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닮은 느린 도시, 슬로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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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665회 작성일 10-10-09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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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그것이 ‘느림’
“느림이란 환경, 자연, 시간, 계절,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 것들을 조화롭게 해서 살아가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이 바로 느림이다.”
9월초 ‘슬로시티 운동’을 창안한 이탈리아의 파올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 전 그레베 인 키안티 시장이 내한해 이토록 아름다운 말로 ‘느림’을 정의했다. 느림을 삶의 가치로 여기는 생활은 과연 먼 꿈일까. 우리 자신을 존중하는 삶, 인간성을 잃지 않는 삶, 자연과의 조화를 실현하는 삶이야말로 산업화·대도시화를 거치면서 그 가치가 더욱 소중해졌다. 이는 그만큼 현대인들은 주체적인 삶을 실현하지 못하고, 자본과 기계문명에 이끌리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자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1999년 10월 15일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오르비에토에 그레베·브라·포시타노 등 슬로푸드 운동을 벌이고 있는 네 도시의 시장이 모였다. 이들은 산업화 대도시화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물질만을 추구하는 삶을 걱정하면서 ‘인간답게 사는 마을’인 ‘슬로시티’(slow city, 이탈리아어로 citta slow) 운동을 선언했다.

이 선언에는 55개의 서약문구와 가입 기준이 있으며, 도시를 평가하는 6가지 기준 항목이 있다. 무엇보다 인간적 삶이 가능한 적정 인구(5만 명)를 넘어서지 않고, 전통산업, 슬로푸드와 아름다운 경관이 있어야 하며, 대기업 자본이 들어서지 않아야 한다. 또 선정된 뒤 세계적 네트워크를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상품이나 문화 등이 있어야 한다.
불편함 아니라 자연 이해하고 순리 기다릴 줄 아는 것
선언 이후 2002년, 그레베가 처음으로 슬로시티를 선포했다. 이곳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인구 1만 4,000명의 작은 도시다. 해발 500~700m의 산간 지방인 이곳은 계단식 경작을 하는 포도원과 올리브 재배를 주산업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그레베의 파올로 사투르니니 시장은 단순히 먹거리만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슬로푸드 운동보다는 삶의 방식을 바꾸고, 그에 맞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시대를 거꾸로 가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는 우선 전통이 살아 있는 도시, 청량음료나 인스턴트 식품 자판기, 패스트푸드점 등 빠른 삶을 상징하는 음식들이 없는 도시, 대형 할인매장, 백화점 등 대규모 자본력이 유입되지 않는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당연히 주민들의 반발이 있었다. 주차나 차량 진입 금지구역 설정, 전통적 방식을 강요하는 각종 농축산물 재배 사육 정책은 지역민들의 반발을 샀고, 강력한 항의소동과 시위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파올로 시장은 “‘슬로’라는 것은 불편함이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고 그 순리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마침 이 시기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광우병 파동을 계기로 그의 뜻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레베에서 멀지 않은 오르비에토는 900년 된 성벽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도시다. 연간 관광객도 200만 명이 넘는 국제적 명성의 도시다. 이런 도시가 관광객 유치, 첨단화 등의 편리함을 버리고 ‘인간다운 마을’을 추구하겠다며 슬로시티 선언을 했다. 마을 건물과 도로가 수백 년 전 우마차가 다니던 시절 그대로이기 때문에 늘어나는 자동차가 큰 위협이 됐다. 따라서 시에서는 마을 중심가로는 자동차가 진입하지 못하게 했고, 번화가에도 번쩍이는 네온사인을 달지 못하게 했다.
브라의 경우도 도심지 역사유적지에는 차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수제품이나 가공식품 등을 다루는 소규모 가족경영 가게들이 최고의 입지를 선점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시청은 도시 미관을 위한 건물 리노베이션을 보조해주기도 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지역 주민들이 재배한 유기농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 있다. 또 과로를 방지하기 위해 브라의 모든 소규모 음식점들은 목요일과 일요일은 문을 닫도록 하고 있다. 단, 시청은 시민들이 좀 더 느긋하게 공공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토요일 아침 근무를 한다.
브라의 부시장 브루나 시빌레는 “우리는 새로운 분위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천천히’ 만들어나가고 있다. 세계화의 물결을 헤쳐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느림의 철학이 도시 행정을 펴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레베와 오르비에토, 브라 등 슬로시티 선언을 한 도시들이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치타슬로 연맹’은 전 세계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2007년 현재 슬로시티 선언을 한 도시는 독일 레베스가르텐, 영국 토트네스 등 10개국 93개 도시(지역)에 이른다. 또 한국슬로시티추진위원회(위원장 손대현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 치타슬로영국(cittaslow.org.uk), 치타슬로노르웨이(cittaslow.no), 치타슬로독일(cittaslow.info) 등 수많은 연맹 지부가 생겨나고 슬로푸드 못지 않은 관심을 끌고 있다.

