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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팩토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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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1,261회 작성일 12-02-22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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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이 드디어 한국에 본격적인 상륙을 시작하는가? 올해만 해도 연초에 서울 인사동 쌈지길에서 워홀 축제 <Wake up Andy Warhol 쌈지, 앤디 워홀을 만나다>가 열리더니, 2월에는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앤디 워홀 그래픽전>이 열렸다. 그 다음은 6월 10일까지 열리는 삼성미술관 리움의 <앤디 워홀 팩토리전>이다. 사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한 외국의 미술가가 한국에 소개되는 일도 예외는아니다. 워홀과 그의 작업을 영접(?)하는 일이 이렇듯 갑작스럽게 붐비는 까닭은 이제 그가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그와 더불어 지금 이곳에서 문화적 대화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글 _ 이영욱(전주대 도시환경미술학과 교수ㆍ미술평론가) • 사진 제공_ 삼성미술관 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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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이 유명을 달리한 것이 1987년이고, 그의 명성이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지도 40년이 넘는다. 하지만 그간 이곳에서 워홀은 전문가 세계 밖의 저잣거리에서는 그 리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의 넘쳐나는 스타성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기존 예술가와는 너무나 다른 그의 캐릭 터(‘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천 박한(?) 대중문화의 복제 이미지를 고급 예술의 영역에 마구 끌어들이는 작업 성향이 낯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 아마도 깊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표면만이 허 공에 떠 있는 듯한 그의 이미지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정 서적인 공감을 유도하는 유기적 작품에 익숙한 사람들은 동 일한 이미지의 반복으로 가득 찬 그의 작업들이 도저히 불 가해하다고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간 상황은 변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한다 해도 이미지의 천국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도시의 공간을 점령하 고 있는 것은 대형 전광판들이다. 마치 화면에서 괴물이 튀 어나오듯 전광판에서 쏟아져 나와 움직이는 이미지들은 도 시의 공간을 채우고 우리를 덮는다. 그런가 하면 거리의 모든 것 또한 디자인되어 있고 이미지화되어 있다.
빌딩과 상점들 의 간판과 외관, 내부 공간, 인테리어, 가구… 도로 안의 자 동차들, 도로 밖의 사람들, 그리고 바로 도로 자체까지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들 또한 브랜드가 붙여져 이미지화되어 있 다. 우리의 의식주를 가능케 하는 모든 상품… 이들의 디자 인 또한 이미 끝나 있다.

이미지의 창궐은 도시 공간과 거리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일 상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일률적으로 수열화되어 디자인된 아파트(나는 워홀이 우리나라의 아파트를 시리즈로 그리지 않은 것이 아쉽다. 실상 이미 우리의 아파트들은 워홀의 이 미지를 현실에서 정확히 실현하고 있다) 속의 일률적인 내부 구조들과 그것에 따라 놓인 일률적인 가구들. 신문과 잡지 들, 온갖 인쇄매체의 이미지들, 그리고 그 속의 마루 중앙에 서는 대형 화면의 고선명(HD) TV가 사람들을 맞는다. 화면 위 끊임없는 이미지의 흐름이 이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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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강국의 위상에 걸맞게 휴대폰과 디지털 카메라를 집어든 다. 그러고는 이렇듯 디자인된 세계, 이렇듯 디자인된 사람들 과 사물들과 공간들을 찍어댄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으고 분류하고 구성하고 변형하여 올리고 퍼나른다. 그것들은 컴 퓨터에서 인쇄물로, 다시 컴퓨터로, 디카로, 휴대폰으로 이 동하고 유포되며 스스로 증식해 간다. 이미지와 현실은 서로 닮아가고 점점 서로에게 다가가 결국 서로 붙어 버린다. 그리 고 바로 이 세계 속에서 이 흐름들에 의해서 다름 아닌 스타 들이 부가된다. 대통령이든 가수든 아니면 또 다른 15분의 누구이든(“앞으로는 모든 사람이 15분이면 세계적으로 유 명해질 것이다”-앤디 워홀) 그들은 이 이미지의 흐름에 동기 를 부여하고 이 흐름들을 이끌어 가고 그 위에 떠오르거나 혹은 사라진다.
앤디 워홀의 작업이 주목되는 것은 그것들이 바로 이러한 동 시대 소비자본주의사회의 삶의 진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 이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되기 시작하는 것은 이미 우리의 삶이 이러한 소비자본주의사회로 깊이 빠 져들어 있기 때문이다.
