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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박물관의 힘, 지역 활성화를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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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627회 작성일 10-10-08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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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록문화… 지역의 문화 기반 역할에 기여
일본에는 개인적인 수준에서나 집단의 수준에서 기록을 중요시하는 전통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일본의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잘 기록하고 쓰던 것을 잘 보관 또는 보존하려는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전통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의 문화 특성으로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은 그것이 민간에서 생존전략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사실 일본인의 생활환경은 역사적으로 봐서 그리 유유자적한 것만은 아니었다. 지진과 태풍의 위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일본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뚜렷하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평야가 비교적 적은 대신 가파른 산이 많은 자연환경과 함께 단시간에 많은 비로 계곡을 흘러내리는 급류가 많은 점도 사람들을 괴롭힌다. 이런 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일본적인 생활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과정에서 ‘집단’의 단합을 중요시하고, 생활 과정에서 경험한 시행착오들을 기록으로 남겨 과거의 실패를 가능한 한 더 이상 반복하지 않으면서 현실에서 부닥치는 어려운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려는 데서 일본의 기록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기록문화는 분명히 말해서 일본인들의 생존전략의 하나였다.
이런 기록문화와 함께 일본인들의 물건(物, mono)에 대한 애착은 유별나다. 즉 물건은 단순한 유형의 물적 대상만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 또는 사용하는 사람의 혼(魂)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관념이 뚜렷하여, 일본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나 쓰던 물건을 쉽게 버리는 일을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통신사’에 관한 영상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던 한 영화제작자가 처음 기획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은 풍부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어서 제작 과정에서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조선통신사 관련 연구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이 거쳐간 지역마다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일본인들은 철저히 보관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즉 통신사 사람이 묵고 가면서 써준 글씨나 그려준 그림을 집안의 가보로 간직하고 있는 등 통신사가 거쳐간 곳이면 어디서나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는 일본인들의 기록문화의 전통과 물건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런 문화적인 전통은 일본의 어디를 가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형식의 기록보관소(archives)와 박물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이나 가정, 또는 가업 단위는 물론이고 지역사회 단위에서도 과거의 기록을 철저히 보관하고 유물들을 잘 보관하려는 문화적인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전통은 가업을 대대로 이어나가고, 기술 발전 및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문화적인 기반이 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렇듯 일본문화에서는 ‘아카이브’의 개념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전국 어디를 가나 자료관, 기념관, 박물관, 사료관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서 보존하고, 시행착오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일본적인 문화 특성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문화시설들은 더러는 설립 주체에게는 자긍심을 심어주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지역사회의 거울로서 또는 바깥사람들에게 관심을 끌면서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게 되어 결과적으로 지역산업의 진흥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는 문화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지역문화와 지역 활성화
일본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봉건체제를 거치면서 지방자치의 전통이 뿌리를 깊이 내렸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의 전통이 강하게 뿌리를 내린 한국의 경우와는 좋은 대조가 된다. 비록 메이지 유신과 함께 현재와 같은 중앙집권체제로 통합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역사적으로 번(藩)을 단위로 하여 수많은 작은 나라(小國)들이 서로 경쟁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왔던 봉건 시대의 흔적은 일본문화에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현대에 와서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뚜렷한 경향 중의 하나로 우리는 흔히 중앙집중화(centralization)에서 분산화(decentralization)로의 전환을 손꼽는다. 중앙집권체제의 효율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거대한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에 필수적인 관료주의의 폐해는 현대문명이 치러야 할 값비싼 대가였다. 이제 현대의 문명사회에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The small is beautiful!)”는 슬로건이 점점 더 힘을 얻을 정도로 ‘지역분산’, ‘지방분권’, ‘지방자치제’는 자연스런 변화의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인구의 도시집중, 농촌 인구의 과소화(過疏化) 및 노령화, 지역 간 현저한 경제적 격차 등 현대사회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제 지역을 살려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강하게 대두되었고, 이 시기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역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을 강구하려는 움직임이 일본 사회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점차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 농촌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일본 전역에서 지역 활성화, 지역 진흥화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각종 지역 발전 프로그램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중앙정부는 마치(町) 레벨의 지역사회 단위로 각기 1억 엔 정도의 이른바 ‘지역창생’ 기금을 지원하면서 전국적으로 지역 활성화 운동을 장려하였다. ‘무라오코시’, ‘마치츠꾸리’ 등의 이름을 내걸고 전개된 지역 활성화 운동의 거센 물결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수준을 한 단계 높여서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으로 전환되는 등 ‘지역문화’를 꽃피우려는 노력은 이 시기 일본 사회의 거대한 흐름이었다.