국내 3곳 국제연맹 가입 가능 예상
‘슬로시티’는 곧 한국에도 상륙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 전남 장흥군 우산슬로월드지구, 완도군 청산도, 담양군 창평면 일대를 ‘슬로시티’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 지역의 요청으로 9월 7일부터 이탈리아 슬로시티국제연맹에서 로베르토 안젤루치(Roberto Angelucci) 회장 등 대표단이 방한해 현지 실사를 진행했다.
인구 2,179명의 작은 섬 증도는 ‘느림’의 섬이다. 해수욕장과 태평염전 등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는 증도는 지난해부터 슬로시티 가입을 추진해왔다. 신안군은 올해 6월 말에 섬 전체를 자전거섬으로 선포하고, 섬 내에 자전거 350대를 비치해 누구든지 탈 수 있도록 했다. 대체에너지 개발을 위해 800kw급 태양광 발전소(12월 준공 예정)를 건설하고 있으며, 에너지 소모가 적은 친환경 교통 시스템 구축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완도군은 2006년 문화관광부의 ‘가고 싶은 섬’ 프로젝트 시범사업(사업비 174억 원) 지역으로 선정된 청산도를 슬로시티와 묶어서 개발시키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청산도는 인구 2,508명에 청동기 시대 남방식 지석묘와 고분, 당리 민속가옥, 해녀 등 섬 지역 특유의 민속문화와 독특한 농경문화, 어로문화가 풍부하게 살아 있는 곳이다. 청산도 주민들은 대규모 개발보다는 전통의 맛과 멋을 살릴 수 있는 친환경적인 개발을 통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그것이 주민들의 소득 증대와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느린 세상, 건강한 장흥’을 군정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장흥군은 2006년 행정자치부 주최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에 선정된 우산리 ‘우산슬로월드지구’와 유치면 일대를 슬로시티로 신청했다. 이 지역 1,286명의 주민들은 표고버섯을 대표적인 지역농산물 브랜드로 키워가고 있으며, 표고버섯을 산림청의 지리적표시제 제2호로 등록했다. 장흥군 전체 표고버섯 생산량은 전국의 7%, 전남의 63%에 이른다. 전통적인 방식의 장 담그기, 청국장 제조, 유기농 수산업 확산, 지렁이 생태학교 운영 등도 슬로시티 인증을 위해 추진해온 사업이다.

담양군은 18채의 전통가옥이 모여 있는 창평면 유천리 일대가 슬로시티로 지정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면민은 모두 4,200여 명. 이곳은 전통적으로 죽부인, 대자리 등 죽세공품과 죽염된장, 한과, 쌀엿 등 전통 음식을 생산해왔다. 주변에는 가사문학을 꽃피웠던 면앙 송순을 비롯,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터를 잡았던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 소쇄원 등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한국슬로시티추진위원회에서는 적어도 3곳 정도는 국제연맹 가입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추진위원회 장희정 신라대 교수는 “국제연맹 실사단은 일부 지자체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아시아 지역의 슬로시티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근거지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말했다. 한국의 슬로시티 가입은 11월 말께 결정될 예정이다.
‘슬로시티’는 곧 국제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연맹 가입 도시들은 하나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시너지 효과도 얻고 있다. 슬로시티 연맹체를 통해 도시 간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지역의 자연과 문화, 역사 자원을 새롭게 상품화하여 교류하고, 자매도시와 협정을 통해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 일본과 중국의 경우 슬로시티를 방문하는 관광도 인기를 얻고 있다.
한편 슬로시티 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없지는 않다. 유기농, 무농약, 수제품 등으로 대변되는 슬로푸드는 고소득층, 상류층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며, 천혜의 자연자원이 숨쉬는 곳에서의 휴식과 생활,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 리듬 역시 일반 노동자나 저소득층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문화 코드로, 새로운 계층 간 분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편 이탈리아 그레베의 경우 유명세를 타고 타 지역의 인구 유입과 관광객 증가가 지역 고유성을 침해하는가 하면, 각종 공해와 문화 충돌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슬로시티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고 물질 본능에서 자연·인간 본능으로의 회귀, 너(관광객)와 나(지역 주민), 나아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21세기의 주요 문화적 코드라고 할 수 있다.
브라의 시빌레 부시장은 “한 가지 분명히 해둬야 할 게 있다. 슬로시티 만들기가 모든 것을 멈추고 시간을 거꾸로 돌리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박물관에 박제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멋진 삶을 촉진할 수 있는 현대와 전통의 조화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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