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라는 이름의 전통 재창조_베트남 체제 변화와 전통의례 > 이색도시 문화탐방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이색도시 문화탐방


 

근대화라는 이름의 전통 재창조_베트남 체제 변화와 전통의례

페이지 정보

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278회 작성일 10-10-09 00:12

본문

1954년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완전히 해방된 뒤 사회주의국가 베트남은 축제와 민속의례를 낡은 봉건체제의 미신이자 낭비적인 유산으로 간주해 금지했다. 1957년 당 기관지 <년 전>(Nhan Dan)은 농촌의 축제는 형식이나 내용에서 봉건시대에 기원한 것으로서 부패한 관습을 영속시킨다고 경고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 어디에서나 민간신앙 의식과 행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거리 곳곳에 민족의 문화유산을 보존하자는 내용의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서점마다 ‘베트남 전통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출판물이 진열되어 있는데, 어느 책이나 민속의례를 민족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는 공동체적 문화활동으로 다루고 있다.

매일 보는 전통의례
베트남에는 전통의례나 축제, 순례 등의 행사들이 넘쳐난다. 불교와 민간신앙의 여러 성소와 가정에서 이러한 행사가 매월 혹은 매일 주기적으로 열린다. 소규모 촌락의 공동의례, 지역 간 순례의례, 광역이나 전국 규모의 축제나 기념일 행사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와 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가령, 마을 고유의 수호신 신앙과 관련한 공동의례는 2000년 하노이 시에서만 113건이 열렸고, 2005년에는 150여 건으로 늘어났다. 전국적으로 중앙정부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 행사가 해마다 약 30건씩 늘어나고 있다. 현지 사람들과 벗하며 베트남에 체류하면 거의 매일 ‘전통의례’를 관찰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 어디에서나 민간신앙의 성소나 의례행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으며, 그 규모도 커지고 있다. 마을 단위의 의례에도 수천 명이 모여들고, 후미진 동네에 있는 조그만 사찰에도 매월 초하루나 보름이면 수백 명은 족히 방문한다. ‘추아흐엉’(Chua Huong)과 같이 북부 베트남의 오래된 사찰이나 최근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남부 베트남의 일부 사찰은 연간 수백만 명이 의례를 위해 찾는다. 음력 설(Tet)에서 정월 보름 사이의 신년의례 기간에만 1백만 명 이상이 모이기도 한다.
사업 성공을 보장하는 의례가 열리는 박닌(Bacninh) 성의 ‘바추아코’(Ba Chua Kho)처럼, 최근 사회·경제적 변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의례가 번성하고 있다. 바추아코는 음력 신년 초에 성공을 보장하는 부적 같은 구실을 하는 상징적인 사업자금을 빌려주는 사찰이다. 자금을 대출받은 사람은 연말에 다시 이곳을 찾아 일 년의 사업 결과를 보고하는 의식을 치른다. 사람들은 실제 사업에 실패했더라도 빌린 자금을 일단 갚고 다시 대출해야 다음 해의 성공이 보장된다고 믿는다. 이 시기에는 자금 대출과 관련한 의식뿐 아니라 갖가지 지역축제와 다채로운 행사가 벌어지고, 방방곡곡에서 엄청난 손님들을 불러 모은다. 필자는 몇 년 전 정월 이곳을 방문했다가 인파에 묻혀 종일토록 떠밀려 다녀야 했다.
사람들은 주로 개인적인 복을 빌기 위해 의례에 참가하며, 불확실한 미래의 복지를 위해 제물을 놓고 복합적인 상징적 세계와 협상을 벌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들은 흔히 점쟁이나 사제에게 자문한다. 어디서나 특정의 목표에 효과 있는 신력(神力)으로 유명해진 성소에 관한 소문이 무성하다. 자기 마을의 수호신을 위한 의례나 단골 사당에서 기도하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사람들은 절기에 따라 여러 지역의 유명 사찰이나 사원으로 의례를 위해 원정을 가거나 순례를 떠난다. 이렇게 수많은 의례객을 끌어 모으는 유명한 사원이나 사찰마다 대표적인 신성들이 있다.
영매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의 능력은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정도에 따라 입증된다. 이러한 신성은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사업의 성공·부의 축적·치병과 건강·사랑의 결실과 혼인·출산·가정의 화목·시험 합격·미래 예언 등이 주요 항목이다.



