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세계의 문화수도 카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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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1,496회 작성일 12-02-22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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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시대로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카이로는 지금도 성장과 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내에는 고층빌딩이 계속해서 들어서고 시역도 확대되고 있다. 인구도 1,200만 명 정도로 아프리카 대륙 최대의 도시로 손꼽힌다. 그러면서도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 바, 농촌으로부터의 유입이 그 주된 원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와 같 은 인구유입이 도시 안에 농촌마을을 재현하기도 하지만, 카이로의 경 우에는 긴 역사를 통해 형성되어온 국제도시로서의 전통이 강하게 기 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보인다. 지중해, 아프리카, 서아시아가 교 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카이로는 고대로부터 국제도시로 형성되어왔고, 현재로도 여러 국적의 주민이 늘어나고 있다.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이집트의 외화수입의 최대 원천은 수에즈 운하 로부터 벌어들이는 수입(약 13억 달러)이다. 두 번째는 관광수입과 석 유수출로서, 양자 모두 각각 약 9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집트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은 연간 약 40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그 대부분이 카이로를 거친다. 기자의 피라미드를 위시한 고대, 중세의 유적, 이집트 박물관 등이 관광명소인데, 말하자면, 역사문화가 가장 중요한 관광자원인 셈이다. 사람들은 문화를 보고자 카이로에 몰려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카이로에 오래 체제하는 외 국인들 사이에서는 이 도시의 문화시설과 문화행정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없지 않다. 즉 카이로에서 문화라고 볼 만한 것은 전부 과거의 역사적인 유산뿐으로, 현대의 카이로는 문화의 향기를 풍기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 1988년에 문을 연 교육문화센터가 일국의 수도에 어울리는 유일한 문화시설이라고 손꼽힌다. 이 시설은 별명인 오페라하우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원조로 만들어진 탓인지 가부키가 이집트를 소재로 한 오페라 ‘아이다’와 함께 상연되기도 했지만, 낙성 후 1년 후에 는 소련의 발레, 미국의 뮤지컬 등도 무대에 올려졌다. 그러나 2년째부 터는 이집트 혼자 힘으로 프로그램을 짜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 부족 한 자금을 위해 문화 원조를 해온 나라들에 의뢰하여 공연내용을 채 우는 실정이라고 한다. 아직은 비싸다고 할 수 있는 입장료를 내고 오케 스트라 등을 들을 만한 취미를 가진 사람은 전체 인구의 3~5%에 해당 되는 상류계층에 불과하다. 그래도 아랍 여러 나라에서 오페라하우스 시설이 있는 곳은 카이로 하나뿐이었던 만큼, 국빈이 방문할 경우 대통 령이 손수 안내하는 국위 선양의 시설로서의 의의는 무시할 수 없다. 카이로는 아랍권의 학술중심지로서 이슬람교학에서 중심을 이룬다. 또한 아라비아어로 된 영화, 비디오가 가장 많이 제작되는 도시이다. 여 성이 공중의 면전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는 이슬람문화의 특징으로 인 해 현재 가정에서 비디오를 보는 것이 하나의 유행인데, 그 대부분이 카 이로에서 제작된다. 미래의 스타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카이로로 몰려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아라비아어 출판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인가 하면, 아라비아어를 매개로 한 문학과 대중예술의 유행이 발신 지이기도 하다.
