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예술인들 영혼 떠도는 꽃의 도시_니스 > 이색도시 문화탐방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이색도시 문화탐방


 

천재 예술인들 영혼 떠도는 꽃의 도시_니스

페이지 정보

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592회 작성일 10-10-10 19:11

본문

니스서 남긴 이사도라의 예술적 울림

설명이 필요 없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이브 클랭 현대 무용의 여제 이사도라 덩컨,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철학자와 예술가의 삶을 산 고뇌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현대 요리를 완벽한 예술의 경지로 이끌어 올린 20세기 최고의 요리 예술가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현대 프랑스 문단의 살아 있는 신화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그들이다. 또한 이들과 더불어 니스 시민들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뛰어난 예술가들, 모사 부자, 쥘 세레, 라울 두피 등이 있다. 이들은 누가 감히 천재라 부르는 데 주저할 것인가, 이들은 누가 위대한 예술가라고 부르는 데 망설일 것인가.
이들 중에는 이브 클랭, 모사 부자, 에스코피에. 르 클레지오 등은 이곳 니스에서 태어나 니스에서 예술 작업을 하거나 삶의 대부분 또는 상당 부분을 보냈다. 그런가 하면, 이곳에 매료되어 만년의 상당 기간을 살면서 활동한 마티스, 샤갈, 쥘 세레, 라울 뒤피 등도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지도 오랫동안 활동하지도 않은 니체나 이사도라 덩컨 같은 예술가도 있지만 이들 역시 니스와 떼놓을 수 없는 인연과 의미를 갖고 있다.
이미 앞서 간단하게 언급한 바 있는 작가나 다음 기회에 상세히 소개할 작가를 제외하고 몇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현대 춤의 혁명가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 1878~1927)은 그녀의 생애 중 가장 힘들고 궁핍했던 50대 초반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녀의 자서전 《이사도라 덩컨, 나의 생애》(Isadora Duncan , My Life)를 집필하기로 마음먹고, 니스에 왔다. 3~4년을 니스에 머무르면서 집필 작업을 하였고, 그녀의 스튜디오 등에서 장 콕토 등과 함께 공연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사도라 덩컨의 자서전 집필 작업에는 덩컨의 젊은 애인 세로프, 작가 앨런 로스 맥도걸, 하퍼 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소설가 글렌웨이 웨스콧 등이 등장한다. 자서전 집필 작업을 위해 짐을 싸들고 니스로 내려온 후로 이따금 파리를 다녀온 것 외에는 그녀가 니스에서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로 죽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녀는 특히 해변 산책로 프롬나드 데 장글레를 좋아해 이곳 해변가를 자주 산책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당대의 쟁쟁한 예술가를 초정하여 토론을 벌이도 했고 장 콕토 등과 스튜디오 공연을 몇 차례 하기도 했지만, 괜찮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스튜디오 공연이나 토론 모임에는 찰리 채플린, 루돌프 발렌티노, 더글러스 페어뱅크, 니글레스코프, 장 콕토, 르카르 르 갈리망, 마리 로랑생, 피카소, 마그리트 자무 등 배우, 감독, 시인 화가할 것 없이 당시를 풍미했던 많은 유명 예술인이 자리를 함께했다.
지금도 니스에 가면 프롬나드 데 장글레의 산책로 맨 끝 앙리 해수욕장 쪽에 있던 이시도라 덩컨의 스튜디오가 예전에 본 듯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리고 어두운 밤 스튜디오 문을 열고 지중해 깊은 바다 속으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이사도라 덩컨의 참담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당시 그녀는 복잡한 남자관계, 병적인 낭비벽 등으로 여러 곳에서의 후원금도 바닥이 났고 궁핍은 극에 달했다. 선택은 오직 죽음뿐인 막다른 인생의 끝을 니스에서 보내는 것이었다. 최악의 시간에도 이사도라 덩컨은 예술과 사랑을 동시에 갖고 싶었고 그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스스로 “코끼리에게 자전거를 타게 할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덩컨에게 사치와 낭비벽은 통제가 불가능한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고질병 같은 것이었다.
덩컨은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궁핍을 벗어날 절호의 찬스를 얻었지만 그 기회마저 스스로 저버렸다(덩컨의 옛 애인인 파리 싱어는 덩컨을 도와주려고 그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가 그녀가 팔체토를 유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야말로 막다른 절벽에서 그녀는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는 청년 팔체토의 아말카 스포츠카를 타고 출발하려는 순간 숄이 차바퀴 살에 감겨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목이 졸려 부러지면서 숨졌다. 덩컨의 나이 50세가 되던 1927년 9월 14일 오후 9시 30분이었다.
그러나 이사도라 덩컨이 남긴 예술적 울림은 너무 크고 과거의 무용인이 아니라 미래의 무용인으로 지금도 무용계의 신화로 살아 있는 것이다.


