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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갖고 있는 매력은 궁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옛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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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1,687회 작성일 12-02-22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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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의 도시 프랑스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매력은 궁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옛 정원이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던 왕들은 르네상스의 문화와 예술뿐 아니라 이탈리아식 정원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정원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프랑스식 정원의 특징인 화단이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다. 초기의 튈르리 정원과 폴레우프로 정원, 그리고 헤라클레스 상이 놓인 보르비콩트 정원은 베르사유 궁 이전의 프랑스 대표 정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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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정원의 성행

프랑스에서는 언제부터 정원이 성행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프랑스에는 고대 로마의 유적이 많고 또한 그 시대에 건설된 마을이 핵이 되어 잔존하다가 발전한 도시가 적지 않다. 수도인 파리도 같은 모양이다. 더군다나 고대 로마시대에서는 정원이 아주 많이 만들어졌고, 중세에서도 수도원과 저택 등에 정원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넓은 정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로부터인즉, 이탈리아로부터 훌륭한 정원의 견문이 전해진 후의 일이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에 걸쳐 프랑스의 왕들은 몇 번이고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 당시에 꽃핀 르네상스 문화를 실제로 목도하고 나서 프랑스에서도 정원 조성이 성행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루아르(Loire) 강 구역을 들어보자.
이 강은 프랑스 중앙 근처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는데, 당시에 차례로 저택과 정원이 만들어졌다. 현재로서는 고성순례로 유명한 관광코스이다. 그리고 왕실이 소유한 저택들도 마찬가지이다. 루브르 궁전의 서쪽 튈르리(Tuileries) 정원이 조성되어 있는 것과 함께 파리 교외의 생제 르맹앙레(Saint-Germain-en-Laye)에 있는 성곽에는 여러 단의 테라스로 구성된 정원과 폴레우프로에 정원이 정비되어 있다. 이렇게 정원조성이 뒤를 잇는 가운데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테라스를 중심으로 한 형태의 이탈리아식 정원이라는 이채로운 스타일이 생겨난다.

17세기에 생겨난 프랑스식 정원은 자연의 풍경을 인공적으로 제어함으로써 조화미를 갖춘 미술품이 되었다.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와 나란히 이 시대의 프랑스도 이미 정원의 세계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예컨대 불온한 시대에는 ‘둘러싸인 정원’이 종종 만들어졌듯이 정치적ㆍ사회적 환경은 정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그러나 정원이 그 시대 건축양식으로부터 받아들인 영향은 무엇보다 크다. 15세기 피렌체의 아르베르티, 란테 저택의 비니올라, 에스테 저택의 필로 리고리오라는 건축가들은 건축물의 주위를 둘러싸는 정원까지 설계했다.

그것은 기원전 1세기로마의 건축가 비투르비우스의 미학론을 실천으로 옮긴 것인바, 비투르비우스는 미는 전체 중의 여러 부분이 갖춘 조화로서 한 사람의 눈 과 손이 전체의 디자인을 그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인도 정원에 관해서는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와 같은 생각을 지녔다. 말하자면 대규모 건축구상에 있어서 유일한 작가는 건축가이고, 건축물 쪽이 정원보다도 우위에 놓였던 것이다.
 
엄밀한 통일성의 화단

새로운 프랑스식 정원의 특징은 화단이다. 화단은 건물의 연장으로 생각되었고, 저택의 계단 또는 의식용의 방으로부터 관상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그것은 회양목을 기본으로 하고 디자인은 규칙적으로 각 부분이 완전하게 균형을 취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4각ㆍ타원ㆍ소용돌이ㆍ원형의 화단은 전체 설계에 따라야만 하고, 여러 가지 형의 변화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 고전적 균형, 엄밀한 통일성은 올리비에 드 셀의 《농업론》(1701)에서 최초로 평가된 바 있으나 이윽고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 왕실 전속 정원사의 가계