의례가 베트남 경제 살린다
의례의 과정에는 엄숙한 절차에 따라 수행하는 종교의식뿐 아니라 한마당 축제와 놀이가 곁들여진다. 행사 내내 다양한 노랫가락이 흐르고 닭싸움, 장기 등의 투전판·놀이판이 벌어진다. 지역에 따라 특유한 민속음악이 소개되고, 국영 인민 예술인 조직에서 파견된 ‘우수 예술인’(Nghe Si Uu tu)은 민요나 창극 공연을 펼친다. 지역에 따라서는 노래나 무용 경연대회, 미인 선발대회, 곡마단의 마술공연 등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나 영성(spirituality)과 무관한 행사들도 같이 열린다.
사람들은 민간신앙 활동을 통해 자본주의적 욕망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흔히 “경기가 좋으니 의례를 크게 연다”고 하고, 동시에 “의례가 경제를 살린다”고 기대한다. 마을마다 수호신이나 역사적 영웅을 숭배하는 유적에서 공동의례와 축제를 크게 열고자 하는 것은 의례 활성화가 소득 증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의례는 시장을 활성화하고, 규모가 클수록 소득도 증가한다. 유명한 성소가 있는 지역 주민들은 정부가 마을을 관광지로 개발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종교적 의식이나 행사로 지출되는 비용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큰 사원에서부터 방황하는 영혼과 잡신을 달래기 위한 작은 제단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공간을 개축하고 보수하는 일에도 많은 비용을 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신앙과 의례를 실천하는 양상이 다양해짐에 따라 새로운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의례용품 판매상, 이동식당, 잡화상, 행상, 사진사, 짐꾼과 운전사, 안내인, 호텔 직원에게 유적은 곧 시장이다. 의례물품의 생산과 판매는 하나의 거대한 사업이 되고 있다. 여러 종류의 사업체가 모조지폐 제물에서 부적이나 주술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례용품을 다룬다. 성소들 인근에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각종 상업시설이 들어선다. 지역에 따라서는 성소 주변에 가라오케, 도박장, 식당, 카페, 술집에 매음굴까지 각종의 유흥장과 음식점이 늘어선다.
베트남에서 보이는 의례의 상품화 과정은 세계화(globalization)의 면모도 지니고 있다. 의례를 통한 전통의 복원과 창조, 그리고 종교적 성소와 전통의례의 관광상품화는 지역의 ‘문화적 자원’을 각색하여 소비와 여가의 전 지구화에 대응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일종의 혼성(hybridity)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의례의 재생에는 전통을 상품화하는 과정과 함께 글로벌한 요소를 의례에 직접 동원하는 현상이 보인다. 축제의 현장에는 ‘공포의 집’이나 ‘코끼리차’, 물 놀이터 같은 시설이 들어서 아이들의 놀이공간이 된다.
제단에 올리는 제물 쟁반에는 코카콜라, 양주, 달러가 놓인다. 하노이 구(舊) 시가지의 ‘항마(Hang Ma) 거리’에 가면 대형 아파트며 자가용, 비행기 따위의 종이로 만든 ‘코스모폴리탄 제물’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시내의 사찰에서 모조 달러를 태우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고, 설 전후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구입하여 조상 제단에 모셔두는 할아버지도 볼 수 있다. 베트남의 ‘본색문화’가 새로운 세계경제의 요소에 직면하여 조상이나 귀신의 취향마저도 바꾸어놓은 것이다.



