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문화정책 민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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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516회 작성일 10-10-0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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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front)으로서의 문화: 사회주의 의례개혁
1943년, 베트남 공산당 총서기 쯔엉 찐(Truong Chinh)은 ‘베트남문화에 관한 테제’에서 정치, 경제와 함께 문화를 혁명 투쟁의 세 가지 전선(front) 중 하나라고 선언했다. 1945년 8월혁명 이후, 공산당은 민족화, 대중화, 과학화를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원칙으로 정했다. 특히 ‘민족화(nationalization)’는 “독특하게 베트남적인 것을 회복하기 위한 이념으로서, 노예제와 식민주의에 대항해 투쟁함으로써 독립을 향해 전진하는 문화 건설”을 의미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담론은 사회주의적 근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총체적인 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일종의 ‘베트남식 문화혁명’인 ‘새 생활(doi song moi) 운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토지개혁(1955~56) 이후 봉건적 습속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한편으로 우수한 민족문화와 고적을 선별해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또 1956년부터 보존 박물관 분야를 국가의 주요 사업영역으로 정하고, 1957년 ‘역사유적과 명승지 보호에 관한 법률’을 공포해 박물관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주요 역사유적과 자연유산이 훼손되자 유적 보호와 박물관 관련 정책을 보강했다. 1970년대에는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새 생활 규약’이라는 매뉴얼을 만들어 유포했다. 1971년에는 ‘축제, 결혼, 장례, 제사, 명절과 기념일 의례에 관한 지시’를 문화부령으로 공포하고, 1975년 3월에는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축제를 복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56호 법규’를 시행했다.


인민의 요구와 정책 담론의 변화:‘뿌리’ 지키기
이러한 일련의 문화정책은 지방과 인민의 저항에 부딪혀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실제로 1950년대 후반부터 이미 전통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가 점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국가는 지방과 인민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인 아젠다로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와 전통의 창출을 시도한다.
국가는 민간의 활동을 지배하기 위해 단지 지방의 성소를 세속화하고 사적인 관행을 규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통문화와 민족의 유산을 보존하고 모범적인 의례를 체현하는 사업을 폈다. 1975년 종전 이후에는 유적 공인과 보호를 위한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이러한 유적에서 벌이는 의례를 합법화하거나, 아예 국가가 나서서 의례를 직접 수행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유적 공인 사업은 1984년 ‘역사문화 유적과 명승고적의 보호와 사용에 관한 법령’의 제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 가속해 매년 40개 이상의 유적이 공인되었다. 1994년까지 전국적으로 ‘특별중요유적’, ‘혁명항전유적’ 등을 포함한 역사 유적, 예술 건축 유적, 명승 유적, 고고학 유적 등 모두 1,659개의 유적이 국가의 역사문화 유적으로 공인되었고, 2005년까지 약 2,200여 개의 유적이 공인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변화는 학계의 역할에서 적지 않게 기인했다. 1970년대 후반 베트남 민족학, 민속학, 역사학계 학자들은 전통축제를 민족의 중요한 본성을 구성하는 ‘공동체적 문화활동’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인민의 자율적인 경제활동의 여지가 커져 가족과 이웃 단위의 의례가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촌락 고유의 전통과 유산에 대한 학술적 담론이 더욱 확산하기 시작했다.
민족문화의 보존에 관한 학계와 지방의 담론은 정부의 문화정책과 지속적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중앙의 문화부는 지방의 행정기관마다 설치된 문화 관리 관련 부서와 박물관을 통해 정책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학계의 역량을 동원하고자 했다. 가령, 1979년 10월 발효된 문화정보부의 ‘지방의 박물관 건설에 관한 제2760호 지시’에는 주요 대학과 연구기관에 종사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착 학자들을 동원하고, 특히 해당 지방의 박물관에서 관련 학술대회를 열 것을 요구한다.
