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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수레바퀴다 : 힌두교에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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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548회 작성일 10-10-09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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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
또 한 번의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한 해의 마지막과 새로운 해의 시작을 맞이할 즈음이 되면, 평소에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시간의 흐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시간에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일까. 시간 자체는 끝없이 이어지는 흐름임에도 사람들이 편의상 시간을 마디 내고 시작과 끝이란 인위적인 구분을 해놓은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실질적인 이유에서건 심리적인 이유에서건, 시간에 매듭과 마디를 지어놓았다. 그리고 시간의 여러 마디마다 시작과 끝을 두었다. 하루, 한 달, 한 해에 시작과 끝이 있고, 삶에도 삶의 시작인 출생과 삶의 끝인 죽음이 있다. 그렇다면 죽음은 진정 삶의 끝이며 존재의 마지막인가? 시간과 삶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답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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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적 시간관과 순환적 시간관
인류의 종교사를 살펴보면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크게 순환적 시간관과 직선적 시간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유일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시간엔 시작과 끝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들은 시간은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면서 시작되었고, 신의 최후의 심판으로 이 세계가 끝나는 종말에 시간도 끝이 날 것으로 믿는다. 이 직선적 시간관에 따르면 이 땅에서의 삶이란 죽음과 함께 끝나는 일회적인 삶이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사후의 삶이 이어진다 해도 죽음을 터부시하고 한 번뿐인 삶을 중시해왔다.
종말사상(최후의 심판, 부활, 구세주 개념)을 최초로 체계화시킨 종교는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국가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다. 이 종교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분리의 다리로 가서 살아 생전의 선악 행위를 저울에 달아 심판을 받는다. 선행이 무거우면 천상에 있는 노래의 집으로, 악행이 무거우면 지옥인 속임수의 집으로, 그리고 선악의 무게가 같으면 제3의 장소(일종의 수용소)로 간다. 죽은 자들의 영혼은 종말이 올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다가 구세주가 나타나 종말이 시작되면 모두 육신을 가지고 부활하여 불타는 냇물에 들어가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 이 과정을 통해 악은 완전히 사라지고 신(아후라 마즈다)의 선한 의지로 통치되는 낙원만이 영원히 지속된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사후 세계 이야기도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 다만 최후의 심판 이후 몸을 지니고 부활한 사람들이 영원한 행복의 장소인 천국과 영원한 처벌의 장소인 지옥으로 나뉘어 가서 그곳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종교들에서 세계의 종말 이후에 또 다른 형태의 사후 삶이 이어진다 해도 죽음은 여전히 삶의 끝을 의미한다.
그러나 재생을 믿는 원시신앙이나 불교와 힌두교 신자들은 죽음을 삶의 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은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지며, 따라서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되풀이해 경험한다고 생각해왔다. 이러한 사고는 아마도 달의 차고 기울음이나 계절의 반복적인 변화와 같은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는 자연의 순환적 변화 과정을 관찰하면서 시작되어 우주가 창조와 해체를 되풀이한다는 순환적 우주관(시간관)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시간이란 시작도 끝도 없는, 끝없이 이어지는 흐름이다. 인도인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바로 이러한 시간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주요 상징으로 사용하는 수레바퀴 형태의 차크라는 바로 이러한 시간의 지속적인 흐름과 윤회를 의미하는 상징이다.

죽음, 또 다른 삶에 이르는 과정
힌두교도들은 우주가 생성, 유지, 해체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이 순환하는 우주 속에서 인간도 생사의 순환을 되풀이해 경험한다고 믿는다. 이를 설명하는 인도 사상이 바로 업과 윤회다. 업(카르마)은 행위에 근거하는 우주의 인과법칙으로, 그 핵심 원리는 모든 행위는 반드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욕망으로 인해 행위를 하고, 그 행위는 업을 낳는다. 그러나 그 업의 결과가 현생에서 다 나타나는 것은 아니어서, 그 결실에 따라 다양한 존재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이 자신의 행위 결과에 따라 수없이 많은 생을 살게 된다는 이론이 윤회다.
업과 윤회 사상에 따르면 인간이 죽어 화장되면 인간의 신체는 지, 수, 화, 풍, 공(간) 다섯 물질 요소로 되돌아가고, 각자의 업보, 즉 카르마가 저장되어 있는 엄지 크기의 미세신(또는 인과신因果身)이 새로운 몸을 취하고 인간, 동물, 새, 나무, 식물, 풀 등 생명체로 재생하는데, 존재의 종류나 수명, 운명 등 재생의 형태는 과거 업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업과 윤회를 믿는 인도인들에게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에 이르는 길이며, 사후 삶이란 영혼이 거치는 중간 정거장일 뿐이다.
인도에선 죽은 후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재생하는 것을 흔히 연이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땅에 다시 떨어지는 모양에 비유한다. 영혼을 다시 땅으로 데려오는 연줄은 우리의 욕망과 집착으로 해서 쌓인 업보다. 이 업보가 우리의 영혼이 해탈에 이를 때까지 영혼을 끊임없이 윤회시킨다는 것이다.
힌두교와 마찬가지로 업과 윤회 사상을 지니고 있는 불교의 한 경전은 붓다가 최소한 550번 환생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는 동물, 물고기, 새, 걸인, 상인, 사제, 관료, 왕자, 왕의 생애가 있고, 수행자의 삶이 83회로 가장 많다. 또 흥미로운 것은 여러 문헌이나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는 사례들을 언급하는 점이다. 모든 이들이 재생되기 위해 자궁에 수정란의 상태로 있을 때에는 전생을 기억하지만 태어나면서 그 기억을 잊어버리는데, 특별한 능력을 지닌 요가 수행자들은 전생을 기억한다고 한다.
이런 윤회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인도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담담하다. 인도인들은 대부분 화장을 하는데, 야외 화장터에서 죽은 이의 시신이 장작불에 타서 그 형체가 사라지는 과정을 그대로 다 볼 수가 있다. 유족들은 죽은 이의 시신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특별한 감정을 노출하지 않은 채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시신이 다 타서 재가 될 때까지 서너 시간을 조용히 지켜본다. 이러한 장례 광경은 죽음을 멀리하고 터부시하는 데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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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도들이 죽음을 맞이하길 가장 염원하는 장소는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의 화장터다. 이곳에서 인도인들의 화장 절차와 그 주변의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죽음이 터부시해야 할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런 일상임을 느낀다. 인도인들이 신성시하는 강가(갠지스) 강변에 있는 이 화장터는 도심과 가까이 있다. 하루 24시간 화장 의례가 이어지는 이 화장터 주변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종교 행위와 일상적인 삶과 아이들의 놀이가 뒤섞여 행해진다. 뿐만 아니라 시신이 다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무언가 남아 있는 물건을 찾고 있고, 소와 염소들은 잿더미를 뒤적여 장례의례에 바쳤던 남아 있는 제물들을 먹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죽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것이 아니라 삶과 자연스레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윤회를 믿는 인도인들에게 죽음이란 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들에게 죽음이란 또 다른 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 삶의 끝이 아니다. 이렇게 인도인들에게 삶과 죽음, 시작과 끝, 창조와 해체(또는 파괴)는 단절되어 있지 않고, 하나가 또 다른 것의 전제조건으로 맞닿아 있다. 여러 해 전에 크리슈나무르티 워크숍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한 인도 여성이 인도 사상에서 파괴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파괴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도인들은 우리의 삶에 있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들을 엄격히 분리시키지 않는다. 상이성과 다양성이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현상과 기능이 다를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도 문화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세계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통일적(일원론적)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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