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도시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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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ica 댓글 0건 조회 2,329회 작성일 12-02-23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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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활동을 위해, 더 경제적이고 더 아름답게
만일 건축도시라는 개념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 도시를 구성하는 건물들이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건축이라는 인간 활동을 대표할 만한 특질을 지닌 도시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면, 시카고야말로 첫째로 손꼽힐 만한 도시들 중 하나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시카고가 처음부터 괄목할 만한 건축도시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시카고는 필경 시카고를 관통하는 시카고 강과 밀접한 관계 속에 성장해왔는데, 시카고 강의 모습이 대부분의 강들이 그렇듯이 자연에 의해 윤곽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가 범상치 않다. 그 강은 대체로 인간의 기술에 의해 흐름이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계곡의 벽들은 건축가들에 의해 디자인된 것이다.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첫 이민자들이 보기에 그 강은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었다. 원주민들이 이 지역에서 자라고 있는 야생 양파의 이름을 따서 붙인 체카고우(Checagou) 강은 호수를 향해 게으르게 움직였고, 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습지처럼 보였다. 초기의 방문자들은 이곳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다고 포기했다. 다만 그것은 모기가 살기에나 좋은 진흙구덩이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1673년, 프랑스 개척자들(Jacques Marquette / Louis Jolliet)이 이 강이 큰 호수들과 내륙의 풍요를 연결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에 착안했을 때, 시카고는 축복받은 땅으로 변모했다. 시카고 강의 남부와 일리노이, 그리고 미시시피로 흘러들어가는 드 플랜(Des Plaines)강 사이에는 1마일도 채 안 되는 육로가 놓여져 있었을 뿐이었다.
1803년에 미국 연방정부가 미시간호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 디어본 요새(Dearborn Fort)를 건설했을 때, 이러한 사실은 좀더 분명히 이해되었고, 드디어 1828년 일리노이 의회가 운하를 건설하기로 결의했을 때, 이 지역이 국가의 북서부 거점이 되리라는 위대한 희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1832년에 단돈 100달러에 사들인 부지가 불과 3년 후에는 1만 5천 달러를 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첫 이민자들이 보기에 그 강은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었다. 원주민들이 이 지역에서 자라고 있는 야생 양파의 이름을 따서 붙인 체카고우(Checagou) 강은 호수를 향해 게으르게 움직였고, 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습지처럼 보였다. 초기의 방문자들은 이곳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다고 포기했다. 다만 그것은 모기가 살기에나 좋은 진흙구덩이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1673년, 프랑스 개척자들(Jacques Marquette / Louis Jolliet)이 이 강이 큰 호수들과 내륙의 풍요를 연결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에 착안했을 때, 시카고는 축복받은 땅으로 변모했다. 시카고 강의 남부와 일리노이, 그리고 미시시피로 흘러들어가는 드 플랜(Des Plaines)강 사이에는 1마일도 채 안 되는 육로가 놓여져 있었을 뿐이었다.
1803년에 미국 연방정부가 미시간호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 디어본 요새(Dearborn Fort)를 건설했을 때, 이러한 사실은 좀더 분명히 이해되었고, 드디어 1828년 일리노이 의회가 운하를 건설하기로 결의했을 때, 이 지역이 국가의 북서부 거점이 되리라는 위대한 희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1832년에 단돈 100달러에 사들인 부지가 불과 3년 후에는 1만 5천 달러를 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카고 화재는 열 번이고 일어나야 한다
1848년, 미시간호와 일리노이 강은 드디어 운하에 의해 연결되었고, 이는 1860년의 철도 개통과 함께 시카고를 국가의 주요 거점 도시 중 하나로 확실히 자리매김되었다. 그렇다고 이 새로운 수로개척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오랫동안 퇴적된 무수한 모래톱들이 아주 작은 보트조차 항구에까지 이르는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1830년대에 군인들이 달라붙어 제방을 쌓고 운하를 건설한 덕분에 1850년대에 이르러 시카고는 국가적 차원의 무역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이 도시는 비록 목조건물들이었지만, 주변의 건물들을 난쟁이로 만들었다.