개방이 사회·문화 지형도 바꿔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생겼는가.
최근 종교의식과 축제에 대중의 참여가 늘어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1986년 ‘도이머이’(Doi Moi) 정책 실시 이후 민간의 활동에 대한 국가의 규제가 줄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경제 발전과 정치 안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인민의 의례 관행을 예전보다 덜 통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회관습과 의례가 재생되는 양상은 도이머이 정책 실시 이전에도 있었으며,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국가의 공식 이념이나 정책과 상반되는 일들이 벌어져왔다. 오히려 민속의례의 지속과 민간활동의 자유를 바라는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국가 수준의 개혁 조치를 낳은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국가정책과 정치적 환경의 변화보다는 시장경제의 도입이라는 체제 변화와 관련하여 최근의 의례 활성화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지난 20여 년간 경제적 조건이 변하고 부의 새로운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다. 종교적 활동과 의례가 활성화하는 것은 시장경제 도입 이후 새로운 경제적 요소들의 문화적인 영향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개인경제가 융성하면서 가처분소득이 증대하여 개인의 신앙활동뿐만 아니라 마을 수호신 의례를 비롯한 지역의 공동의례를 재생하는 데 필요한 근본적인 물질적인 조건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물질적인 자원의 가용성만으로는 전통의례 재생의 직접적인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 더구나 초자연적 활동이나 실천이 활발해지는 현상은 최근 베트남 사회의 중요한 변화와 상반되는 면이 있다. 지난 20년간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쇠퇴, 자유시장경제의 도입, 투자 개방의 확대 등으로 베트남의 사회·문화적 지형도 변해왔다. 상품화가 증진되고 사회적 서비스의 사유화가 진행되고 도시화·산업화와 함께 인프라가 확충되고 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많은 사회에서 이러한 변화는 오히려 초자연적인 힘이나 신성성과 관련한 활동의 영향을 축소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는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전통의례가 더욱 활성화하고, 그것이 역으로 시장을 활성화하고 ‘의례경제’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의례 활성화의 경제적 효과와 경제적 성장이 의례 활성화에 미치는 영향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다. 소득 증가와 함께 빈부 격차가 늘어나면서 인민의 일상생활이 점차 시장경제의 함정에 빠져드는 상황이다. 수호신 공동의례의 재구성, 전통의 관광상품화, 의례의 세계화 등은 단순히 체제 변환기 시장의 성장과 그에 수반되는 다양한 시민사회의 성장을 표현해주는 중립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것들에 대한 접근 가능성에는 엄연한 차별이 존재하며, 그 결과로서 파생되는 혜택은 결코 보편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얻는 자가 있으면 잃는 자도 있다.



창조적 모습 내포하는 종교적 실천
의례는 사회주의국가가 저주해온 계급분화의 무대가 된다. 같은 ‘공동체’에 거주하더라도 당 간부나 성공한 사업가의 의례가 실업자나 이주노동자의 의례와 동일할 수는 없다. 의례 활성화는 곧 새로운 계급분화의 상징이 된다. 전근대적 신분관계는 철폐되었으나 경제적 능력이 의례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결정하게 되고, 그것이 곧 위세의 차이를 드러낸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성장 이후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분화가 생기는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계층화가 가속되고 사회적인 복잡성이 커지면서 부상하는 시민사회의 추상적인 영역이나 단순한 반영물로서 종교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의례 자체가 사회적 균열이나 배제를 표현해주거나 사회분화를 드러내는 중요한 영역이 되고 있다.
일상의 영역에서 공산당의 지배력이 상대적으로 약화하면서, 점차 새로운 사회적 힘과 이해집단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개혁의 과정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긴장과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베트남의 의례 활성화는 개혁 이후 새롭게 드러나는 불평등에 대한 잠재된 적대감과 관련한 문화적 지형일 수 있다. 민간신앙과 관련한 실천과 담론에는 ‘근대화’라는 이념의 이름 아래 발휘되는 ‘전통의 재창조’와 함께 사회적인 차별과 배제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현재 베트남 사람들의 종교적인 실천들은 개혁과 함께 사람들이 문화적인 갈망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속박에서 해방된 탓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창조적인 모습을 내포하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