카이로의 역사와 그 문화권
카이로는 현대 아랍세계의 문화도시일 뿐 아니라, 오랜 역사를 통해 그 위치를 확보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곧 카 이로가 아랍세계의 정치적 중심으로 기능해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 는다. 이슬람권에서 또 하나의 문화수도라고 할 수 있는 이스탄불이 오 스만제국의 정치수도로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카이로의 역사는 기자의 피라미드 등의 고대 이집트 유적을 근교에 두고 있으면서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로 이어지는 아랍 세계의 문화중심으로서의 역할은 대략 10세기로부터 시작된다.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에 진입했을 때, 카이로는 그 거점이었던 바, 969 년에 화이테마조(朝)가 이집트를 지배했을 때, 카이로의 전신이 되는 성벽도시가 세워졌다. 970년에 아즈할 모스크가 세워지고, 이어서 972 년에 그 부속건물인 마드라사가 세워졌다. 이슬람교학을 가르치던 이 마드라사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랜 최고학부인 아즈할 대학의 기초 가 된다. 그 후 아이유조(朝)가 이집트를 지배하다가 1250년에 마무르크조(朝)에 이른다. 마무르크조 시대에 홍해로부터 상부 이집트를 거 쳐 카이로에 이르는 루트가 동서교역의 주요경로가 되어 안정된 농업 생산과 함께 번영의 시대를 마련한다. 이즈음 술탄과 아미르가 규모가 큰 모스크와 마드라사를 건설하여 이슬람문화의 중심으로서의 기초 를 확고히 했다. 이로써 카이로는 바그다드와 나란히 이슬람문화의 센터가 된 것이다.
그러나 1258년에 몽골이 침입하여 바그다드를 함락시키자 카이로가 이슬람권의 문화수도로서의 역할을 전담하다시피 하게 되면서, 14세 기 초 카이로는 인구 50만의 대도시로 성장한다. 그러면서도 16세기에 도 카이로는 행정적으로는 오스만제국의 1주도(州都)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로는 문화적으로 탁월한 중심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했다. 카이로의 역사적 문화성을 떠받쳐온 것은 상업활동에 의한 부의 축적과 풍족한 농업생산력에 의한 인구의 집적효과라고 할 수 있 다. 앞서 언급한대로 카이로는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잇는 동서교역 과, 아프리카의 내륙부를 묶는 남북교역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옛 날부터 아랍권에서는 ‘카이로 상인’이라면 알아주었는데, 이는 이 도시 가 예로부터 상업 활동의 중심지로 인식되어왔음을 잘 이야기해준다. 이와 아울러 고밀도의 인구는 고대 이집트 이래 나일강 삼각주에 자리 잡은 이 도시 주변에 거대한 인구를 불러 모은 농업생산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에 아라비아어권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이 도시에서 시작 된 유행은 곧 다른 아랍 나라들로 퍼져가게 마련이었다.
이처럼 국경너머로까지 퍼져가는 카이로의 문화적 영향력은 이슬람교 와 정통 아라비아어를 매개로 한다. 터키어, 우르토어, 인도네시아어 등, 광대한 지역에 퍼져있는 이슬람권내 여러 나라에는 여러 언어가 있다. 이처럼 일상 생활언어는 제각각이지만, 이슬람권에서의 종교언어는 아 라비아어이다. 각지의 이슬람교학의 학교인 마드라사에서는 교육이 아 라비아어로 이루어진다. 꾸란(코란)은 아라비아어로 읽혀지지 않으면 안 되고, 기도도 아라비아어로 올려진다. 아라비아어에도 여러 방언이 있지만, 카이로에서 쓰이는 말이 꾸란의 언어에 가장 가까운 정통 아라 비아어이다. 꾸란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카이로의 아라비아어를 배 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손꼽힌다. 이런 까닭에 이슬람의 성지는 메카이 지만, 이슬람 신학연구는 아즈할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슬람교 문화를 말하면서 카이로가 전세계를 향한 발신기지 로서의 위치에 있다고 하는 말은 이슬람교의 전문적 관계자들 사이에 서나 통용될 뿐, 이 도시의 문화적 영향권을 좀더 제한할 경우, 카이로 는 서아프리카로부터 북아프리카에 걸친 아라비아권의 문화중심이라 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 이 지역의 23개국 가운데에는 이란, 아프가니스탄, 터키 등 비아라비아어권의 국가도 있어, 십수 개의 나라 만이 아라비아어권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남부 수단, 그리고 챠 드 국토의 북반부는 아라비아어가 통용되는 이슬람권이지만, 그 남반 부는 비이슬람권의 흑인아프리카이다. 지역적인 환경을 좀더 좁힌다면, 아랍어권 안에서도 모로코, 알제리아, 튀니지아 등 이른바 마그레브 3 국에서는 구종주국의 파리가 국경을 넘어선 문화수도라고 할 수도 있 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수도로서의 카이로의 직접적인 영향권은 동쪽 으로는 만안(灣岸) 여러 나라, 서쪽으로는 리비아, 남쪽으로는 수단, 챠 드의 북부까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유럽 전체보다 넓 은 이 지대에서는 카이로에서 발행된 서적이 유통되고, 민중들은 카이 로의 유행가를 입에 올리곤 한다.