집이 흥하려면 불이 나야 한다는 식의 한국 속담도 있지만, 시카고의 모습이 오늘과 같이 되기까지에는 1871년의 대화재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구도시의 5분의 3이 불타면서 중앙의 상업도심지역에서만도 약 1만 7천 채의 건물이 사라졌다. 시인 린제이(Vachel Lindsay)는 이렇게 썼다.
집이 흥하려면 불이 나야 한다는 식의 한국 속담도 있지만, 시카고의 모습이 오늘과 같이 되기까지에는 1871년의 대화재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구도시의 5분의 3이 불타면서 중앙의 상업도심지역에서만도 약 1만 7천 채의 건물이 사라졌다. 시인 린제이(Vachel Lindsay)는 이렇게 썼다.
시카고 화재는 열 번이고 일어나야 한다.
매번 건물들은 더 멋있어지고,
덜 비싸지고, 더 경제적이 되고, 더 아름다워진다.
매번 건물들은 더 멋있어지고,
덜 비싸지고, 더 경제적이 되고, 더 아름다워진다.
아울러 시카고 강의 북부와 중심 지류로부터 물을 끌어다 남부로 흐르게 함으로써 강은 좀더 넓고 깊어졌다. 이에 당시의 주된 상품이었던 곡물은 기계설비와 함께 시카고를 더욱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강의 흐름을 역전시킨 것이 호수 물을 좀더 맑게 만들었다. 1909년 위대한 건축가 다니엘 번햄(Daniel Burnham)이 중서부 거대 도시계획과 함께 강 양쪽을 따라 널찍한 도로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맞먹는 도심이 생겨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곧 도시 미화운동이라고 불리는 흐름을 반영했다. 고전양식의 도심이 시민적 자부심을 창출해낸 동시에 개인 기업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요컨대 화재는 비계획적이고, 비조직적이었던 ‘첫 번째 시카고’의 혼란들을 쓸어버렸고, 이제 ‘두 번째 시카고’가 솟아올라 국가적 화제가 되었다. 킬리(Charles Patrick Keeley)가 설계한 ‘거룩한 이름 주교좌성당’(1874년)이 그러한 새로운 출발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지금은 빌딩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210피트 높이의 황금십자가가 오히려 나지막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이곳은 요한 바오로 2세도 방문한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성당이다. 그가 선종한 후 그곳에서 치러진 추모미사는 참으로 엄숙했고, 유난히 폴란드 이민이 많은 이 지역을 상징하듯 폴란드 출신 주교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 네오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1915년에 내부를 수리·확장하면서 각각 1,200파운드나 되는 청동 문을 입구에 세움으로써 그 위엄을 더하였다. 그러면서도 스테인드 글래스는 전위예술적 요소들을 풍부하게 받아들인 신구양식의 조화를 통해 현대 천주교회의 지향을 암묵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또한 1989년에 건축된 파이프 오르간이 미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오르간들 중 하나로서 위용과 성능을 뽐내고 있다.
근대 건축 예술의 보고, 시카고학파
앞에서 대화재 이후의 ‘두 번째 시카고’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실로 기적과 신비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건축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업적으로서, 1930년에 시카고 강의 남부 지류가 직선화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건축가들은 이제 시카고 강을 단순히 경제적인 매력만이 아니라, 미학적인 매력을 더하고자 배려하는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환경주의의 영향으로 1980년대에 이르면 사람들은 강이 지닌 잠재력에 더욱 눈뜨게 되고 인간 친화적인 분위기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우리는 이들을 시카고학파라고 이름 지어 요약해보기로 한다.
