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빛과 시간,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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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1,543회 작성일 12-02-22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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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예리하기로 정평이 난 모네의 눈을 통해 수없이 다른 순간에 포착된 물 위의 작은 꽃들은 환상적인 생명감과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 꽃들이 서울에 왔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빛의 화가 모네〉전에 가면 모네의 생애 마지막 정열을 사로잡았던 아름다운 꽃들을 만날 수 있다.
| 어린 시절 나에게 연꽃은 꽃이 아니라 일종의 구명정으로 먼저 다가왔다. 잠자리 이야기로 아버지가 들려주신 심청이 이야기에서 연꽃은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를 환생시킨 마법의 배였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 버전의 심청이 이야기에서는 연꽃이 또한 유혹의 꿀단지이기도 했다. 바다에 떠오른 거대한 연꽃, 그 진기한 것이 왕에게 진상되었을 때 심청은 딱 왕의 애간장을 녹일 만큼만 연꽃 속으로 숨바꼭질을 하여 왕비가 되고, 그 결과 꿈에 그리던 아버지와 재회하게 된다. 아직 아버지가 이야기를 들려주셔야 잠이 들 수 있었던 꼬맹이 여자아이의 머릿속에서 연꽃은 하나의 거대한 환상, 그로테스크하기도 하고 막강하기도 하고 유혹적이기도 한 환상이었지, 꽃받침과 꽃대, 잎사귀가 달린 그냥 식물일 수는 없었다. 석가탄신일마다 거리에 매달리는 색색의 연등도 나의 환상을 보증해 주었다. 전구가 들어 있는 연등들은 심청이 들어 있던 연꽃과 대구를 이루었고, 거기에 잎사귀나 줄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이 연꽃에는 모두 있었다! 다 커서 처음 본 연꽃은 너무도 평범한 식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 내 눈에 비친 현실 속의 연꽃은 평범 이하였다. 전주가 고향인 스무 살 무렵의 남자친구는 나에게 덕진공원의 ‘어마어마한’ 연꽃을 자랑스럽게 소개했지만, 내가 보기에 어마어마했던 것은 막상 연꽃이 아니라 플레어스커트처럼 너울너울 벌어진 연잎이었다. 물 위로 씩씩하게 솟아올라 끝없이 펼쳐진 무성한 진초록 연잎들 사이에서 연꽃은 턱없이 왜소하고 심지어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때 한여름 땡볕 아래 전주 덕진공원에서 산산이 부서진 어린 날의 환상은 나의 마음속에서 연꽃을 몰아냈다. 화려하고 강렬한 것이 한창 좋았던 젊은 나에게 그것은 너무 수수했다. 아니, 너무 시시했다. 그랬던 연꽃을 나에게 돌려준 그림, 그것이 클로드 모네의 ‘수련’들이다. 물론 연꽃은 수련과 다르고, 수련도 결코 화려한 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예리한 것으로 정평이 난 이 화가의 눈을 통해서 수없이 다른 순간들에 포착된 물 위의 이 작은 꽃들은 심청을 실어온 연꽃만큼이나 환상적인 생명감과 존재감을 보여 주었다. 그 ‘수련’들이 서울에 왔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6월 6일부터 9월 26일까지 열리는 <빛의 화가 모네>전에 가면 모네의 생애 마지막 정열을 사로잡았던 ‘수련’들을 만날 수 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ㆍ1840~1926)는 인상주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고, 여기에는 그의 유명한 그림 ‘인상: 해돋이’(1872)가 우연찮게 큰 기여를 했다. 그가 성장기를 보낸 노르망디 해안의 르아브르에서 항구의 일출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은 당시에도 여전히 권위를 행사하고 있던 전통적인 회화의 관점, 즉 아카데미식 고전주의 회화의 관점에서는 참으로 가당치 않은 그림, 아니 그림도 되기 이전의 미완성 상태에 불과했다. 본의 아니게 ‘인상주의’라는 명칭을 선사하게 되는 당시의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이제 막 그리기 시작한 벽지도 이 바다 풍경보다는 더 완성된 상태일 것”이라는 말로 모네의 ‘인상’에 대한 거부감을 표명했다. 과연 이 그림 속에는 달아오른 동전처럼 화면 상단에 납작 붙박여 있는 새빨간 해 말고는 하나도 또렷한 것이 없다. 서서히 어둠이 걷혀가는 하늘, 이른 아침 바다로 나가는 배들을 잔잔히 밀어내는 파도, 하늘로 피어오르면서 곧 흩어지는 연기, 그리고 수면 위에서 우리를 향해 퍼져 나오는 아침 해의 빛줄기까지, 이 그림 속의 모든 것은 동틀 녘의 희뿌연 색채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윤곽이 뚜렷한 대상들을 전경-중경-후경으로 착착 멀어져 가는 분명한 공간 속에 체계적으로 배치하고, | ||||||||