도이머이 이후의 정책 담론과 학계의 역할
1986년 도이머이(doi moi) 이후 민간활동 규제가 완화했다. 1989년 말에 문화부는 ‘전통축제의 조직에 관한 법규’를 제정해 지방의 축제와 마을 공동의례의 재개를 전면적으로 허용했다. 유적 공인 사업이 확산하고 지역축제와 수호신 의례가 점차 활성화함에 따라 1994년 문화통신부 장관이 “이미 인민의 정신생활에서 필요한 요구사항이 되어온 의례와 축제가 전통문화의 생활양식으로 유지되고, 미풍양속과 국가 경제와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각 의례를 조직하고, 사회생활의 훌륭한 모범을 만들기 위해서 ‘의례규제(Quy che Le hoi)’를 공포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지방 고유의 전통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담론이 더욱 활발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방 인민위원회는 축제의 조직에 관한 지방자치체의 규칙을 제정해 시행하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자치적인 규정에도 애국정신 고취, 연대와 상부상조, 생산력 향상과 대중 동원, 미신 타파 등과 같은 사회주의 의례개혁과 관련한 정책 담론의 영향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 의례는 엄숙하게 수행해야 하지만 인력과 재정의 낭비가 적어야 하며 구시대적인 관습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베트남 학계의 담론은 국가정책과 지방의 요구의 영향을 받아왔지만 민속과 전통에 관한 정책 담론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다. 인류학, 사회학, 종교학 분야와 민속학을 비롯한 민간문화 연구 분야가 특히 축제와 의례에 관한 연구에 기여해왔다. 1980년대 중반부터 <민간문화>라는 잡지에 축제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의미에 관한 글들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1992년부터 민간문화연구원에서 전통축제나 민간의례와 관련한 논문집을 비롯해 수많은 종류의 축제를 소개하는 책들이 출판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거의 모든 성 인민위원회 문화국과 현 단위에서도 해당 지방의 전통문화를 상세히 소개하는 책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전통축제》 (Traditional Festivals in Vietnam)라는 영문 책자와 <베트남 전통축제의 보고(寶庫)>라는 논문집도 출판되었다. 전통문화에 대한 해석과 의례 전통을 소개하는 책들의 출판도 봇물을 이루기 시작했다.
1993년 3월 하노이인문사회과학연구원은 ‘현대사회의 전통축제’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특히 현대사회에서의 기능에 초점을 둔 전통축제에 관한 논문들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 대부분 연구자들이 마치 합창하듯이 축제의 긍정적인 면은 강화하고, 부정적인 면은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나 민속신앙과 미신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어떠한 요소들이 어느 정도까지 보존되어야 하며, 어떤 요소들이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해답이 제시되지 않았다. 즉 전통문화에 선택적으로 접근하는 실천적 면에 관한 분명한 대안이 제시되지 않았다.
