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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작품 같은 극장 반세기_프랑스 파리 위셰트 소극장 <대머리 여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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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405회 작성일 10-10-07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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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실패 후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후로부터 52년이 지났다. 여전히 <대머리 여가수>와 <수업>은 위셰트 극장의 간판 작품,효자 연극으로 공연계의 독특한 랜드마크이자 문화상품이 되어 매일 밤 공연 일지를 고쳐 쓰고 있다. 프랑스문화의 저력과 수준, 독특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연중 위셰트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의 열기와 호응이 웅변 으로 증거해 주고 있다.

냉 소 속 에 탄 생 된 부 조 리 극
1950년 봄, 당시 스물네 살의 니콜라 바타이유는 프랑스 파리 소극장 녹탕뷜에서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전혀 새로운 연극 연출에 몰두하 고 있었다. 이름도 생소한 루마니아 출신 극작가 으젠 이오네스코(1912~1994)의 첫 작품 <대머리 여가수>가 그것이었다. ‘반연극(反演劇)’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오랜 세월 관객에게 익숙했던 사건 전개나 인물 성격 분석 위주의 전통극, 부르주아극, 문학극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도발 그 자체였다.
니콜라 바타이유는 연습을 끝내고서도 자금이 부족하여 친분이 있던 영화감독 클로드 오탕라라로부터 영화에 썼던 의상을 빌려왔고, 바타이유를 비롯한 배우, 스태프들은 생 미셸 대로에서 포스터를 등에 짊어지고 ‘샌드위치맨’으로 홍보에 나서는 등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미적 쾌감과 익숙함, 카타르시스 대신에 생소함과 나아가 고통을 주는 연극을 본 관객들의 황당함은 모욕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썰렁한 객석에서는 야유가 터져나왔고 평론가들은 ‘반연극’이라는 개념 자체에 반감을 표하면서 혹평과 무시로 일관하였다. 몇몇 비평가들이 이오네스코 연극의 새로움과 전후 시대 상황 인식과의 연결성을 눈여겨보았지만 대세를 돌리기는 어려웠다.
공연평론가들에게서는 배척을 받았으나 앙드레브르통, 레몽 크노, 알베르 카뮈 같은 저명 문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흡사 19세기 초반 빅토르 위고가 쓴 <에르나니> 공연에서 고전파와 낭만파가 격렬히 대 립함으로써 낭만문학의 도래가 확정되었던 것처럼 1950년대 초반 부조리극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1950년 5월 11일 시작된 <대머리 여가수>는 바로 그 다음 달 황망히 막을 내림으로써 총 25회 단명 공연으로 끝나 게 되었다. 이듬해 포슈 극장에서 마르셀 퀴블리에가 이오네스코의 두 번째 작품 <수업>을 올렸다. 이 역시 조금 낫기는 했지만 흥행 실패는 반복되었다.
<대머리 여가수>와 <수업> 두 편이 위셰트 극장에 서 동시공연되었으나 여섯 달이 못 가 끝났다.

5 2 년 간 고 쳐 쓰 는 공 연 일 지 … 세계 공연사 새로 쓰다
그로부터 7년 후, 1957년 2월 위셰트 극장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수년간 지리멸렬해 있던 <대머리 여가수> 공연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연극 전문가와 예술을 애호, 음미하는 사람들로부터 유행을 좇는 속물 그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객 동원 성공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사람들의 예술 감각과 취향이 그토록 변화된 것일까, ‘소통의 부재’라는 현대의 화두가 벌써 설득력을 얻었던 것일까. 이 현상은 이오네스코를 하나의 유행(mode)에 합류시킬 수 있었다. 에디트 피아프, 소피아 로렌, 모리스 슈발리에 같은 인기인들의 위셰 트 극장 방문과 더불어 평론가들의 논조도 바뀌었다.
“이 작품의 우주적인 힘, 심오한 시적(詩的) 요소는 놀랄 만한 것이다.”(1957년 2월 20일, <르 파리지앵 리베레>의 조르주 레르미니에 평)
그로부터 52년이 지났다. 그 사이 1만6,000여 회의 공연을 기록하며 지금도 여전히 <대머리 여가수>와 <수업>은 위셰트 극장의 간판 작품, 효자 연극으로 공연계의 독특한 랜드마크이자 문화상품이 되어 파리 골목 한편에서 숨은 듯이, 그러나 당당하게 매일 밤 공연 일지를 고쳐 쓰고 있다. 어느 사이 프랑스문화의 저력과 수준, 독특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무대 위에서의 행동이나 논리성, 심리적 관심 등을 일체 배제한 채 언어 질서와 상황 사이에 존재하는 어긋남, 뒤틀림, 차이를 절묘하게 형상화시킨 <대머리 여가수>에서는 제목과는 다르게 실상 어떤 대머리도, 여가수도 등장하지 않는다. 제목부터 부조리하다. 저녁나절 프 티 부르주아 계층 두 커플의 평범하지만 결코 녹록지 않은 일상을 그려내는 단순한 상황 설정, 그리고 그 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종잡을 수 없는 대화 전개는 하녀와 소방관의 도착으로 잠시 중단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연 시간 내내 이어진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쏟 아내지만 결국 이것은 의사소통과 상호 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뿐더러 인간 세계의 단절을 더욱 깊게 만드는 데 소용될 따름이라는 것을 작가는 암시한다. 오늘 우리가 체험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의사소통의 어려움, 삶의 부조리함을 이미 50여 년 앞당겨 희화화(戱畵化)한 이오네스코 연극의 선 구성은 연중 위셰트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의 열기와 호응이 웅변으로 증거해 주고있다.

