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관광지 유후인의 30년 리더 나카야 겐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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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548회 작성일 10-10-10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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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부럽다!
유후인은 일본 규슈지역 오히타 현 거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 아름다운 산골마을이다. 뒤로는 산봉우리가 아름다운 해발 1584m의 유후다케가 웅장하게 서 있고, 그 아래로는 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남북으로는 오히타 강이 넓게 펼쳐진 논밭사이로 흐른다. 피부병에 좋다는 츠카하라 온천, 위장병에 좋다는 유희라 온천이 있어 일찍부터 온천지역으로 알려져 있던 곳. 그러나 인근에 있는 대규모 시설 중심으로 개발된 뱃부 온천과는 완전히 차별적인 접근을 통하여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인 지역 가꾸기의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는 곳이다. 산골지역인 정 전체의 인구는 고작 1만2000명 정도인데, 하루에 1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들고 나고 있다고 한다. 1년에 400만 명에 이르는 숫자다. 이는 한창 때의 하우스텐보스가 1년간 유치하던 숫자에 해당하고, 에버랜드 방문자의 절반에 가깝다. 막대한 자금을 시설투자에 쏟아 붓고도 10년만에 파산한 하우스텐보스와 비교하면, 눈에 띄는 시설 하나 없이 오직 주민의 힘으로 지역을 가꾸어 온 결과이기에 더욱 놀랍다. 숙박시설 가동률이 90%를 넘고, 70%가 재방문자들이고, 30%가 숙박을 하고, 그 가운데 25% 정도가 2박 내지 3박을 한다. 경이적인 숫자다. 한없이 부럽기도 한 실적이다. 그래서 지역 가꾸기의 세계적 성공사례로 사람들은 유후인을 드나보다. 유후인의 오늘이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나카야 겐타로 선생이다. 올해 72세의 나이로 크지 않은 체구에 조금은 마른 얼굴, 주름살이 상당히 깊게 패여 있고, 눈썹이 짙은, 그래서 언뜻 보면 대단히 차가운 사람으로 보인다. 무언가 골똘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듯한, 그러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지역 현장을 돌아다니는 사람. 그래서 일본에서도 그를 만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들 한다. 나도 처음 갔을 때는 출타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두 번째 방문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지난 4월 14일,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이 주관한 농촌곤광 관련 세미나 초청에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내한하였기에, 그의 30년간 유후인을 끌어온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를 인간적 면모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싶어 자리를 마련하였다.
“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간의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셨을 텐데, 누구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버지입니다.
보통의 경우 남자들에게는 아버지가 경쟁의 대상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의 어떤 면모 때문에 존경하게 되셨는지요?
항상 주위를 의식적으로 살피기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시면서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내놓으시고 하여, 주위로부터 늘 칭송을 받으시는 모습이었습니다.
항상 솔선하여 행동하시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으시며, 주위와 원만한 관계 속에서 생활하신 부친을 존경하신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저도 때로 놀라곤 합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부모를 원망 아닌 원망을 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부모의 생활 모습을 닮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화목한 가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지금 보아도 선생님의 용모는 상당히 준수하십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주 미남이셨겠습니다. 혹시 영화감독이 되시겠다고 하신 데는 그 점이 작용한 것은 아니신지요.
젊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제법 들었습니다. 산골 촌놈이 도쿄에 가서 살아남으려니 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그런 점도 아마 조금은 작용하였을 겁니다. 그리고 영화감독은 독창적인 일을 많이 하면서도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이 대단히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재능을 적절하게 발휘할 수 있게 여건만 조성하면,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수 있으니 얼마나 매력적인 일입니까?
그도 그렇겠습니다. 특히 아이디어맨이셨던 부친의 재능이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거라고 본다면, 어쩌면 선생님의 숨은 재능을 꽃피우려는 파장이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런 포부를 접으시고 고향으로 돌아오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는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감독의 길을 걷고 있었지요. 꿈을 펼칠 수 있다는 생각도 특별히 들지는 않았으나 재미가 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앞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지요. 그런대도 그냥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지요. 어머니가 혼자서 작은 여관을 운영하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오셔서 고향에 가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혼자서는 힘들어 여관 운영을 못하겠다고요. 고민을 제법 하였습니다. 삼촌과도 의논을 하였지요. 그러다가 결심을 했어요. ‘그래, 내가 배운 것으로 고향을 좋은 곳으로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마침내 임자 만난 유후인
당시로서는 상당히 용기 있는 결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길을 눈앞에 두고 대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니셨겠지요. 나이가 들어 대도시의 쓴 맛을 있는 대로 다보고서도 내려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게 오늘의 한국에도 현실이 되고 있지요. 그건 그렇고 내려오신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으신지요?
왜 없어요. 여러 번 도망 아닌 도망도 갔었습니다. 도시의 가능성이 자꾸만 나를 잡아당기더라고요. 그러다 다시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간에 많으시겠습니다만, 특히 초반에 어떤 일이 아주 보람된 일로 기억되시는지요?