건축은 이 도시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 시카고와 그 시민들의 기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유명한 공동 표어들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어떤 계획도 세우지 말라’(Make no little plans)든지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말들은 도전과 경고를 말하기도 하고, 실천이성에 대한 충실을 보여준다. ‘덜한 것이 더 많다’(Less is more)도 이에 속하는데, 이는 미와 힘을 깊이 있게 만드는 단순성에 대한 공감을 대변한다. 이 말들은 모두 건축가들에 의해 발언되어 시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바, 첫 번째는 다니엘 번햄이, 두 번째는 루이스 설리반(Louis Sullivan)이, 그리고 마지막은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남겨놓은 말인데, 이들은 각각 시기를 달리하면서 시카고의 건축을 대표한다. 이들은 다른 동시대 건축가들과 함께 시카고를 일상생활과 손잡으면서 마치 신전 같은 격식을 갖춘 도시로 재탄생 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세계 최초의 마천루가 1885년에 시카고에서 데뷔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제니(William LeBaron Jenny)가 철강구조를 이용하여 라살레(La Salle)가에 있는 10층짜리 가정보험건물을 건축한 것이다. 이는 당시 젊은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초의 시카고학파의 명성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제니의 제자들(Daniel Burnham, Louis Sullivan, Martin Roche, 그리고 William Holabird 등)은 시카고와 미국의 건축적 결을 바꾸어놓았는데, 그 대부분은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는 격언에 충실하면서 건축미의 새로운 유형을 돌출시켰다. 그들은 대체로 고전주의로 훈련을 받았던 바, 일부는 고딕 지붕선과 함께 창틀을 로마네스크 아치로 꾸미고, 창문들 사이 공간에는 복잡한 문양을 새겨 넣곤 했다. 건축가 설리반과 기술자 애들러(Dankmar Adler)가 협력하여 건축한 강당 건물 및 극장(Auditorium Building and Theater)은 400개의 방을 갖춘 호텔과 사무실 복합건물로써, 그 안에는 오페라하우스 극장(4천여 석)도 있다(1889년 완성). 그 극장 안에는 5천 개의 조명들이 150개의 각광과 함께 공간을 채워준다. 이를 효시로 18층짜리 호텔, 극장, 그리고 사무실 복합건물 등이 줄을 이어 들어섰다. 앞서 말한 18층짜리 오디토리움은 최초로 환기조절시설이 설치된 건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시카고 건축이 단순히 실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적이고 영적이기도 했다. 설리반과 애들러는 시카고 생활건축의 전통 안에서 역동적인 힘을 실질적이면서도 극적으로 풀어놓았던 바, 이는 시민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번햄과 루트(Wellborn Root), 그리고 홀라버드와 로쉐의 협력관계 역시 시카고학파의 미학을 재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니, 직사각형의 강철구조와 자연광을 최대로 끌어들이는 넓은 유리창들은 지적 또는 철학적 미뿐 아니라, 상업적인 활력을 더해주어 많은 기업가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드디어 도쿄의 제국호텔을 짓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에도 나고야에 있는 메이지무라(明治村)라는 야외박물관에 그 주요 부분이 복원·전시되고 있다.
불행히도 시카고학파의 건물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남아 있다 해도 강가에 있지 못하지만, 미국적 고전의 기분은 아직도 살아 있다. 1920년대는 시카고가 유례없는 번영을 누린 시기로, 지금도 남아 있는 당시 건물들 중 예컨대 트리뷴타워(1925년)는 260개의 국제응모를 통해 지은 ‘시카고 트리뷴’지 본사 건물로서 그 시대를 대표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사무실 건물’이어야 한다는 건축주(Colonel Robert McCormick)의 꿈을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시켜준 이 건물은 네오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당시로서는 가장 높은 463피트의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Raymond Hood/ John Howeks 설계팀). 1925년에 완성된 이 건물은 강철과 내화 콘크리트를 주조로 외장은 회색 인디아나 석회암으로 마감했다. 소요철강 9천 톤, 석재 1만 2천 톤으로 8백 50만 달러가 소요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34층의 건물 꼭대기에는 첨탑이 세워져 중세를 연상케 하는 한편, 건물에 새겨진 각종 상징들은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아이러니컬하기도 한 저널리즘의 성격을 투영하기도 한다. 카메라를 움켜쥐고 있는 부엉이가 그 한 예가 된다.