1993년 6월에는 문화부가 ‘전통축제의 조직에 관한 법규’의 시행과정에 관한 평가를 위해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법규를 입안했던 문화부 군중문화국 부국장 쯔엉 틴(Truong Thin)은 공식적인 승인을 받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민간축제가 광범위하게 열린 점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이 법규가 민족문화의 위대한 ‘뿌리’의 정신을 되살리는 데 성공적으로 기여했으며, 이러한 정신이 전통문화에 관한 지식을 소통하고 대중에게 ‘진, 선, 미’를 교육하는 가교가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축제는 민족문화를 강화하고 “외부의 파괴적인 문화적 힘의 영향에서 민족문화를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는 ‘신성에 대한 신앙’은 기본적인 도덕적 가치를 제공해 사회적 질서를 안정시킨다는 기능주의적 견해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러나 국가의 공식 담론에서는 혁명적인 맥락에서만 숭배의 대상이 선택될 수 있다는 주장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즉 국가와 민족을 위기에서 구하고 민족공동체를 구현하는 데 기여한 혁명적 영웅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점을 유지한 것이다. 학자들은 가족의 조상뿐 아니라 마을과 조국을 구한 인물에 대한 숭배를 포함하는 조상숭배 의례가 곧 베트남의 민족종교라고 규정했다. 미신적 관념과 악습을 일소한다면, 조상숭배 의례의 핵심적인 기능은 언제나 “구국 항전을 지속하고,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외래 문명을 흡수하도록 해주는 독립심과 집합의식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족화’와 ‘뿌리’ 정체성: 통합과 갈등의 딜레마
1998년 7월 제8기 당중앙위원회 5차 대회에서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진보적인 베트남문화를 건설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 결의안은 베트남 민족이 열렬한 애국심, 민족의 독립과 자강을 위한 강한 의지, 단결 정신 등 일련의 가치를 공유한다고 가정하고, 민족 정체성은 오랜 역사 동안 결정(結晶)을 맺어온 베트남 인민의 이상화한 ‘정화’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가치들은 평화롭게 선진화를 추진하기 위한 이념적, 문화적 전선에서 폭력적으로 공격하는 적대적 힘들에 대항해 베트남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널리 유포되고 있다. 당은 마약, 범죄, 매춘 등 심각한 사회문제와 더불어, 새롭고 외래적인 것을 열망하는 것이 점차 이기적인 생활양식을 확산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민족의 문화적 가치들을 멸시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고, 강한 문화적 정체성이 현대성의 사악한 정신에 대항해 민족의 미풍양속을 지켜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심이 되는 모티브는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이지만, 이 결의안의 핵심 내용은 이미 1940년대 중반에 처음 제시된 ‘민족화’ 원칙에 깊이 새겨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이머이 과정에서 당과 국가는 가치 있는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베트남식 ‘문화혁명’의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자 했다. 1990년대 이후에도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업에 활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찾기 위해 전통축제의 요소들을 다시 한번 세심하게 검토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통의 선별에서 민초들의 발언권이 점차 커지고 있다. 1960년대에는 미신적인 의식으로서 봉건 계급의 권위와 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던 수호신의례가 지금은 공동체정신을 강화하고 대중의 도덕성과 새로운 영도적인 문화의 규칙을 교육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영도적인 개념 중 특히 강조되는 한 가지는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념하는 것이며,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을 상기하라’(Uong Nuoc Nho Uguon)는 속담으로 표현된다. 문화적 전통의 긍정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것은 인민과 국가의 이해에 모두 부합하는 것이지만,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촌락의 주민들은 조상과 마을의 영웅이나 수호신을 추념하기 위해 그들이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축제를 복원하는 반면, 국가는 지배 권력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에서 통합의 상징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nationalism)와 지방주의(localism)의 갈등이 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는 지방의 유력자와 공모해 이 문제를 해결해왔다. 따라서 문화적 뿌리를 지키고 복원하는 것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그것은 누구의 이해에 봉사하느냐 하는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복원된 전통은 시장경제와 세계화의 진전에도 공동체정신에 부합하는 상징을 만들기도 하지만, 새로운 사회 분화를 반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고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통해 ‘뿌리’(goc) 정체성은 새로운 갈등의 딜레마를 안을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관료들은 인민들이 자신의 문화적 생활의 주인이라고 공언하지만, 국가는 여전히 통제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가령, ‘낭비’와 ‘축제의 상업화’를 문제로 보는 지적이 늘고 있다. 축제가 도박이나 술판과 같은 여러 악습들과 미신적인 관행을 강화하는 데 일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되며, 미디어를 통해 축제의 상업화나 악습을 비판하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전통과 낡은 악습을 구분해야 하고, 전통을 새로운 생활에 적용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당은 국가 주도의 뿌리 정체성과 타협 가능하고 공모할 수 있는 지방 사회 유력자의 뿌리 정체성은 보호하고 장려하고자 하지만, 일반적인 시민사회의 성장이나 저항의 가능성은 지속적으로 경계하고자 한다.