이런 지역 사회 발전 프로젝트들은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즉 지역이 위치하고 있는 자연 및 사회적 환경에 알맞게, 또 지역이 가지고 있는 각종의 사회문화적인 자원을 총동원하면서 지역주민들의 자긍심을 촉발시킬 뿐만 아니라 외부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서 결국 지역산업을 진흥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의 무한경쟁 시대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물론 지역사회의 역사 및 문화적인 자원에 바탕을 둔 박물관들도 지역 활성화를 위한 프로젝트의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교토(京都)와 같은 일본을 대표할 만한 중요한 역사 도시의 문화유산만의 일이 아니다.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문화시설들이 해당 지역사회를 상징하는 얼굴만이 아니라, 지역산업의 활성화를 위한 문화산업의 기반으로 활용되고 있는 사례를 일본에서는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902.jpg 박물관 중심의 지역 활성화 사업으로 간주될 만한 적절한 사례로, 여기서는 일본의 시가현(滋賀縣) 오미(近江) 지역(지도 참조)의 ‘상인박물관군(群)’에 주목하고자 한다. 한 지역사회에 수많은 문화시설들이 있지만 그 대부분이 그 지역이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단 한 가지 상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미 지역 사례는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유사한 문화산업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오미상인 발상지와 오미 고카쇼의 상인문화 현장
일본의 시가 현은 교토와 나고야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나고야 방향으로 교토를 막 벗어나면 시가 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호수 비와코(琵琶湖)가 있다. 이 호수의 주변지역이 옛날에는 ‘오미(近江)’라고 불렸는데, 이 명칭은 6, 7세기의 초기 한일관계사에서도 빈번하게 거론될 정도로 아마도 고대 한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지역인 것 같다. 사실상 이 지역에는 ‘백제사(百濟寺)’라는 사찰도 있는 바, 그것은 단지 우연히 붙여진 사찰 명칭이 아니라 고대 한국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있어서 한국인의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이 지역은 일본의 근대 상업의 기초를 다지는 데에 중요하게 기여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오미상인(近江商人)’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이 오미상인은 비와코 호수의 서쪽 타카시마(高島)에도 약간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호수의 동쪽에 위치한 하치만(八幡), 히노(日野), 그리고 고카쇼(五個莊)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오미상인’이라면 크게는 ‘타카시마상인’, ‘하치만상인’, ‘히노상인’, 그리고 ‘고카쇼상인’ 등 네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지만 수적으로는 ‘고카쇼상인’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오미(近江) 상인이란 비와코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넓은 지역 출신의 상인들이지만, 그 대부분은 호수의 동쪽에 위치한 오미하치만(近江八幡), 히노(日野), 그리고 고카쇼(五個莊) 사람들이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이 세 그룹 중에서도 고카쇼가 가장 많은 상인들을 배출했다고 한다. 다른 인근 지역의 오미상인 그룹에 비한다면 좀 더 늦게 이 분야로 뛰어들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1700년대 초에 이미 상당한 기반을 잡아 막부 시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근세에 이르기까지 활약한 상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오미 지역의 특산물을 매입해서 간사이뿐만 아니라 간토와 같은 먼 곳까지 가져가서 팔았고, 또 그 지방들에서 매입한 직조물이나 생사 같은 품목들을 나고야, 교토, 오미, 오사카 등지로 운반해 와서 파는 등의 끈질긴 상업행위를 단련해 나갔다. 그 중에는 오미를 출발해서 멀리 남쪽 끝 가고시마의 사츠마까지 옷감이나 생활용품 등을 어깨에 메고 행상행위를 했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굳건한 사업정신을 엿볼 수 있다.
고카쇼마치(五個莊町)는 최근 일본 전국을 휩쓴 행정단위 합병의 물결에 따라서 인근의 다른 타운들, 즉 구 요카이치(八日市), 永源寺町, 愛東町, 湖東町 등을 포함하는 다섯 개의 타운이 2005년 초(2월11일)에 합병되어 東近江市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현재의 인구는 이렇게 합쳐도 7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 중 愛東町에는 고대의 한일관계를 말해주는 百濟寺(Hyakusaiji)도 있고, 고카쇼마치 출신들이 식민지 조선에 진출하여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 체인을 설립하여 운영한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한국인 방문자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1903.jpg 고카쇼의 행정부는 오미상인 문화를 바깥 세계에 내세울 만한 가장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간주하여 지역 활성화 사업을 추진해 온 것 같다. 과거 이 타운이 배출해낸 인재들은 거의 모두 도시로 진출해서 일본의 근대경제를 주름 잡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었지만 이제 고카쇼 마치는 한적한 농촌마을에 불과했다. 또한 고카쇼상인들이 축적한 부는 더 이상 고향마을에 남아 있지 않았다. 고카쇼마치는 과거의 상인문화가 남긴 유산을 수습하여 이를 기반으로 수많은 자료관 및 박물관의 형식으로 담았다. 과거 이 타운 출신의 호상(豪商)들이 남긴 대저택과 유물들은 모두 지역 활성화 사업을 위한 귀중한 자원이었다. 또한 새로운 박물관들을 신축하여 상인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전시장들을 꾸몄다.