각 대상에는 고유한 색채를 칠해야 훌륭한 그림, 아니 적어도 완성된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고전주의 처지에서는 이 그림이 드로잉과 원근법 같은 기본기도 갖추지 못한 한 풋내기 화가가 사물이 저마다 지닌 고유한 형태와 색채에 대한 분별도 없이 무턱대고 성급하게 그어댄 거친 붓자국의 범벅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습작이나 스케치라고 한대도 시원치 않을 것을 버젓이 그림이랍시고 전시를 하다니. 그러나 모네의 드로잉 능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또한 르아브르에서의 초기 시절이다. 열일고여덟 시절의 청년 모네는 르아브르 명망가들의 캐리커처를 그려 팔면서 처음으로 화가로서의 이름을 냈다. 그의 캐리커처는 아주 반응이 좋아서 모네는 드로잉을 팔아 상당한 돈을 모았고, 이 돈은 그가 진짜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날 때 든든한 노잣돈이 된다. 그렇다면 모네는 드로잉을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르아브르 지역의 화가로 모네에게 멘토 역할을 한 외젠 부댕의 “즉석에서 그려지는 작품은 화실에서는 절대로 재창작될 수 없는 어떤 힘과 강렬함과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말은 모네가 캐리커처를 등지고 풍경화가로 다시 태어나도록 한 결정적 계기가 된다. 풍경화가로서 모네가 그린 그림의 범위는 아주 넓다. 그는 아주 오래 살았고, 늘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꿈꾸었으며, 실제로 거처를 자주 옮겨 다녔다. 르아브르를 떠나 파리로 돌아온 다음에도 모네는 파리 시내와 근교의 많은 지역, 벤느쿠르ㆍ페캉ㆍ생미셸ㆍ트루빌ㆍ아르장퇴유ㆍ베퇴유ㆍ푸아시 등등을 전전하며 살았다. 여기에 그가 한 수많은 여행과 그의 생애 마지막 터전이 되는 지베르니의 그림 같은 정원을 더하면, 모네는 부럽게도 자신의 그림처럼 한시도 머무는 법 없이 가장 빛나는 순간들만을 낚아채며 자유롭고 화사한 삶을 구가한 행운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지베르니에 정착할 때까지 모네가 한 수많은 이사는 대부분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혁신적인 화풍은 거듭되는 살롱 낙선과 대중의 냉랭한 반응으로 이어졌고 그림은 당연히 잘 팔리지 않았다. 첫아들 장이 태어나고 이듬해 모네는 너무도 곤궁한 나머지 물에 투신하는 시도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 그를 한순간 삶의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넣은 극빈의 곤경도 계절에 따라, 또 시간에 따라 잠시도 고정되지 않고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효과를 정확하게 잡아내려는 모네의 화면에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늘과 물, 그리고 수련 모네는 세상의 형태와 색채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거부했다. 이를테면 사과는 둥글며 빨간색이고 풀은 뾰족하고 초록색이라는 사고를 거부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과가 둥근 형태와 빨간 색채를 가진 사물임을 ‘안다’. 그러나 사과가 언제나 둥글고 빨갛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고정관념이 아니라 자기 자신 하늘과 물, 그리고 수련 모네는 세상의 형태와 색채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거부했다. 이를테면 사과는 둥글며 빨간색이고 풀은 뾰족하고 초록색이라는 사고를 거부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과가 둥근 형태와 빨간 색채를 가진 사물임을 ‘안다’. 그러나 사과가 언제나 둥글고 빨갛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고정관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눈이 특정한 빛이 비친 순간에 본 바로 그 대상의 형태와 색채, 이를 인식하고 분석하는 모네의 습관은 거의 무의식적인 수준이었다. 모네도 자신의 이러한 강박관념을 알고 있었다. 아내 카미유의 이른 죽음을 앞에 두고, 모네는 ‘내 사랑하던 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 옆에 이젤을 펴고 앉아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기계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 스스로도 놀란다. 그러나 모네는 “사랑하던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되짚어 보기도 전에, 내가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색채가 내 무의식을 사로잡아 반사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고 그 당시 상황을 담담히 말했다.