건축은 이 도시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 시카고와 그 시민들의 기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유명한 공동 표어들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어떤 계획도 세우지 말라’(Make no little plans)든지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말들은 도전과 경고를 말하기도 하고, 실천이성에 대한 충실을 보여준다. ‘덜한 것이 더 많다’(Less is more)도 이에 속하는데, 이는 미와 힘을 깊이 있게 만드는 단순성에 대한 공감을 대변한다. 이 말들은 모두 건축가들에 의해 발언되어 시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바, 첫 번째는 다니엘 번햄이, 두 번째는 루이스 설리반(Louis Sullivan)이, 그리고 마지막은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남겨놓은 말인데, 이들은 각각 시기를 달리하면서 시카고의 건축을 대표한다. 이들은 다른 동시대 건축가들과 함께 시카고를 일상생활과 손잡으면서 마치 신전 같은 격식을 갖춘 도시로 재탄생 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세계 최초의 마천루가 1885년에 시카고에서 데뷔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제니(William LeBaron Jenny)가 철강구조를 이용하여 라살레(La Salle)가에 있는 10층짜리 가정보험건물을 건축한 것이다. 이는 당시 젊은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초의 시카고학파의 명성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제니의 제자들(Daniel Burnham, Louis Sullivan, Martin Roche, 그리고 William Holabird 등)은 시카고와 미국의 건축적 결을 바꾸어놓았는데, 그 대부분은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는 격언에 충실하면서 건축미의 새로운 유형을 돌출시켰다. 그들은 대체로 고전주의로 훈련을 받았던 바, 일부는 고딕 지붕선과 함께 창틀을 로마네스크 아치로 꾸미고, 창문들 사이 공간에는 복잡한 문양을 새겨 넣곤 했다. 건축가 설리반과 기술자 애들러(Dankmar Adler)가 협력하여 건축한 강당 건물 및 극장(Auditorium Building and Theater)은 400개의 방을 갖춘 호텔과 사무실 복합건물로써, 그 안에는 오페라하우스 극장(4천여 석)도 있다(1889년 완성). 그 극장 안에는 5천 개의 조명들이 150개의 각광과 함께 공간을 채워준다. 이를 효시로 18층짜리 호텔, 극장, 그리고 사무실 복합건물 등이 줄을 이어 들어섰다. 앞서 말한 18층짜리 오디토리움은 최초로 환기조절시설이 설치된 건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시카고 건축이 단순히 실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적이고 영적이기도 했다. 설리반과 애들러는 시카고 생활건축의 전통 안에서 역동적인 힘을 실질적이면서도 극적으로 풀어놓았던 바, 이는 시민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번햄과 루트(Wellborn Root), 그리고 홀라버드와 로쉐의 협력관계 역시 시카고학파의 미학을 재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니, 직사각형의 강철구조와 자연광을 최대로 끌어들이는 넓은 유리창들은 지적 또는 철학적 미뿐 아니라, 상업적인 활력을 더해주어 많은 기업가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드디어 도쿄의 제국호텔을 짓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에도 나고야에 있는 메이지무라(明治村)라는 야외박물관에 그 주요 부분이 복원·전시되고 있다.
불행히도 시카고학파의 건물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남아 있다 해도 강가에 있지 못하지만, 미국적 고전의 기분은 아직도 살아 있다. 1920년대는 시카고가 유례없는 번영을 누린 시기로, 지금도 남아 있는 당시 건물들 중 예컨대 트리뷴타워(1925년)는 260개의 국제응모를 통해 지은 ‘시카고 트리뷴’지 본사 건물로서 그 시대를 대표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사무실 건물’이어야 한다는 건축주(Colonel Robert McCormick)의 꿈을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시켜준 이 건물은 네오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당시로서는 가장 높은 463피트의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Raymond Hood/ John Howeks 설계팀). 1925년에 완성된 이 건물은 강철과 내화 콘크리트를 주조로 외장은 회색 인디아나 석회암으로 마감했다. 소요철강 9천 톤, 석재 1만 2천 톤으로 8백 50만 달러가 소요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34층의 건물 꼭대기에는 첨탑이 세워져 중세를 연상케 하는 한편, 건물에 새겨진 각종 상징들은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아이러니컬하기도 한 저널리즘의 성격을 투영하기도 한다. 카메라를 움켜쥐고 있는 부엉이가 그 한 예가 된다.