고카쇼의 거리는 여느 관광지의 복잡하고도 많은 인파로 분비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마을에는 모두 전통적인 일본식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길가를 따라 흘러내리는 개울에는 어른 팔뚝만 한 크기의 비단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타운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자료관, 박물관 등은 모두 한결같이 ‘오미상인 문화’를 테마로 조직되어 있다.

부의 축적, 고향의 문화시설 조성으로 환원
오미상인들은 기본적으로 천칭(天秤, 텐빈), 즉 양쪽에 짐을 매단 막대기를 어깨에 메고 평행상을 다니는 장사꾼들로, 지방의 산지 곳곳을 다니면서 물건을 구입해서 수요자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다니면서 판매하는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사진 참조). 행상인들의 이런 모습에서 ‘텐빈’을 어깨에 멘 행상인은 오미상인들의 상징이 되었다. 이들의 상업행위의 반경은 오미와 그 인근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거의 전국적이었고, 점차 부를 축적하면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도시에 거점 가게를 내거나 백화점과 같은 거대한 유통업체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등의 일본의 근대경제를 리드할 만한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904.jpg 오미상인들의 경영상 특징으로는 각종의 옷감, 칠기, 화장품이나 장신구 등의 여성 일용품, 각종 약품류 등 다종다양한 품목을 메고 다니면서 행상행위를 하였고, 점차로 전국 각지에 지점을 내어 유통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등의 경영혁신을 통하여 근대 일본의 상업의 기초를 다졌다는 점이 널리 지적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상업뿐만 아니라 금융업, 제조업, 어업 등 다방면으로 업종을 넓혀나갔고, 기업의 경영형태나 회계장부의 처리에서 나타나는 합리적인 경영방식, 그리고 근면, 정직, 자립정신 등 그들의 성공적인 경영활동을 뒷받침한 생활태도와 정신문화의 특성은 오미상인을 일본의 기업경영사에서 영원히 빛을 발하는 위치에로 올려놓았다.
이 오미상인들이 일본의 기업사에 남긴 족적은 단지 몇 개의 사례만 들어봐도 그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현대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군에 속하는 무역업계의 Itochu(伊藤忠商事), Marubeni(丸紅), Tomen, 백화점 업계의 Takashimaya(高島屋), Daimaru(大丸), Seibu(西武), 방직업계의 Nisshinbo(日淸紡)와 Toyobo(東洋紡), 그리고 기타 분야에서 Nihon Seimei(日本生命), Yanmar Diesel과 Seibu(西武)그룹이 모두 오미상인 출신이라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오미상인들은 걸어서 행상을 하면서 판로를 넓혀나갔고, 상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상황이나 지역에 따른 가격차 등에 관한 정보를 가능한 대로 빨리 수집하여 지혜로운 상업행위를 해나가면서 부를 쌓아나갔다. 어떤 점에서는 이들은 생계유지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농촌사회를 시장경제의 자본주의 체제로 끌어들이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상업 노하우와 자본이 축적되면서 도시로 진출해 점포나 지점을 내는 등의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고 하는 바, 특히 에도(江戶, 도쿄)의 니혼바시(日本橋), 오사카의 혼마치(本町), 그리고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는 오미상인들이 집중적으로 유통사업을 벌린 곳으로 그 흔적은 아직까지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들은 도시로 진출해서 돈을 벌었고, 그 돈 중의 일부는 고향 오미로 가져와 대저택을 짓거나, 문화시설 및 각종의 문화사업을 벌리는 일에 각 가문이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렇듯 오미의 고향마을은 도시로 나간 오미상인들의 정신적인 기둥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인들은 고향마을에 남아서 자녀들을 장차 경영일선의 튼튼한 재목으로 키우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오미에는 가정교육을 위한 지침서를 포함해서 교육 분야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혁신적인 방식들이 일본의 교육계에서 주목을 끌었는데, 이 모두가 오미상인들의 실천적인 생활방식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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