 미술사를 빛내고 있는 천재 화가들의 면면을 보면, 미술 자체만을 위해 열정을 불살랐던 예술가들이 있는 반면, 세상 모든 것에 세심한 주위를 기울이고 이를 작품에 반영한 화가들이 있다. 마치 실험실의 과학자처럼 다양한 화법과 기법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학구적인 예술가 말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화가이며 추상회화의 시조로 일컫는 파울 클레가 바로 이런 부류가 아닐까 싶다.
파울 클레가 화가로의 앞날을 준비하던 시대는 자연의 색채와 빛에서 얻은 인상들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 소위 인상주의 화풍이 즐비하고 있었으나, 그는 결코 이런 예술적 분위기에 녹아들지 않았다. 다만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의 모습들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고도로 숙련된 드로잉 기법을 활용하고, 다양한 소재개발 및 색채실험을 통해 자신의 생각, 유머, 풍자, 환상, 심지어 괴기함까지 화폭에 담아 놓은 그의 화풍은 표현주의에 더 가까웠다.


초기작품 (1899~1910)
클레의 나이, 20살에서 31살까지를 작품인생의 초기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클레는 뮌헨아카데미와 프란츠 폰 슈트크의 아틀리에에서, 이탈리아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고향 베른으로 돌아와서 편안하고 아늑한 가운데, 작품에 대한 연구, 분석, 평가작업을 거쳐 엄격하고 냉정한 작품활동에 파묻힌다. 특히 이 시기에 인물 드로잉에 심취하고 있었는데, 이 상상의 인물들은 대부분 캐리커처의 성격을 띠었다. 여기에 190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목격한 로댕의 누드 드로잉에 깊은 영향을 받은 후, 인체 드로잉에 착수하면서 자유로운 선의 기법을 시도한다. 1905년 여름에는 유리판에 드로잉을 새겨 넣는 기법을 실험하고, 물질표면에 나타나는 특이한 반응을 감지했다. 마침내 유리표면에 드로잉 기법을 개발했으나,1908년부터는 드로잉 기법을 떨쳐버리고 검은색 물감을 활용한 음영 및 색채효과를 탐구하기에 이른다.

청기사파와 튀니지 여행(1911~1914)
클레는 19살 이후, 40살까지 매일처럼 일기를 썼다. 이런 가운데 당대 최고의 예술인들과의 교류는 물론 다방면에 걸친 독서에 심취한다. 이런 경험들은 후에 미술 이론가로, 또 미술 이론저자로서의 명성을 얻는데도 많은 영향을 준다. 1911년 32살의 클레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클레는 그간의 작품들을 총망라하는 목록집을 제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목록집에는 클레의 독특한 드로잉들, 특히 어린 시절 그렸던 40여 점의 작품들 중에서 18점을 포함시켰는데, 클레는 평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갈망했다. 또 이 시기에 클레는 화가로서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당대 새로운 미술사적 조류를 이끌고 있던, 마케, 칸딘스키, 들로네, 아르프, 마르크, 발덴과 같은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들, 소위 청기사파들과의 만남이었다. 또한 아프리카 튀니지를 방문, 새로운 풍물에서 색채적 경험을 얻는다. 검정 수채화에서 색채감이 살아있는 밝은 빛의 화풍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어둠의 시기와 조우해야만 했다.


세계대전 전후 클레의 성공 (1914~1920)
클레는 다른 예술가들과는 다르게 전쟁에 직접 가담하는 것을 피했다. 의도적으로 세상과 등지고 전쟁의 잔학함과 부도덕함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전쟁을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 1916년 징집을 당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예비공군부대에 전임되어 직접 전쟁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덕분에 근무하고 남은 시간에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고, 이 작품들은 최고의 평가와 함께 언론에 주목받기 시작, 대중적인 사랑을 받게 된다. 이 시기에 괄목할 만한 특징은 구조적인 이미지가 나타나면서, 명암과 색채의 결합으로 별, 나무, 화살표, 문자와 같은 상징적 기호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무엇보다도 1920년 10월, 40살의 클레는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위촉받음으로써 예술인생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맞는다.
바우하우스,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생활 (1921~1933)
바우하우스의 교수생활은 클레의 작품활동에 많은 변화를 준다. 오전 오후로 분리된 강의는 이론과 실기를 병행, 자신의 경험을 살려, 체계화된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주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 클레는 유화로 된 드로잉에 수채물감을 덧씌운 듯한 ‘데칼코마니 기법’을 창시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23년에 발표한 ‘줄타기 곡예사’가 있으며, 클레는 이 기법을 다양한 모습으로 꾸준히 발전시켜 나갔다. 마침내 클레는 해외에서도 독일을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되고, 예술가로서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내부의 정치적 논쟁에 직면하게 되면서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겼으나, 1933년 히틀러의 나치 정부의 등장으로 클레는 퇴폐주의 화가로 치부된다. 결국 더 이상 학교에 남을 수가 없게 되고, 부인의 권유로 스위스로 이주하여 창작에만 전념한다.

나치 통치 하의 클레와 말기작품 (1934~1940)
나치의 압박을 피해, 고향 베른에 정착하게 된 클레는 갑작스럽게 세상에서 두절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작품 활동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정을 되찾게 되고, 다시 왕성한 작품 활동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반면 계속되는 나치의 탄압과 세계 경제의 침체로 해외에서의 클레의 전시회들은 빛을 잃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클레는 진행성 피부경색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넘나들게 된다. 클레는 불굴의 정신을 무기로 병마의 고통과 싸웠는데,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1939년에는 한 해에 무려 1253점이라는 놀라운 창작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마지막 시기, 작품 성향은 주로 죽음과 사후세계를 표현하는 듯한 어둠이 강조되고 있다. 나치는 클레의 그림들을 정신병자의 그림으로 폄하하는 등, 심하게 모욕을 가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칸딘스키, 피카소 등의 방문을 받은 클레는, 새로운 영감을 얻어 작품에 반영하는 등, 줄기차게 창작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40년 6월, 급작스러운 병세의 악화로 향년 61세를 일기로 눈을 감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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