모네의 그림 인생은 초기(1840~1871), 아르장퇴유 시기(1871~1878), 베퇴유 시기(1878~1881), 지베르니 시기(1883~1926)로 크게 나뉜다. 초기가 르아브르와 파리에서 화업을 닦는 시기라면, 아르장퇴유 시기와 베퇴유 시기에는 이른바 ‘인상주의 화가’ ‘빛의 화가’로서의 모네를 확립했다. 지베르니 시기는 빛의 효과에 대한 모네의 탐구가 더욱 집요해진 끝에 현대 추상미술로 나아가는 가교로서의 모네를 탄생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모네의 그림 인생을 관통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물이다. 노르망디 해안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후 바다는 늘 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그의 삶은 수많은 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센 강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그 자신만을 위한 물, 그 유명한 지베르니의 수경 정원을 만들기에 이른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에서는 이렇게 모네의 삶을 관통한 다양한 물의 풍경을 볼 수 있기도 하다. 1893년 지베르니에 정착한 후 꼭 10년 후에 모네는 그의 집과 잇닿은 철길 건너편의 땅을 사들여 집 앞의 정원 ‘클로 노르망’과 짝을 이룰 물의 정원에 착수한다. 그는 매입지를 가로지르고 있던 센 강의 지류, 엡트 강의 배수로를 활용했다. 주변 농가에서 반대가 일었다. 농부들은 모네가 심은 낯선 식물들이 농사에 쓸 강물을 오염시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과연 지베르니에서 모네의 연못은 특이하다. 그가 열광적으로 수집한 일본의 채색목판화 우키요에를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이 연못은 비대칭과 만곡들로 가득 차 있으며, 연못 위에는 그 유명한 일본식 다리를 놓았고, 연못에는 일본산 수련을, 연못가에는 붓꽃과 버드나무, 대나무들을 함께 심어 주변의 풍경하고는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그것은 그림 같은 풍경, 그림처럼 만들어진 풍경이다. 모네에게도 수련은 처음부터 이목을 끄는 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정원을 예쁘게 가꾸기 위해 심은 여러 식물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따라서 연못을 소재로 한 초기 작품들에서 수련이 특별한 주목을 받은 흔적은 없다. 수련을 그린 첫 작품은 1897년경으로 확인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잦은 주목을 받다가 마침내는 모네의 말기작 전체를 이루는 모티브가 된다. 맨 처음 그려진 ‘수련’ 가운데 하나인 ‘수련, 저녁의 효과’(1897년경)에는 납작한 수련잎 몇 점, 만개한 백수련 두 송이, 그리고 희미한 분홍빛 꽃봉오리 하나만이 떠 있다. 고요하고 단아한 그림이지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매혹의 힘이 이 그림에는 있다. 그림에 가까이 가면 그 비밀을 알 수 있을까? 연잎들 위로 가늘고 날렵하게 그려진 하얀 선들은 수면과 잇닿은 연잎 위로 가볍게 찰랑이는 연못의 물을, 꽃잎들을 그려낸 두껍고 진한 선들은 그 물 위에서 움직이는 듯 아니듯 흔들리는 수련의 존재감을 빚어낸다. 그리고 연잎과 꽃 주변의 거뭇거뭇한 색면들에는 이 어여쁜 장면을 떠받치는 연못 물 아래의 세계가,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왼쪽 위 화면에는 저물녘의 푸른 빛 하늘이 담겨 있다. 넓은 연못의 한 귀퉁이, 거기에 떠 있는 수련 몇 송이를 그리면서 모네는 하늘과 물, 그리고 물 아래의 세계까지를 응축해 넣었던 것이다. 모네의 ‘수련’은 이렇게 꽃 그림이자 풍경화이다. 거기에는 자연의 전 풍경이 다 담겨 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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