미래를 위한 가능성 이집트의 1인당 국민소득이 만안 국가들 중에서도 낮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카이로에는 53개의 대학이 있고, 약 24만 여 의 대학생이 있다. 상층 학교 진학자가 많아 전 아랍권의 대졸자 3분의 2가 이집트 대학출신들이다. 경제사정이 좋지 못해 고용기회가 적어 외 국으로의 진출이 많은 것이 다른 비산유국과 마찬가지인데, 그 중에서 이집트의 특징은 육체 노동자만이 아니라 기술과 두뇌를 제공하고 있 다는 점이다. 외국에서 엔지니어나 관리직, 또는 교육직으로 종사하는 이집트사람들의 비율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처럼 아랍세계로 인재를 공급하는 카이로의 대학들 중에서 아즈할 대학과 카이로대학이 아랍권의 최고학부에 해당한다. 아즈할대학의 졸업생은 아즈할리라고 불리는데, 그들은 각국의 종교적 지도자, 이슬 람법의 재판관, 이슬람대학의 교수와 아라비아어교사로서 활약하고 있다. 아즈할대학이 종교라는 전통문화를 맥으로 하여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들을 육성하면서 세계적인 이슬람교학의 발신지로서 기능해왔 다면, 카이로대학은 서구적인 근대문화와 관계되는 역할을 감당하면 서 아랍세계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인재들을 길러오고 있다고 하겠다. 바로 이런 점에서 카이로가 아랍권에서 최대의 문화발신지라고 한 것 인데, 정통아라비아어와 거대한 인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 이집트의 근대사의 움직임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비중을 차지 한다. 아즈할대학에 의해 상징되고 있듯이, 카이로는 옛날부터 문화의 발상지였으나, 전통적 문화단계에 동결되지 않고 근대화노선에서도 담 당해온 역할이 매우 크다. 카이로 대학이 이를 대표한다. 같은 아랍세 계에서도 마그레브 여러 나라는 프랑스식민지로서, 파리를 바라보면서 근대화를 시험해왔다. 여기에서의 엘리트들은 프랑스어를 말하고 파리 유학에 의해 그 지위를 획득해왔고,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등의 서구음 악에 심취하는 엘리트와 아라비아어밖에는 알지 못한 채 카이로로부 터 발신되는 아랍 유행가를 입에 올리는 민중이 단절되어 있다. 식민지 화한 경험을 가진 것은 이집트도 마찬가지지만, 이집트는 다른 만안 여 러 나라들보다는 일찍이 근대화노선을 걷기 시작하는 동시에 아랍민 족주의를 내세운 기수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집트의 근대화노선은 전통과 단절하는 개혁의 방 향을 취하지 않게끔 되었던바, 아라비아어를 중핵으로 삼으면서 나름 대로 근대화를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집트 중화사상’ 이라는 관념마저 운위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카이로는 이슬람권의 베 이징이라는 것이다. 다만 베이징이 그 나름대로 세계제국의 수도였지만, 카이로는 아라비아어를 매체로 하여 전달하는 문화를 무기로 삼아 그 우월성을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하다. 일찍부터 근대화에 나서면서 여성의 지위도 향상되어온 이 도시에서는 베일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성이라든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을 만나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런 정도로 카이로는 아랍세계에서 변 화가능성을 가진 도시로서, 때로 급진적인 이슬람운동의 발신지가 되 기도 하지만, 서구 여러 나라와의 상호이해에도 기여할 수 있는 점에서 비단 아랍세계의 사람들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21세기에도 계속 주목 해볼 만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이집트의 외화수입의 최대 원천은 수에즈 운하 로부터 벌어들이는 수입(약 13억 달러)이다. 두 번째는 관광수입과 석 유수출로서, 양자 모두 각각 약 9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집트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은 연간 약 40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그 대부분이 카이로를 거친다. 