1943년, 베트남 공산당 총서기 쯔엉 찐(Truong Chinh)은 ‘베트남문화에 관한 테제’에서 정치, 경제와 함께 문화를 혁명 투쟁의 세 가지 전선(front) 중 하나라고 선언했다. 1945년 8월혁명 이후, 공산당은 민족화, 대중화, 과학화를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원칙으로 정했다. 특히 ‘민족화(nationalization)’는 “독특하게 베트남적인 것을 회복하기 위한 이념으로서, 노예제와 식민주의에 대항해 투쟁함으로써 독립을 향해 전진하는 문화 건설”을 의미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담론은 사회주의적 근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총체적인 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일종의 ‘베트남식 문화혁명’인 ‘새 생활(doi song moi) 운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토지개혁(1955~56) 이후 봉건적 습속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한편으로 우수한 민족문화와 고적을 선별해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또 1956년부터 보존 박물관 분야를 국가의 주요 사업영역으로 정하고, 1957년 ‘역사유적과 명승지 보호에 관한 법률’을 공포해 박물관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주요 역사유적과 자연유산이 훼손되자 유적 보호와 박물관 관련 정책을 보강했다. 1970년대에는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새 생활 규약’이라는 매뉴얼을 만들어 유포했다. 1971년에는 ‘축제, 결혼, 장례, 제사, 명절과 기념일 의례에 관한 지시’를 문화부령으로 공포하고, 1975년 3월에는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축제를 복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56호 법규’를 시행했다.


인민의 요구와 정책 담론의 변화:‘뿌리’ 지키기
이러한 일련의 문화정책은 지방과 인민의 저항에 부딪혀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실제로 1950년대 후반부터 이미 전통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가 점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국가는 지방과 인민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인 아젠다로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와 전통의 창출을 시도한다.
국가는 민간의 활동을 지배하기 위해 단지 지방의 성소를 세속화하고 사적인 관행을 규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통문화와 민족의 유산을 보존하고 모범적인 의례를 체현하는 사업을 폈다. 1975년 종전 이후에는 유적 공인과 보호를 위한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이러한 유적에서 벌이는 의례를 합법화하거나, 아예 국가가 나서서 의례를 직접 수행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유적 공인 사업은 1984년 ‘역사문화 유적과 명승고적의 보호와 사용에 관한 법령’의 제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 가속해 매년 40개 이상의 유적이 공인되었다. 1994년까지 전국적으로 ‘특별중요유적’, ‘혁명항전유적’ 등을 포함한 역사 유적, 예술 건축 유적, 명승 유적, 고고학 유적 등 모두 1,659개의 유적이 국가의 역사문화 유적으로 공인되었고, 2005년까지 약 2,200여 개의 유적이 공인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변화는 학계의 역할에서 적지 않게 기인했다. 1970년대 후반 베트남 민족학, 민속학, 역사학계 학자들은 전통축제를 민족의 중요한 본성을 구성하는 ‘공동체적 문화활동’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인민의 자율적인 경제활동의 여지가 커져 가족과 이웃 단위의 의례가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촌락 고유의 전통과 유산에 대한 학술적 담론이 더욱 확산하기 시작했다.
민족문화의 보존에 관한 학계와 지방의 담론은 정부의 문화정책과 지속적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중앙의 문화부는 지방의 행정기관마다 설치된 문화 관리 관련 부서와 박물관을 통해 정책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학계의 역량을 동원하고자 했다. 가령, 1979년 10월 발효된 문화정보부의 ‘지방의 박물관 건설에 관한 제2760호 지시’에는 주요 대학과 연구기관에 종사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착 학자들을 동원하고, 특히 해당 지방의 박물관에서 관련 학술대회를 열 것을 요구한다.
