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와 예술로 호흡하는 그라스와 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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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659회 작성일 10-10-10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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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의 성지, 조향사의 고향 그라스
먼저 그라스(Ville de Grasse)를 가보자. 니스에서 승용차로 30여분, 칸에서 40 ~ 50여분 이면 그라스에 도달할 수 있는 그라스. 그라스 하면 향수, 향수하면 그라스가 떠오를 만큼 세계적인 향수의 도시, 화장품의 도시이다.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와 소설 <좀머씨의 하루>, <깊이에의 강요> 등으로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을 갖고 있는 독일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 는 특히 장편소설 <향수>로 더욱 우리와 친숙해진 작가이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수시로 향수의 도시, 그라스에 와서 취재 여행을 했다는 본인의 말과 같이 그라스는 향수의 도시로 명성이 높다. 그야말로 향수의 성지이자, 요람이다.
현재 세계에서 활동하는 조향사(향수를 조합하는 전문가)의 대부분이 그라스 출신이라 한다. 조향사의 고향이자 영혼과도 같은 도시가 그라스이다.
향수는 초기에는 화장품의 일종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이 지역의 특산품인 가죽제품의 악취를 제거하기 위하여 만들어졌고 제혁품의 생산 기술의 발달과 함께 향수 산업도 발전하여 왔다. 이미 6~7세기부터 시작된 향수 제조는 16세기 가죽제품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향수산업도 번창하기 시작했고 기술도 발달하였다. 15~16세기 세계 최대의 도시요, 가장 부유했던 도시인 피렌체(당시 런던보다 4배 이상의 큰 도시로 인구가 10만 명에 달했다)의 지배자 메디치가에서 가죽제품(옷, 장갑 등)을 선호하여 이를 납품하면서 그라스의 향수산업도 더욱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메디치가는 로마, 런던, 아비뇽 등 유럽지역에 16개의 은행을 거느린 피렌체의 대부호로 뛰어난 예술적 안목을 가진 위대한 예술 패트런이면서 인문학의 옹호자이고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피렌체의 지배자였다.
이와 같이 향수 산업은 가죽제품, 피혁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향수를 담을 용기인 유리공예 기술도 함께 발전하게 되었다. 인근 마을 비오(Biot)가 유리공예로 유명한 것도 향수 산업 덕분이다.
향수산업 자존심 지키기 위한 비오의 노력
그라스는 연간 300일 이상이 따뜻한 햇볕과 비옥한 토양, 북풍의 찬 바람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하는 산을 뒤로 하고 있다. 이러한 천혜의 기후와 입지조건으로 장미, 라벤더, 자스민, 백리향, 바이올렛 등 허브 식물의 재배지로 최적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세계적인 다국적기업 등 거대한 화장품 회사, 제약회사, 화학회사 등이 그라스의 군소 향수업체를 흡수, 합병하면서 이 지역의 향수 산업은 크게 쇠퇴하기 시작했고, 화려한 명성도 퇴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스는 500여년간 이어온 향수산업의 전통과 프랑스의 자존심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도 그라스에는 몰리나르(Molinard), 프라고나(Fragona), 인터내셔널 드라 파르퓌므리(Internationale de la Parfumerie) 등 향수 공장과 향수 연구소 등이 있고 인근 소피아 앙티 폴리스에도 샤넬의 향수연구소가 있다.
로베르테(Robertet), 쇼베(Chauvet), 만(Mane), 샤라보(Charabot), 카밀리(Camili) 등 여러 개의 향수 원료 생산 회사들이 첨단기술 개발을 통해 새로운 향수의 나라 이탈리아나 파리 니스 등 대도시와 힘겨운 경쟁을 하면서 그라스의 향수 산업의 자존심과 전통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그라스에 가면 반드시 들러서 해야하는 것이 향수 회사의 견학이다. 앞에서 언급한 프라고나르, 몰라나르 등의 향수 공장에는 관광객을 위한 견학 코스가 있고 실제로 향수의 제조 과정 견학 및 체험교실, 판매장 등이 있어 향수의 모든 것을 체험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곳 향수 공장은 향수도 향수지만 향수의 파생상품으로도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비누, 샴푸, 화장품, 향초, 허브차 등 각종 식품 등 방향성 식물로 만든 수백 가지의 선물용 파생 상품이 상품 판매장을 가득 메우고 있고 선물을 사려는 사람들로 늘 붐비고 있다. 프라고나르 향수 공장 옆에는 향수산업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볼 수 있는 국제향수박물관이 있다.