예술과 자연이 숨쉬는 문화도시
이 건물에서 보여지듯 건축가와 건축주가 아직 역사적 양식들에 매달려 있긴 했지만, 독일의 바우하우스나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이라는 시대 조류는 막을 도리가 없게 되었으니, 장식이라는 두꺼운 양탄자 밑에서 젊은 건축가들은 더이상 참을성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른바 아르 데코(Art Deco) 양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30년에 지어진 시빅 오페라 빌딩(Graham, Anderson, Probst & White 설계)은 안락의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다목적 건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임대 사무실들과 함께 극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극장 안에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엘리트용 개인 박스가 하나도 없어 시카고의 민주주의적 자아상을 반영했다고 일컬어진다.
1938년에 독일 바우하우스 대표였던 모더니스트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그의 고향을 등지고 시카고에 왔을 때, 모더니스트 마천루의 발전은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그로부터 제2의 시카고학파가 시작된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오랫동안 산업과 예술의 결혼을 추구해왔던 바, 미스는 골격, 피부, 그리고 내장 등 벌거벗은 본질 등에 이르기까지 건축을 벗겨내는 데 관심을 보여왔다.
미국에서 미스는 기술공학의 도움으로 유리와 철로 건축된 탑을 세우고자 하는 그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의 영향은 즉각적이었다. 건축가들은 미스의 마천루가 순수하고 가볍다고 보았다. 그의 호수북로(860/880 North Lake Shore Drive) 아파트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건물들은 고전적인 비율, 표면에 반사되는 빛의 복합적인 놀이, 그리고 장식이 그야말로 전혀 없는 외부들로 특징을 이루었다. 미스의 제자들은 전후 미국의 기업건물들을 설계하는 다산적인 디자이너들로 인정받게 되는데, 오늘날 SOM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디자이너들(Skidmore, Owings & Merrill)은 대형 프로젝트들에 모더니즘의 철학을 적용시키면서 미스의 ‘덜 한 것이 더 많다’를 다니엘 번햄의 ‘어떤 계획도 세우지 말라’와 결합시켰다.
1974년에 완성된 시어스 타워(Sears Tower, 110층)는 쿠알라룸푸르에 페트로나스 건물 이전 1996년까지는 세계 최고의 건물로써, 알루미늄과 청동도금의 유리로 마감된 외관은 시카고의 악명 높은 바람에 맞서는 강건함을 잘 살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이런 방식을 따른 것은 아니다.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미스에게 배운 골드버그(Bertrand Goldberg)는 도시에서 바비큐를 위한 발코니들이 유리 표면들의 조명놀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중심이 되어 설계한 쌍둥이 마리나 시티(1967년)는 그 옆의 IBM빌딩(1971, 미스 반 데 로에)의 마지막 마천루와 함께 모더니즘의 한결 더 의미있는 ‘대화’를 대표한다. IBM건물이 강철, 반사하는 유리, 그리고 검은 그림자의 섬세한 효과를 예시한다면, 골드버그는 삶, 일, 그리고 먹고 놀기를 위한 시설들(극장, 볼링장 등)을 갖춘 복합건물을 시도하면서 이런 기능들을 분리시키는 영향에 대해 저항했던 것이다. 그는 “나는 사람들이 이미 심리적으로 참으로 슬럼화된 상자들을 벗어나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1980년대에는 모더니스트들에 대한 저항이 힘있게 가동되었는데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해 과거를 탐색해왔다. 예컨대 해리 위스(Harry Weese)는 일종의 성상숭배 반대자로서, 횡행하는 경향들에 대해 저항하는 건축가였다. 그가 건축한 리어 코티지(1988년)가 그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산업지구였던 강가에 주택 내지 거주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을 때, 그는 잊혀졌던 가치에 우선권을 부여함으로써 도시 르네상스의 중심을 이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해군부두(Navy Pier)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현재로는 극장을 비롯한 문화·오락시설들로 가득 찬 호안지역이라든지, 도심 한복판에 있는 미술관에 잇대어 새롭게 마련된 야외음악당은 시카고가 단순히 마천루로 빼곡하게 채워진 인공도시가 아니라, 예술과 자연이 숨쉬고 있는 문화도시임을 웅변해준다. 모르긴 해도 호숫가의 이 너른 땅에 야외음악당을 짓기로 했을 때, 많은 부동산업자들이 몹시 실망했을 수도 있지만, 그곳은 문자 그대로 도심의 오아시스로서 건축도시 시카고의 인간주의적 가치 지향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1938년에 독일 바우하우스 대표였던 모더니스트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그의 고향을 등지고 시카고에 왔을 때, 모더니스트 마천루의 발전은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그로부터 제2의 시카고학파가 시작된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오랫동안 산업과 예술의 결혼을 추구해왔던 바, 미스는 골격, 피부, 그리고 내장 등 벌거벗은 본질 등에 이르기까지 건축을 벗겨내는 데 관심을 보여왔다.