도이머이 이후의 정책 담론과 학계의 역할
1986년 도이머이(doi moi) 이후 민간활동 규제가 완화했다. 1989년 말에 문화부는 ‘전통축제의 조직에 관한 법규’를 제정해 지방의 축제와 마을 공동의례의 재개를 전면적으로 허용했다. 유적 공인 사업이 확산하고 지역축제와 수호신 의례가 점차 활성화함에 따라 1994년 문화통신부 장관이 “이미 인민의 정신생활에서 필요한 요구사항이 되어온 의례와 축제가 전통문화의 생활양식으로 유지되고, 미풍양속과 국가 경제와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각 의례를 조직하고, 사회생활의 훌륭한 모범을 만들기 위해서 ‘의례규제(Quy che Le hoi)’를 공포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지방 고유의 전통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담론이 더욱 활발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방 인민위원회는 축제의 조직에 관한 지방자치체의 규칙을 제정해 시행하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자치적인 규정에도 애국정신 고취, 연대와 상부상조, 생산력 향상과 대중 동원, 미신 타파 등과 같은 사회주의 의례개혁과 관련한 정책 담론의 영향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 의례는 엄숙하게 수행해야 하지만 인력과 재정의 낭비가 적어야 하며 구시대적인 관습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베트남 학계의 담론은 국가정책과 지방의 요구의 영향을 받아왔지만 민속과 전통에 관한 정책 담론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다. 인류학, 사회학, 종교학 분야와 민속학을 비롯한 민간문화 연구 분야가 특히 축제와 의례에 관한 연구에 기여해왔다. 1980년대 중반부터 <민간문화>라는 잡지에 축제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의미에 관한 글들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1992년부터 민간문화연구원에서 전통축제나 민간의례와 관련한 논문집을 비롯해 수많은 종류의 축제를 소개하는 책들이 출판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거의 모든 성 인민위원회 문화국과 현 단위에서도 해당 지방의 전통문화를 상세히 소개하는 책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전통축제》 (Traditional Festivals in Vietnam)라는 영문 책자와 <베트남 전통축제의 보고(寶庫)>라는 논문집도 출판되었다. 전통문화에 대한 해석과 의례 전통을 소개하는 책들의 출판도 봇물을 이루기 시작했다.
1993년 3월 하노이인문사회과학연구원은 ‘현대사회의 전통축제’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특히 현대사회에서의 기능에 초점을 둔 전통축제에 관한 논문들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 대부분 연구자들이 마치 합창하듯이 축제의 긍정적인 면은 강화하고, 부정적인 면은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나 민속신앙과 미신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어떠한 요소들이 어느 정도까지 보존되어야 하며, 어떤 요소들이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해답이 제시되지 않았다. 즉 전통문화에 선택적으로 접근하는 실천적 면에 관한 분명한 대안이 제시되지 않았다.