‘소 한 마리 먹고 고함지르기 대회'를 열었어요. 시골에서는 물건을 만드는 능력도 없고, 물건을 사용하는 능력도 없이 그대로 있었지요. 어디에서 먹더라도 같은 고기이지만, 산에 가서 고함을 지르며 먹으면 특별히 맛이 있습니다. 소 한 마리 먹고 고함지르기 대회는그러한 식으로 연출을 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 하였더니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행복감을 느끼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해내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자, 그래서 유후인 초원의 아름다움과 유후인 소고기가 확실히 맛이 있음을 매스컴을 통하여 전국에 알리자고 생각하였지요.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불평불만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함지르게 함으로써 해소시켜 주자는 생각을 한 거지요. 회를 거듭해가면서 세태를 반영하는 절규도 다양해졌습니다. 매스컴도 신이 나서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주었습니다. 산골의 작은 마을이 세상에 알려지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벤트는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영화감독 수업에서 터득한 수완이 유후인 산골을 세상에 뜨게 만든 동력이었음이 분명하군요. 동일한 사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이 선생님의 눈에 비친 유후인은 어제의 유후인이 아니기 시작하였군요. 마침내 유후인이 임자를 만난 것이로군요. 어떻습니까? 많은 웃음 뒤에는 쓰라린 고통도 있었지 싶습니다. 누구에겐가 대단히 미안한 마음이 드신 적도 있으시지요?
아내이지요. 그냥 영화감독이 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여관집 안주인이 되었으니……. 처음에는 피부병도 생기고 하여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잘 참아주어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주민의 힘으로, 자본으로, 그리고, 있는 그대로
위기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 또 유후인은 합병 문제로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경우가 많이 힘드셨는지요?
위기가 많았습니다. 골프장이 들어온다고 했을 때 많은 여관업자들은 찬성하였습니다. 그들을 설득하느라고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친구라는 친구는 다 찾아다니고 친구의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하여 결국 골프장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어요. 대규모 자본이 들어오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작은 것들이 서서히 잡아먹히게 된다고 생각하였지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일본 철도회사에서 손님을 배정해 주겠다며 조건을 제시하였지요. 방이 최소 10개씩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 때는 정말 방을 늘릴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속임수를 썼습니다. 감독수업을 받던 시절에 뚝딱뚝딱하며 세트를 만들던 실력을 발휘하였지요. 방 하나를 두 개처럼 보이게 하여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킨 적도 있습니다. 그냥 물 흐르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돌부리가 나오면 피해가고, 둑이 나오면 기다리고 하는 그런 식이었지요.
주민의 힘으로 주민의 자본으로 있는 그대로를 잘 보전하면서 생활관광지를 만들자는 생각을 상당히 일찍부터 하신 거로군요. (그래서 조그마한 호수의 물은 오늘도 맑고, 그 위로 까만 날개의 물잠자리가 사뿐거리며 날고, 여름이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곳. 그냥 물 흐르는 대로 살아왔다는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말씀으로 알겠다. 얼굴에 주름하며, 건강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걸어온 길이 어쩌면 고난의 길이었음에 틀림없으리라. 오늘의 유후인이 있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선생님의 많이 지친 듯한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건강을 위하여 특별히 하시는 운동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일로 모여 의논하고 현장 둘러보러 다니고 오시는 손님들과 이야기 나누다보면 하루해가 저뭅니다.
어떻습니까? 선생님의 여관이 유후인에서는 가장 고급스러운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쿄 시내에 있는 웬만한 호텔보다도 비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업가로서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사업을 하시는 게 혹시 있으신지요?
별다른 것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지역 사람을 많이 고용하자는 생각은 있습니다. 방이 18개인데 종업원은 100명이나 됩니다. 그 만큼 최대한의 서비스를 제공하여 손님을 안전하게 그리고 안심하게 해주려고 합니다. 또 하나는 내 집을 거쳐 간 사람 가운데서 유후인에서만 10곳에서 개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업을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지요.
큼직하게 베풀어서 홍보효과를 올리려고 하기 보다는 실제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나눠 갖자는 신조를 실천하고 계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유후인 사람들은 누가 물어도 유후인에서 최고는 선생님의 거북이정 별장이라고 하는 연유가 거기에 있는군요. 지역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실천하고 계시는 그것이 오늘의 유후인이 있게 한 중요한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군요. 그러면서 제각각의 특징을 살려나가도록 하시는 것은 선생님이 영화감독을 선망하면서 가지셨던 그 마음이고요. 또한 선생님께서는 정부에서 주는 관광 카리스마를 거부하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도 좋은지요?
서로 다른 것끼리 모여 특색을
살리는 것이 중요
난 정부에서 인위적으로 제도를 만들어서 주고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관광 카리스마는 내게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고 내가 필요해서 하는데, 상은 무슨 상입니까? 서로 다른 것끼리 모여 특색을 살려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쟁은 서로 다른 것을 같게 만들자는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합병 제도를 밀어붙이는 고이즈미 총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는지 궁금합니다.
동감입니다. 개개의 고유한 특색을 가꾸어 나가게 해주는 것이 나라에서도 마을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지요. 미래를 도모한다거나 효율성을 부르짖으며 함께 묶으려고 하는 행위는 진정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사람들의 몸짓이 아니지요. 선생님의 필생 사업을 누구에게 물려줄 준비는 되어 있는지요? 사업 계승을 위하여 특별하게 교육을 시키기라도 하셨나요?
제 아들 부부가 물려받기로 하였습니다. 아들도 도쿄에 가서 공부를 하고 지금은 내려와 있습니다. 특별히 따로 교육을 시킨 것은 없습니다. 유후인의 자연과 사람들과 잘 지내도록 배려하였을 정도입니다. 자라면서 보고 배웠겠지요.
장시간 고맙습니다. 유후인이 더욱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사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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