사상 초유로 자수화단을 만든 것은 자크 모레라고 하는 프랑스의 정원사이다.
그러나 그 디자인은 그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건축가인 에테이엔느 주 베라크가 담당했다.
건축가와 조원가의 이러한 관계는 상징적으로, 후의 정원의 역사를 특징짓는다. 자크의 아들 클로드가 사후에 간행된 《원예 및 조원의서》에서 건축가와 조원사의 이러한 관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주 베라크 밑에서 일하면서 정원은 ‘중요 통로로 분할되고 통일성이 있는 작은 방’ 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칙이 젊은 클로드의 몸에도 배게 되었다. 그의 책은 어디까지나 실용서로서 디자인 분야는 작가로서의 건축가에게 위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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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의 아들이 그 유명한 앙드레 모레로서,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일하면서 1644년에는 루이 13세에 의해 최초의 왕실 전속 정원사에 임명되었다.

왕비 카트린 데 메디치가 바라던 튈르리 궁의 정원 건설에 모레가(家)와 함께 손잡게 된 것이 르 노트르가(家)이다.

그 일가로 명성을 얻은 최초의 인물은 피에르(1570~1610 활약)로서, 피에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장은 특권으로서 튈르리 궁 안에 숙소를 허락 받았다.

장의 아이들은 거기에서 자라고 딸들은 정원사에게 시집갔다.
 
장의 아들인 앙드레 르노트르(Andre Le Notre)는 1613년에 태어나 청년기가 되자 회화에 강하게 이끌려서 유명한 화가 시문 베의 아틀리에에 드나들었다. 그리고 건축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아틀리에에는 후에 함께 일하게 될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도 드나들었다. 1637년에 앙드레는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 조원가로서의 생애를 시작한다.

그의 이름을 일약 날리게 해준 것은 보르비콩트(Vaux-le-Vicomte)정원의 건설이었다. 당시의 재무장관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는 1656년에 새로운 성곽과 정원을 만들기로 하고 건축은 루이 르 보 (Louis Le Vau)에게, 장식은 샤를 르 브룅에게, 그리고 정원은 앙드레 르 노트르에게 맡겼다. 그렇게 해서 화려한 성곽 앞에 광대한 정원 앞에는 자수화단ㆍ잔디ㆍ연못ㆍ분수 등이 차례로 펼쳐지고 그 양옆으
로는 숲이 넓혀져 있다. 벽들을 부수어 홍차색의 흙 위에 회양목을 심어 집어넣어 모양을 그린 자수정원은 특히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프랑스에서 발달한 화원이다.

그리고 그 자수의 외곽에는 저택을 배경으로 왼쪽에 왕만의 샘못, 오른쪽에 성수반이라고 불리는 분수대를 배치하고 주변에는 잔디를 널리 심어 놓는다. 성곽에서 볼 때 정면 깊숙이에는 언덕이 있고 지평선이 보이도록 풍경이 조성되었다. 모두 새로운 타입의 정원이 르노트르에 의해 창출된 것이다. 1661년에 완성된 후 일대 축하연이 벌어졌다. 그러나 두 번째 축하연이 끝난 후 푸케는 체포되고 만다. 재무장관의 의자를 노린 콜베르의 참언에 의해서라고도 하고 국왕에 즉위한 루이 14세가 푸케에게 질투를 느꼈다고도 일러져 오지만, 푸케는 20년이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했다. 르 노트르는 조원가로서의 재능을 나타낸 작품에 의해 최고의 지위와 명성을 얻게 된다.
 
조원가와 건축가

르 노트르가 보르비콩트의 정원에 부여한 주 원칙은 성의 조화이다. 거기에서는 성이 정원을 지배하거나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구성 중 일부가 되고 있다.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환상적인 기분으로 이끄는 것은 성이 아니라 물론 정원이다.