미국에서 미스는 기술공학의 도움으로 유리와 철로 건축된 탑을 세우고자 하는 그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의 영향은 즉각적이었다. 건축가들은 미스의 마천루가 순수하고 가볍다고 보았다. 그의 호수북로(860/880 North Lake Shore Drive) 아파트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건물들은 고전적인 비율, 표면에 반사되는 빛의 복합적인 놀이, 그리고 장식이 그야말로 전혀 없는 외부들로 특징을 이루었다. 미스의 제자들은 전후 미국의 기업건물들을 설계하는 다산적인 디자이너들로 인정받게 되는데, 오늘날 SOM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디자이너들(Skidmore, Owings & Merrill)은 대형 프로젝트들에 모더니즘의 철학을 적용시키면서 미스의 ‘덜 한 것이 더 많다’를 다니엘 번햄의 ‘어떤 계획도 세우지 말라’와 결합시켰다.
1974년에 완성된 시어스 타워(Sears Tower, 110층)는 쿠알라룸푸르에 페트로나스 건물 이전 1996년까지는 세계 최고의 건물로써, 알루미늄과 청동도금의 유리로 마감된 외관은 시카고의 악명 높은 바람에 맞서는 강건함을 잘 살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이런 방식을 따른 것은 아니다.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미스에게 배운 골드버그(Bertrand Goldberg)는 도시에서 바비큐를 위한 발코니들이 유리 표면들의 조명놀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중심이 되어 설계한 쌍둥이 마리나 시티(1967년)는 그 옆의 IBM빌딩(1971, 미스 반 데 로에)의 마지막 마천루와 함께 모더니즘의 한결 더 의미있는 ‘대화’를 대표한다. IBM건물이 강철, 반사하는 유리, 그리고 검은 그림자의 섬세한 효과를 예시한다면, 골드버그는 삶, 일, 그리고 먹고 놀기를 위한 시설들(극장, 볼링장 등)을 갖춘 복합건물을 시도하면서 이런 기능들을 분리시키는 영향에 대해 저항했던 것이다. 그는 “나는 사람들이 이미 심리적으로 참으로 슬럼화된 상자들을 벗어나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1980년대에는 모더니스트들에 대한 저항이 힘있게 가동되었는데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해 과거를 탐색해왔다. 예컨대 해리 위스(Harry Weese)는 일종의 성상숭배 반대자로서, 횡행하는 경향들에 대해 저항하는 건축가였다. 그가 건축한 리어 코티지(1988년)가 그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산업지구였던 강가에 주택 내지 거주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을 때, 그는 잊혀졌던 가치에 우선권을 부여함으로써 도시 르네상스의 중심을 이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해군부두(Navy Pier)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현재로는 극장을 비롯한 문화·오락시설들로 가득 찬 호안지역이라든지, 도심 한복판에 있는 미술관에 잇대어 새롭게 마련된 야외음악당은 시카고가 단순히 마천루로 빼곡하게 채워진 인공도시가 아니라, 예술과 자연이 숨쉬고 있는 문화도시임을 웅변해준다. 모르긴 해도 호숫가의 이 너른 땅에 야외음악당을 짓기로 했을 때, 많은 부동산업자들이 몹시 실망했을 수도 있지만, 그곳은 문자 그대로 도심의 오아시스로서 건축도시 시카고의 인간주의적 가치 지향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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