기자의 피라미드를 위시한 고대, 중세의 유적, 이집트 박물관 등이 관광명소인데, 말하자면, 역사문화가 가장 중요한 관광자원인 셈이다. 사람들은 문화를 보고자 카이로에 몰려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카이로에 오래 체제하는 외 국인들 사이에서는 이 도시의 문화시설과 문화행정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없지 않다. 즉 카이로에서 문화라고 볼 만한 것은 전부 과거의 역사적인 유산뿐으로, 현대의 카이로는 문화의 향기를 풍기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 1988년에 문을 연 교육문화센터가 일국의 수도에 어울리는 유일한 문화시설이라고 손꼽힌다. 이 시설은 별명인 오페라하우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원조로 만들어진 탓인지 가부키가 이집트를 소재로 한 오페라 ‘아이다’와 함께 상연되기도 했지만, 낙성 후 1년 후에 는 소련의 발레, 미국의 뮤지컬 등도 무대에 올려졌다. 그러나 2년째부 터는 이집트 혼자 힘으로 프로그램을 짜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 부족 한 자금을 위해 문화 원조를 해온 나라들에 의뢰하여 공연내용을 채 우는 실정이라고 한다. 아직은 비싸다고 할 수 있는 입장료를 내고 오케 스트라 등을 들을 만한 취미를 가진 사람은 전체 인구의 3~5%에 해당 되는 상류계층에 불과하다. 그래도 아랍 여러 나라에서 오페라하우스 시설이 있는 곳은 카이로 하나뿐이었던 만큼, 국빈이 방문할 경우 대통 령이 손수 안내하는 국위 선양의 시설로서의 의의는 무시할 수 없다. 카이로는 아랍권의 학술중심지로서 이슬람교학에서 중심을 이룬다. 또한 아라비아어로 된 영화, 비디오가 가장 많이 제작되는 도시이다. 여 성이 공중의 면전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는 이슬람문화의 특징으로 인 해 현재 가정에서 비디오를 보는 것이 하나의 유행인데, 그 대부분이 카 이로에서 제작된다. 미래의 스타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카이로로 몰려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아라비아어 출판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인가 하면, 아라비아어를 매개로 한 문학과 대중예술의 유행이 발신 지이기도 하다.
카이로의 역사와 그 문화권
카이로는 현대 아랍세계의 문화도시일 뿐 아니라, 오랜 역사를 통해 그 위치를 확보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곧 카 이로가 아랍세계의 정치적 중심으로 기능해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 는다. 이슬람권에서 또 하나의 문화수도라고 할 수 있는 이스탄불이 오 스만제국의 정치수도로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카이로의 역사는 기자의 피라미드 등의 고대 이집트 유적을 근교에 두고 있으면서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로 이어지는 아랍 세계의 문화중심으로서의 역할은 대략 10세기로부터 시작된다.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에 진입했을 때, 카이로는 그 거점이었던 바, 969 년에 화이테마조(朝)가 이집트를 지배했을 때, 카이로의 전신이 되는 성벽도시가 세워졌다. 970년에 아즈할 모스크가 세워지고, 이어서 972 년에 그 부속건물인 마드라사가 세워졌다. 이슬람교학을 가르치던 이 마드라사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랜 최고학부인 아즈할 대학의 기초 가 된다. 그 후 아이유조(朝)가 이집트를 지배하다가 1250년에 마무르크조(朝)에 이른다. 마무르크조 시대에 홍해로부터 상부 이집트를 거 쳐 카이로에 이르는 루트가 동서교역의 주요경로가 되어 안정된 농업 생산과 함께 번영의 시대를 마련한다. 이즈음 술탄과 아미르가 규모가 큰 모스크와 마드라사를 건설하여 이슬람문화의 중심으로서의 기초 를 확고히 했다. 이로써 카이로는 바그다드와 나란히 이슬람문화의 센터가 된 것이다.