<독서하는 여인>의 고향
또 그라스는 유명한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 Honore Fragonard)의 고향으로 유명하며, 그의 저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프라고라르 미술관(Villa-Musee Fragonard)이 있다. 그는 그라스에서 출생하여 파리에 가서 J.샤르댕과 F.부세에게 미술을 배웠으며 이탈리아의 화가 티에폴로를 존경했다. 1752년에는 영예의 로마 대상을 받고 로마에 미술유학하고 돌아와 1765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는 궁정화가로 활동하였다. 한편 프랑스 상류 사회의 많은 귀족들과의 친교를 맺고 화려한 사교생활을 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후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그도 한때의 화려함과 영광은 사라지고 그의 작품이 시대적으로 뒤떨어졌다는 평가와 함께 완전히 몰락하여 세인들의 관심에서 잊혀진 채 파리에서 쓸쓸히 죽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세계 각지의 대표적인 미술관에 소장되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미술의 문외한이라도 익히 여러 차례 보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독서하는 여인>(1776년작, 워싱톤 국립미술관)을 비롯하여 쾌락적·관능적이고 도발적인 미려한 풍속화 <그네 타는 여인>(1766년, 런던 윌리스미술관), <도둑맞은 키스>
(1787~1788작,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주 박물관), <둥근 과자>(1770년작, 파리 카유재단 등) 와 루브르 미술관이 아끼는 <목욕하는 여인>(1765년경)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정서적인 깊이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미려하고도 감각적이며 감미롭고 솔직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프라고나르 미술관에는 그의 유일한 종교화인 <퓌 노트르담 대성당>과 그의 가족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 프로방스 미술역사박물관. 프로방스 민속의상장식보석박물관이 있고 에르 광장과 쿠르 광장에는 르네상스식 발코니가 있는 매력적인 아케이드 거리가 있다. 또한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아름다운 기념 조각상이 있다. 노트르담 뒤 퓌 대성당(La Cathedrale Notre Dame du Puy)은 프로방스 로마네스크 건축의 전형적인 건축물로 성당 안에는 루벤스의 명작 3점과 프라고나르의 작품이 걸려 있다. 프로방스 민속의상장식보석박물관은 1969년 미라보 백작부인의 별장으로 지은 건물로, 지금은 프라고나르 향수 제조공장이 인수하여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18~19세기의 각종 여성용 장신구, 아름다운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지중해 태양빛의 솔직함과 맑음 속에서 빛을 발하다’
그라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우리나라 면단위보다 작은 마을 비오는 유리 세공으로 유명한 곳이자 국립 페르낭 레제 미술관(Musee Nationale Fernand Leger) 있는 예술의 마을이다.
노르망디의 아르장탕(Argentan)에서 소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신장 190㎝의 건장한 사나이 페르난드 레제(1881~1955년)는 69세 나이로 비오에 이사 와서 생 안드레 농가를 사들여 아틀리에를 만들었다. 세이무어, 니콜라스드 스틸, 르베르 들로네, 샘프란시스 등 세계적인 화가들로 자주 찾은 레제의 아틀리에는 많은 미술인이 교류의 장으로 이용하면서 비오가 미술의 마을로 크게 알려지는 데 역할하였다. 레제는 캉(Caen)에서 2년간 건축공부를 한 후 파리에서 장식미술 학교를 다녔고 후기 인상파 화풍으로 미술을 시작했다.
레제는 건축, 장식미술 등을 두루 공부했듯이 화가로도 뛰어났지만 장식미술, 무대미술, 책의 일러스트레이터 등 여러 분야에서 명성을 날렸다. 자기 시대의 중인이 되고자 했던 레제는 현대적 기계장치에서 동적인 필연성을 읽었다. 따라서 레제의 그림은 정적인 풍경이 아닌데도 안정감이 있고 기계문명에 대한 낙관적인 이미지, 이상화된 노동의 세계를 활기찬 역동성과 기하학적이고 디자인적인 형태로 아름답게 정리된 이상화된 공업도시의 풍경을 보여준다.
레제 미술관에 들어서면 농촌의 순박함과 도시의 기계주의를 한데 모아 조화를 이룬 레제의 매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담하고 분명하며 다른 작가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미술언어로 황소처럼 살다간 레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국립 페르낭 레제 미술관은 결혼 후 미망인이 된 나디아가 1960년에 세운 것으로 건축가 스베친(Svechine)이 설계를 맡았다. 당시 언론은 레제 미술관 개관을 이렇게 보도했다.
‘말년에 레제가 도자기, 스테인드글라스, 모자이크 등의 작업에 전념했던 곳에 비오에서 개관되었다. 이 미술관은 무엇보다도 레제가 보여 온 미술 개념을 모두 표현하였다. 엄격한 입체주의에서 출발하여 현재의 기계주의 사회에서 부응하는 사실주의에 달하는 그의 예술 세계는 일반 대중에 근저를 둔 새로운 인본주의를 증명해주고 있다. 미래의 원시인으로 지칭했던 작가는 이제 그의 미술관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지중해 태양빛의 솔직함과 맑음 속에서 작가는 영혼과 빛을 발하고 있다.’(J.I 페리에 편저, <20세기 미술의 모칭>).
큐비즘을 대표하는 레제의 미술관 개관식에는 평소 가깝게 지냈던 마르크 샤갈과 피카소(레제는 피카소와 같은 해인 1881년 태어났다)가 행사를 주재하였다. 미술관의 대형 외관 벽면에는 레제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레제가 이곳 비오로 이사 올 당시 그는 도자기, 스테인드글라스, 모자이크 등에 심취해 있었다. 특히 벽화에 대하여 큰 관심이 있었던 그는 늘 대중과 늘 가까이 있기를 원했고 대중과의 소통을 바랬기 때문에 또 하나의 새로운 거리 예술의 형태로 자신의 고유한 주제와 특성, 연극성을 갖고 있는 벽화를 좋아했던 그의 관심의 표현인 것이다.
미술관을 나서면서 예술가에게 휴식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지칠 줄 모르고 작업에 임했던 레제의 생생한 어록을 다시 생각해 본다.
“미술가 시인, 아름다움의 창조자들은 전적인 자유로움 속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는 영웅적인 숙명을 안고 태어났다. 이 소중한 자유, 영광의 날은 끊임없이 매일매일 지속되는 위험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야 얻게 된다. 벌떡 일어나서 사회와 전쟁을 벌이는 상태에서만 생동감 있는 작품이 구상되고 단련된다.”
― 페르낭 레제
또 비오는 유리공예 기술이 발달되어 뛰어난 유리공예품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아름답고 예술적인 유리공예 작품을 모아 전시하는 유리공예전시관이 있어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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