父子 화가이자 큐레이터에서 작품 기증까지

60-3.jpg다음은 상징주의 말기의 대가로 니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사 부자의 작품을 구경할 차례이다. 화가로서는 아들 귀스타브 아돌프 모사(Gustave Adolph Mossa)가 더 유명하지만 아버지인 알렉시스 모사(Alexis Mossa)도 상징주의 화가로서 당대 가장 뛰어난 화가로 평가받고 있었다.
특히 알렉시스 모사는 니스 카르타발 지방의 뛰어난 풍경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것은 아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아들 귀스타브 아돌프 모사는 매우 독창적인 화법으로 유럽 상징주의 말기를 장식하는 세계적인 명작을 많이 남겼다. 우리가 미술 교과서 등에서 접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이자 상징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그녀>(Elle), <요정 시렌느>(Sirenne Assise'), <사포>(Saph), <해골 가운데의 여인>(La Femme aux squelettes), <다윗과 밧세바> 등을 보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독창적인가를 잘 알 수 있다. 그 당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을 전혀 몰랐던 그가 이렇게 프로이드적인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그의 천재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상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한 상징주의는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대상이 아닌 인간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꿈과 환상을 탐구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그의 테마는 영원한 여성 탐미, 그는 20여년 동안 세련되고 정확한 필치로 그리스·로마 신화, 게르만의 전설, 유대 그리스도의 종교적 주제를 세밀한 필치로 상징주의 적인 수법으로 수천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초기 상징주의에서 이를 더욱 발전 심화시켜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는데 주로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죽음과 성을 소재로 한 소재의 작품도 많이 그렸다.
그의 대표작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그녀>를 도판을 통해 찬찬히 들여다보자. 니스 미술관 작품 해설을 보면, 정말 무섭고 끔직하다.

이 작품은 상징주의 그림으로서도 가장 우수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이 작품의 전반적인 주제는 성과 죽음이다. 수없이 많은 인간의 시체 더미 위에 요염하게 앉아 있는 풍만한 여인, 그녀는 인간을 향해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는 있다. 그녀는 인간의 죽음을 지배하고 죽음을 가져다주는 여인이다. 물신 숭배와 죽음이 혼합돼 있고 후광에는 ‘Hoc volo sic jubeo sit ratione voluntas(의지가 이성을 대신하라는 것이 나의 명령이다)’라는 라틴 성구가 적혀 있다. 목걸이에는 남근 숭배를 나타내는 권총, 비수, 몽둥이 등이 상징으로 장식되어 있다. 매우 잘 배치된 고양이, 진주와 함께 두개골의 반지…….
- 니스 미술관의 작품 해설 중에서

모사 부자는 1928년 설립된 니스시립순수미술관(이하 순수미술관)의 1, 2대 미술관 큐레이터와 관장으로 미술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귀스타브 아돌프 모사는 50년간을 큐레이터와 초대 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니스시립순수미술관을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발전시키는 데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고, 이들 부자의 작품은 사망 후 유족들에 의해 순수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빠르면서도 정확하고, 흘러넘치면서도 당당한…