그러나 1258년에 몽골이 침입하여 바그다드를 함락시키자 카이로가 이슬람권의 문화수도로서의 역할을 전담하다시피 하게 되면서, 14세 기 초 카이로는 인구 50만의 대도시로 성장한다. 그러면서도 16세기에 도 카이로는 행정적으로는 오스만제국의 1주도(州都)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로는 문화적으로 탁월한 중심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했다. 카이로의 역사적 문화성을 떠받쳐온 것은 상업활동에 의한 부의 축적과 풍족한 농업생산력에 의한 인구의 집적효과라고 할 수 있 다. 앞서 언급한대로 카이로는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잇는 동서교역 과, 아프리카의 내륙부를 묶는 남북교역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옛 날부터 아랍권에서는 ‘카이로 상인’이라면 알아주었는데, 이는 이 도시 가 예로부터 상업 활동의 중심지로 인식되어왔음을 잘 이야기해준다. 이와 아울러 고밀도의 인구는 고대 이집트 이래 나일강 삼각주에 자리 잡은 이 도시 주변에 거대한 인구를 불러 모은 농업생산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에 아라비아어권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이 도시에서 시작 된 유행은 곧 다른 아랍 나라들로 퍼져가게 마련이었다.
이처럼 국경너머로까지 퍼져가는 카이로의 문화적 영향력은 이슬람교 와 정통 아라비아어를 매개로 한다. 터키어, 우르토어, 인도네시아어 등, 광대한 지역에 퍼져있는 이슬람권내 여러 나라에는 여러 언어가 있다. 이처럼 일상 생활언어는 제각각이지만, 이슬람권에서의 종교언어는 아 라비아어이다. 각지의 이슬람교학의 학교인 마드라사에서는 교육이 아 라비아어로 이루어진다. 꾸란(코란)은 아라비아어로 읽혀지지 않으면 안 되고, 기도도 아라비아어로 올려진다. 아라비아어에도 여러 방언이 있지만, 카이로에서 쓰이는 말이 꾸란의 언어에 가장 가까운 정통 아라 비아어이다. 꾸란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카이로의 아라비아어를 배 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손꼽힌다. 이런 까닭에 이슬람의 성지는 메카이 지만, 이슬람 신학연구는 아즈할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슬람교 문화를 말하면서 카이로가 전세계를 향한 발신기지 로서의 위치에 있다고 하는 말은 이슬람교의 전문적 관계자들 사이에 서나 통용될 뿐, 이 도시의 문화적 영향권을 좀더 제한할 경우, 카이로 는 서아프리카로부터 북아프리카에 걸친 아라비아권의 문화중심이라 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 이 지역의 23개국 가운데에는 이란, 아프가니스탄, 터키 등 비아라비아어권의 국가도 있어, 십수 개의 나라 만이 아라비아어권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남부 수단, 그리고 챠 드 국토의 북반부는 아라비아어가 통용되는 이슬람권이지만, 그 남반 부는 비이슬람권의 흑인아프리카이다. 지역적인 환경을 좀더 좁힌다면, 아랍어권 안에서도 모로코, 알제리아, 튀니지아 등 이른바 마그레브 3 국에서는 구종주국의 파리가 국경을 넘어선 문화수도라고 할 수도 있 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수도로서의 카이로의 직접적인 영향권은 동쪽 으로는 만안(灣岸) 여러 나라, 서쪽으로는 리비아, 남쪽으로는 수단, 챠 드의 북부까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유럽 전체보다 넓 은 이 지대에서는 카이로에서 발행된 서적이 유통되고, 민중들은 카이 로의 유행가를 입에 올리곤 한다.