피상성과 반복에의 집착 언뜻 보기에 워홀은 단지 이러한 현 대소비사회의 핵심적인 특징을 그저 모사하고 반복할 뿐인 것으로 느껴진다. 사실 그 자신이 핵심 멤버 중 하나인 팝아 트가 미술사의 문맥에서 이루어낸 일차적인 기여도 이 소비 사회의 아이콘을 고급 미술이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것에서 찾아진다. 리처드 해밀턴은 ‘오늘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잡지에서 오려 낸 여러 아이콘을 콜라주하는 작업을 보여 주었고, 리히텐 슈타인은 만화의 도상을 차용하여 작업했다. 워홀 역시 캠 벨 수프 깡통과 브릴로 상자, 코카콜라 등을 차용하여 그것 들을 그려냈다.
하지만 워홀의 경우 여타 작가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 일을 해냈다. 요점은 그의 이미지 피상성에의 집착과 그것의 반복에 있다. 도대체 그는 왜 이렇듯 이미지의 피상성과 반복 에 집착했던 것일까? 여러분은 이 이미지들 앞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일단은 그러한 피상성과 반복이 바로 오늘날의 삶, 즉 깊이가 사라져 버리고 모든 것이 수열화되어 버린 대량 사회의 삶을 그야말로 통렬하게 포착해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굳이 보들리야르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오늘 날 실재와 가상의 차이를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되 었다. 혹은 심층과 표면의 구별, 비극적인 것과 어리석은 것 사이의 위계는 사라져 버렸다. 심층이 없으니 이미지는 피상 적으로 떠다닐 수밖에 없다. 워홀이 그려낸 캠벨 수프 깡통 과 브릴로 상자, 코카콜라의 이미지는 바로 이미지의 피상성 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경우다.
그리고 이들은 대량생산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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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산물로서 유기적이고 자율적인 단일체로서의 개성과 는 무관하다. 그들은 완벽하게 동일한 사물로서 기계적으로 반복되어 산출되며, 그야말로 곧이곧대로 반복된 산물이다.
하지만 워홀의 피상성과 반복에의 집착은 단순히 그가 삶의 사태를 잘 포착해 냈다는 식으로 모두 설명될 수는 없다. 워 홀이 이러한 피상성과 반복을 즐겼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 다. 하지만 그가 이 피상적이고 반복적인 세상을 그대로 수 용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차라리 이러한 소비사회 의 작동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그는 그것을 거부하지도 비 난하지도 않았다. 그는 기계가 되고 싶다고 했으며, 자신의 성스러운 예술의 산실을 공장(팩토리)이라고 불렀다.
그런가 하면 그는 최고의 예술은 다름 아닌 비즈니스 아트라 고 했으며, 스타들을 동경하여 그들을 그려내는가 하면 스 스로가 스타가 되고자 했고 또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디선가 “당신이 곧이곧대로 똑같은 것을 더 많이 쳐다볼 수록 의미는 더욱 사라져 없어지고 당신은 더욱 텅 빈 상태 가 되어 더욱더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즉 이 피상적인 이미지의 반복을 밀어붙인 것 은 단순히 사태를 모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태를 모사함 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몰아감으로써 그 사태를 넘어 버리는 혹은 뚫어 버리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나 는 결코 산산조각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통합되 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은 워홀의 극히 표면적인 반 복의 작업들 배후에서 감지되는 그의 상처와 공포, 충격, 그 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파열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스타와 재난을 주제로 한 그의 작업들은 이런 점을 좀 더 분 명히 드러낸다. 이번 <앤디 워홀 팩토리전>에 나온 그의 ‘분홍 위의 검정 마릴린’ ‘전기의자’나 ‘5명의 죽음’ 같은 작업을 보 라. 이것들은 단순히 그 이미지 배후에 놓여 있는 죽음을 암 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충격에 더 가까이 닿아 있 다. 즉 그것은 구체적인 죽음, 다시 말해 오늘날의 죽음에 대 한 충격에 맞닿아 있다.

죽음이 아무런 깊이 없이 다가온다는 것, 우리가 마치 기계 의 죽음처럼 혹은 죄와는 무관한, 단순한 사고와 재난 같은 것으로 그것에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은 죽음이 일상의 삶 속에 녹아 있던 지난 시기와는 달리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 람들에게는 이해불가능한 충격적 사태이다. 그것은 이 피상 적인 반복의 시대, 심층과 표면이 붙어 있는 시대의 또 다른 심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제 심층이 표면과 맺는 관계는 이 전과 다르다. 세계와 이미지의 피상성과 반복은 혹은 그 피 상성과 반복의 반복을 통한 이 세계와의 긴장은 또 다른 파 열을 예비하고 있다. 워홀은 자신의 몸을 던져 우리에게 이 파열의 세계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그 세계는 어떤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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