우리가 니스에 가면 꼭 만나야 될 또 한 사람의 화가가 쥘 세레(Jules Che'ret, 1836~1932년)이다. 쥘 세레는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 런던 등에서 작품 제작과 사업을 벌였지만 그의 귀중한 작품들은 대부분이 순수미술관에 남아 있다. 쥘 세레는 밝은 파스텔조의 원색을 사용하여 자신감, 생동감 넘치는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을 보면 명랑만화를 보거나 재미있는 삽화를 보는 것처럼 저절로 기쁨이 샘솟는다. 서양 미술사에서 이렇게 즐거운 그림을 그린 작가가 몇 명밖에 안 된다는 점에서도 그는 작품은 특이하다. 물론 그의 그림이 인생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나 고뇌보다는 쾌락적이고 유희적이라는 점에서 낮게 평가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소재가 쾌락적이라고 폄하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쥘 세레가 미술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그가 포스터를 개척한 창시자라는 점이다. 포스터의 역사를 다룬 어느 책에서나 그는 툴루스 로트렉(Toulous Lautrec, 1864~1910년)과 함께 제1장, 제1절을 장식하지만, 오히려 쥘 세레는 로트렉에 앞서 포스터를 먼저 창안하고 상업화한 화가이자 사업가였다. 쥘 세레는 그의 작품도 그러했지만 로트렉의 생애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개인적으로도 프로레타리아 출신의 늘 즐겁고 행복한 생애를 보냈다. 그는 낙천적인 성격 탓인지 96세까지 살다 1932년 9월 23일 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쥘 세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 니스의 기쁨이자 자부심이며 니스의 커다란 문화적 자산이다.
또 한 사람의 화가 라울 뒤피(Raul Dufy, 1877~1953년)도 니스가 가장 아끼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르 아브르에서 출생했지만 니스와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의 작품 상당수를 니스 출신인 부인은 라울 뒤피 사후에 순수미술관에 기증했고 미술관은 별도의 뒤피특별기념관을 설치·운영하고 있다. 그는 1937년 만국박람회 전기관에 장식한 세계에서 제일 큰 그림 <전기요정>(la Fe'e e'lectricite', 61×11m, 현재 파리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을 그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1952년에는 앙리 마티스와 함께 베니스 국제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또 한번 그의 실력을 세계에 보여 주었다.
그는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인상주의 영향을 받았고 이어 마티스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아 야수파 화풍을 받아들였는가 하면, 한때는 세잔의 영향을 받고 일시 큐비즘에 경도되었다가 포비즘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는 니스 인근 방스에 머물면서 프로방스 특유의 화려하고 강렬한 색조를 발견한 이후 당대 가장 위대한 칼라리스트로 평가받았다. 1905~1906년에 그린 야수파 경향의 작품인 <에스타크>, <생트 아드레스> 등은 물론 20년 초에 그린 여러 점의 풍경화, 염직 작품에서도 프로방스의 냄새가 물씬 묻어난다. 라울 뒤피는 화가뿐만 아니라 의상 다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로도 명성을 높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드디어 자기의 확실한 화풍을 수립한 라울 뒤피는 빠르면서도 정확한 데생과 산뜻한 색채감이 음악처럼 흘러넘치는 당당한 독자성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특히 프로방스의 지중해 해안과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그의 예술세계는 더욱 자유로워졌고, 특이한 예리함을 갖춘 그의 색채는 단일 색조로 전개돼 나갔다. 말년에 이르러서 그의 작품은 더욱 단순해지고, 독창성과 활력은 더욱 빛을 냈다(《20세기 미술의 모험》에서 인용, 재구성). 라울 뒤피 부인 100여점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니스시립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니스는 예술적으로 더욱 빛나는 도시가 되었다
니스를 빛내는 이들 예술가들이 있기에 니스는 보석처럼 더욱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