1993년 6월에는 문화부가 ‘전통축제의 조직에 관한 법규’의 시행과정에 관한 평가를 위해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법규를 입안했던 문화부 군중문화국 부국장 쯔엉 틴(Truong Thin)은 공식적인 승인을 받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민간축제가 광범위하게 열린 점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이 법규가 민족문화의 위대한 ‘뿌리’의 정신을 되살리는 데 성공적으로 기여했으며, 이러한 정신이 전통문화에 관한 지식을 소통하고 대중에게 ‘진, 선, 미’를 교육하는 가교가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축제는 민족문화를 강화하고 “외부의 파괴적인 문화적 힘의 영향에서 민족문화를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는 ‘신성에 대한 신앙’은 기본적인 도덕적 가치를 제공해 사회적 질서를 안정시킨다는 기능주의적 견해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러나 국가의 공식 담론에서는 혁명적인 맥락에서만 숭배의 대상이 선택될 수 있다는 주장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즉 국가와 민족을 위기에서 구하고 민족공동체를 구현하는 데 기여한 혁명적 영웅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점을 유지한 것이다. 학자들은 가족의 조상뿐 아니라 마을과 조국을 구한 인물에 대한 숭배를 포함하는 조상숭배 의례가 곧 베트남의 민족종교라고 규정했다. 미신적 관념과 악습을 일소한다면, 조상숭배 의례의 핵심적인 기능은 언제나 “구국 항전을 지속하고,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외래 문명을 흡수하도록 해주는 독립심과 집합의식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족화’와 ‘뿌리’ 정체성: 통합과 갈등의 딜레마1998년 7월 제8기 당중앙위원회 5차 대회에서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진보적인 베트남문화를 건설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 결의안은 베트남 민족이 열렬한 애국심, 민족의 독립과 자강을 위한 강한 의지, 단결 정신 등 일련의 가치를 공유한다고 가정하고, 민족 정체성은 오랜 역사 동안 결정(結晶)을 맺어온 베트남 인민의 이상화한 ‘정화’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가치들은 평화롭게 선진화를 추진하기 위한 이념적, 문화적 전선에서 폭력적으로 공격하는 적대적 힘들에 대항해 베트남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널리 유포되고 있다. 당은 마약, 범죄, 매춘 등 심각한 사회문제와 더불어, 새롭고 외래적인 것을 열망하는 것이 점차 이기적인 생활양식을 확산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민족의 문화적 가치들을 멸시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고, 강한 문화적 정체성이 현대성의 사악한 정신에 대항해 민족의 미풍양속을 지켜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심이 되는 모티브는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이지만, 이 결의안의 핵심 내용은 이미 1940년대 중반에 처음 제시된 ‘민족화’ 원칙에 깊이 새겨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이머이 과정에서 당과 국가는 가치 있는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베트남식 ‘문화혁명’의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자 했다. 1990년대 이후에도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업에 활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찾기 위해 전통축제의 요소들을 다시 한번 세심하게 검토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통의 선별에서 민초들의 발언권이 점차 커지고 있다. 1960년대에는 미신적인 의식으로서 봉건 계급의 권위와 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던 수호신의례가 지금은 공동체정신을 강화하고 대중의 도덕성과 새로운 영도적인 문화의 규칙을 교육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영도적인 개념 중 특히 강조되는 한 가지는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념하는 것이며,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을 상기하라’(Uong Nuoc Nho Uguon)는 속담으로 표현된다. 문화적 전통의 긍정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것은 인민과 국가의 이해에 모두 부합하는 것이지만,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촌락의 주민들은 조상과 마을의 영웅이나 수호신을 추념하기 위해 그들이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축제를 복원하는 반면, 국가는 지배 권력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에서 통합의 상징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nationalism)와 지방주의(localism)의 갈등이 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는 지방의 유력자와 공모해 이 문제를 해결해왔다. 따라서 문화적 뿌리를 지키고 복원하는 것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그것은 누구의 이해에 봉사하느냐 하는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복원된 전통은 시장경제와 세계화의 진전에도 공동체정신에 부합하는 상징을 만들기도 하지만, 새로운 사회 분화를 반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고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통해 ‘뿌리’(goc) 정체성은 새로운 갈등의 딜레마를 안을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관료들은 인민들이 자신의 문화적 생활의 주인이라고 공언하지만, 국가는 여전히 통제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가령, ‘낭비’와 ‘축제의 상업화’를 문제로 보는 지적이 늘고 있다. 축제가 도박이나 술판과 같은 여러 악습들과 미신적인 관행을 강화하는 데 일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되며, 미디어를 통해 축제의 상업화나 악습을 비판하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전통과 낡은 악습을 구분해야 하고, 전통을 새로운 생활에 적용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당은 국가 주도의 뿌리 정체성과 타협 가능하고 공모할 수 있는 지방 사회 유력자의 뿌리 정체성은 보호하고 장려하고자 하지만, 일반적인 시민사회의 성장이나 저항의 가능성은 지속적으로 경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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