미래를 위한 가능성 이집트의 1인당 국민소득이 만안 국가들 중에서도 낮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카이로에는 53개의 대학이 있고, 약 24만 여 의 대학생이 있다. 상층 학교 진학자가 많아 전 아랍권의 대졸자 3분의 2가 이집트 대학출신들이다. 경제사정이 좋지 못해 고용기회가 적어 외 국으로의 진출이 많은 것이 다른 비산유국과 마찬가지인데, 그 중에서 이집트의 특징은 육체 노동자만이 아니라 기술과 두뇌를 제공하고 있 다는 점이다. 외국에서 엔지니어나 관리직, 또는 교육직으로 종사하는 이집트사람들의 비율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처럼 아랍세계로 인재를 공급하는 카이로의 대학들 중에서 아즈할 대학과 카이로대학이 아랍권의 최고학부에 해당한다. 아즈할대학의 졸업생은 아즈할리라고 불리는데, 그들은 각국의 종교적 지도자, 이슬 람법의 재판관, 이슬람대학의 교수와 아라비아어교사로서 활약하고 있다. 아즈할대학이 종교라는 전통문화를 맥으로 하여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들을 육성하면서 세계적인 이슬람교학의 발신지로서 기능해왔 다면, 카이로대학은 서구적인 근대문화와 관계되는 역할을 감당하면 서 아랍세계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인재들을 길러오고 있다고 하겠다. 바로 이런 점에서 카이로가 아랍권에서 최대의 문화발신지라고 한 것 인데, 정통아라비아어와 거대한 인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 이집트의 근대사의 움직임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비중을 차지 한다. 아즈할대학에 의해 상징되고 있듯이, 카이로는 옛날부터 문화의 발상지였으나, 전통적 문화단계에 동결되지 않고 근대화노선에서도 담 당해온 역할이 매우 크다. 카이로 대학이 이를 대표한다. 같은 아랍세 계에서도 마그레브 여러 나라는 프랑스식민지로서, 파리를 바라보면서 근대화를 시험해왔다. 여기에서의 엘리트들은 프랑스어를 말하고 파리 유학에 의해 그 지위를 획득해왔고,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등의 서구음 악에 심취하는 엘리트와 아라비아어밖에는 알지 못한 채 카이로로부 터 발신되는 아랍 유행가를 입에 올리는 민중이 단절되어 있다. 식민지 화한 경험을 가진 것은 이집트도 마찬가지지만, 이집트는 다른 만안 여 러 나라들보다는 일찍이 근대화노선을 걷기 시작하는 동시에 아랍민 족주의를 내세운 기수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집트의 근대화노선은 전통과 단절하는 개혁의 방 향을 취하지 않게끔 되었던바, 아라비아어를 중핵으로 삼으면서 나름 대로 근대화를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집트 중화사상’ 이라는 관념마저 운위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카이로는 이슬람권의 베 이징이라는 것이다. 다만 베이징이 그 나름대로 세계제국의 수도였지만, 카이로는 아라비아어를 매체로 하여 전달하는 문화를 무기로 삼아 그 우월성을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하다. 일찍부터 근대화에 나서면서 여성의 지위도 향상되어온 이 도시에서는 베일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성이라든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을 만나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런 정도로 카이로는 아랍세계에서 변 화가능성을 가진 도시로서, 때로 급진적인 이슬람운동의 발신지가 되 기도 하지만, 서구 여러 나라와의 상호이해에도 기여할 수 있는 점에서 비단 아랍세계의 사람들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21세기에도 계속 주목 해볼 만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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