성에서 발하는 주축선은 시계를 넓게 열어놓는다. 주축선에 수직으로 교차하는 대수로는 일단 낮게 설정되어 성으로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산책 도중에 대수로와 큰 못을 발견한 경우, 그 인상은 좀 더 극적이 된다. 그리고 분수가 성의 돔에 호응하여 물의 돔을 뽑아 올린다. 보르비콩트에서는 변화하는 하늘의 표정과 태양광선을 충실히 고려하여 물의 움직임이 설계되어 있다. 그와 같은 진공과 자연의 탁월한 균형은 인간의 손에 의해 자연을 지배하고 규칙을 부여 한다는 17세기 프랑스 정원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프랑스식 정원이라면 곧바로 앙드레 르 노트르와 그가 만든 베르사유 궁전을 살펴야 하겠지만, 그가 손댄 보르비콩트를 일관 예비적으로 살피는 것 역시 필요하다. 보르비콩트는 파리 남동 약 50km 지점, 정문으로 들어서면 길이 남북으로 저택을 향해 곧바로 뻗어 있는데, 저택은 전체를 물길로 에워싸고 있다. 중세 성 스타일의 이름을 남기고 있으나 그다지 폭넓지는 않다는 점으로 보아 그것이 장식용으로 쓰였을 뿐 중세를 탈각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저택의 반대쪽에 정원이 꾸며져 있다.

저택으로부터 정원을 내려다보면 시계는 남쪽으로 열리는데, 중심에는 곧바로 축선(軸線)이 지나간다. 그리고 정원의 좌우로는 수림이 그 열려진 부분을 취해 남쪽으로 연장되어 있다. 분수가 배치되어 있으면서 좌우에 정원길이 뻗쳐져 있으나, 가장 낮은 곳에는 넓은 수로가 좌우로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언덕과 같이 두툼한 곳이 있고 그 위에 헤라클레스의 상이 놓여 있다. 정원 구성은 정원이 만들어진 당시와 변하지 않고 있다.

니콜라 푸케를 체포한 후 오렌지 등의 수목이 옮겨졌으며 조각이 구입되기는 했지만 소유주도 변한데다가 19세기 무렵 이 정원은 황폐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당시 판화 등의 사료를 택해 복원작업이 개시되어 오늘날 보이는 것처럼 과거의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 정원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욕심도 없지 않으나, 여기에서 찾아지는 프랑스식 정원의 특징만을 적어보도록 한다.

먼저 첫째로 눈에 띄는 것은 넓음이다. 보르비콩트 정원의 면적은 약 7.08km2(214만1700평)라고 하거니와 베르사유 정원에 이르면 실로 거대하다. 이탈리아의 정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그 밖의 귀족의 정원도 보르비콩트 정원과 같이 넓다.

그 다음 특징은 구성에 있다. 저택을 중심으로 또는 기점으로 정원의 중앙을 꿰뚫는 힘 있는 축선을 통해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비스타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특히 그 축선에 나란히 좌우대칭성을 가지고서 정원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나아가 전체를 내다보면서 저택에 가까울수록 좀 더 세밀하고 친밀한 디자인이 가능해진다. 이탈리아식 정원과 대비시켜보면 정원의 밖으로 넓어지는 풍경을 즐기는 파노라마가 사라진다. 거꾸로 예컨대 지평선이 보인다 해도 거기는 아직 정원의 내부이다. 정원의 중심으로 취해지는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정원의 요소로서는 물의 처리가 다르다. 웅대한 분수가 있긴 하지만 수량이 부족해서인지 넓은 수면을 장식적으로 내보이는 역할이 강하다. 못과 수로가 넓고, 말하자면 정적인 이용에 중점이 놓여 있다. 나아가 정원 안에 있는 수풀은 포스케라고 불리는데, 많은 경우 규칙 바르게 바둑판 모양으로 졸참나무 등의 수목이 심겨진다. 그러나 그 포스케 가운데에는 작은 정원이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정원 속 정원인 셈이다. 주위는 수림에 둘러싸여 있기에 절호의 장소인 셈이다.

포스케는 이 작은 정원의 명칭으로 불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새로운 모양의 정원은 앙드레 르 노트르에 의해 창안된 것인데,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에 이 스타일의 정원이 만들어지게끔 되어 프랑스식 정원 또는 프랑스 기하학식 정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곧 새로운 성곽과 정원의 건설에 몰두한다. 장소는 파리 교외의 베르사유이다. 르 보, 르 프룬, 르 노트르 이들 세 사람이 다시 불러들여지고 르 노트르는 다시금 새로운 정원 조성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해서 광대한 베르사유 정원이 만들어졌고, 그가 만들어낸 스타일이 어느덧 프랑스식 정원으로 불리게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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