전 통 과 신 감 각 조 화 에 도 적 극 적
파리 위셰트가(街) 23번지. 소르본 근처 대학가의 이른바 먹자골목 한구석 좁은 도로변에 위치한 위셰트 소극장은, 예나 지금이나 허름한 외관과 표 나지 않는 간판으로 찾기가 수월치 않다. 파리권(圈)에 위치한 200여 개의 크고 작은 공연장 가운데서도 비교적 영세한 규모로 좌석 95석을 갖춘 전형적인 소극장이다. 파리에는 2,700명을 수용하는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에서부터 단 35석의 판도라 극장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공연공간이 연중 다양한 레퍼토리로 관객을 끌어모은다. 12개의 국립공연장, 24개 카페 테아트르 그리고 2개의 샹송클럽, 51개 디너쇼 공연장을 제외한 파리 시내 연극 공연장 중 공연정보지 <파리 스코프>에 좌석 규모를 명시한 곳은 56곳. 이 중 40% 정도가 좌석 수 200석 이하 규모이다.
위셰트 극장의 경우 95석 규모지만 장애인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같은 날 여러 편을 관람하거나 특정계층과 조건, 특정 요일, 시간대에는 할인혜택이 다양하다. 정규 관람료는 19.5유로. 이즈음 유로화 강세로 한화로는 약 3만6,000원에 이른다. 콤비 공연작품 <대머리 여가수>와 <수업>을 함께 관람하면 30유로지만 역시 <대머리 여가수>에 관심이 더 모아진다. 파리 시내 사립극장연합회와 파리 시청이 함께 추진하는 연극 보급 캠페인도 흥행에 한몫 거든다.
1957년 이래 반세기가 넘도록 같은 극장에서 쉼 없이 공연되고 있는 <대머리 여가수> 성공의 주역은 뭐니뭐니 해도 공연 초기부터 연출과 마틴씨 역을 맡은 니콜라 바타이유. 몇 달 전인 2008년 10월 28일 파리 자택에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위셰트 극장 무대에 배인 그의 땀방울은 58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무게 속에서 아름다운 결정체로 빛난다. 나치 점령하에서 영화로 데뷔한 바타이유는 영화와 연극무대를 넘나들면서 장 콕토, 자크 프레베르, 보리스 비앙 같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특히 일본문화에 심취하여 빈번한 무 대 교류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연기자가 되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무르익은 연기로 마틴씨 역할에 충실하면서 끊임없는 이야기 속에 가중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50~70대에 이르는 노련한 위셰트 극장 동료 배우들과의 오랜 연조가 빚어낸 기막힌 호흡으로 펼쳐 보였다.
 이들 중 일부는 이미 1980년에 안정적 공연을 위하여 극장을 주식회사로 전환시킨 주역들도 있고, 산 증인 조르주 바타이유는 이제 세상을 떠났다. 앞으로도 배우나 스태프들은 계속 바뀌겠지만 50여 년 이상 같은 무대에 쌓여온 전통과 기량, 노하우는 나날이 두꺼워지고 새로워 질 것이다. 이 두 작품 이외에 다른 이오네스코 작품도 무대에 올리고 어린이 대상 공연, 독특한 외국작품 번역극 등으로 위셰트 극장은 전통의 심화와 끊임없는 실험정신의 모색, 즉 전통과 신감각의 조화라는 쉽지 않은 시도에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9년 한국일보사 강당에서 첫 공연을 가진 번역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올해로 꼭 40주년을 맞는다. 출연진의 잦은 변동과 안정적이지 못했던 공연장 여건 등은 연출가 임영웅 선생의 혼신의 열정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아쉬움을 남게 한다. <난타>가 10여 년을 넘어 이어가고 있지만 지속적인 업그레이드와 외국인 관객 편중 해소가 과제로 남아 있다.

미로 속 빛나는 작은 공연장 가능케 하는 파리 시 문화 감각
역사에 빛나는 가르니에 오페라, 현대식 첨단시설의 바스티유 오페라, 수세기 동안 고전극 공연 전통을 지켜온 코메디 프랑세즈 같은 명문 문화공간이 즐비한 파리에서 100석이 채 안되는 위셰트 소극장이 이룩한 <대머리 여가수> 공연 52년의 기록은 생각할수록 대단해 보인다. 그 러나 위셰트 극장은 여전히 케밥과 꼬치구이 냄새 속에서, 특히 북 아프리카계 식당의 호객행위가 유난히 요란스러운 소르본 먹자골목 한쪽에 숨은 듯 자리 잡고 있다. 상당한 유명세를 타야 마땅할 문화 명소임에도 이름은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다. 그러나 눈발이 흩날리는 음산 한 겨울 날씨에도 빈자리가 거의 없이 소극장을 꽉 채운 여러 계층의 관객들이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함께 웃고 호응할 때 비좁은 소극장은 더없이 크고 튼실해 보였다. 열기는 뜨거웠다.
미로를 더듬어 파리 뒷골목 소극장을 찾아 적지 않은 관람료를 선뜻 지불하며 연극을 즐기는 관객, 치밀하고 과학적인 편집으로 공연을 위시한 여러 분야의 문화예술 생활정보를 40상팀이라는 염가로 보급하는 주간지 <파리 스코프> 등의 공연정보지, 그리고 행정·재정적으로 영세한 소규모 극장을 지원하는 파리 시의 문화 감각 등이 소극장 운영에 선순환 구조로 맞물리면서 프랑스 문화의 실핏줄, 공연예술의 풀뿌리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공원 벤치에서 공연정보지나 신문을 뒤적이며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고전극, 낭만극, 보드빌극, 전위극, 익살소극, 외국작품 번안극, 모노드라마 등 다양한 공연을 고르고 있는 연극 애호가들의 눈에는 위셰트 극장의 몇 줄짜리 조그만 광고가 컬러 전면광고보다 훨씬 더 크게 눈에 띄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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